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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14)화 (114/120)
  • 외전 4화

    물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보물들도 이렇게 대충 쌓여 있으니 쓰레기 산 같아 보이는구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그녀였다.

    “여기서 마법방어구를 찾을 수나 있을까?”

    “기억하던 것보다 더 엉망이로군.”

    헬릭스도 미간을 찌푸렸다.

    “한 번에 못 찾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둘러보기라도 하자.”

    둘은 보물 창고를 돌아다니며 마법방어구를 찾기 시작했다.

    “이건 금괴, 이건 크리스털 술잔, 이건 백금 티아라.”

    레아는 이러다 정말 황금을 돌처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눈을 비비며 돌아다니던 그녀가 헬릭스를 불렀다.

    “방어구처럼 보이는 물건은 아예 안 보이는데?”

    “이상하군. 예전에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둘은 잠시 쉰 뒤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넓은 동굴 가득 쌓인 보물들을 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니, 도서관은 그렇게 잘해 놓고는 왜 여긴 이렇게 창고가 되어 있대? 제대로 분류하면 훨씬 더 쓸 만할 텐데.”

    “간 큰 도굴꾼들이라도 오면 여길 뒤지는 데만도 한참 걸릴 것 아닌가.”

    “하긴 도둑들이 책을 훔쳐 가진 않겠구나.”

    납득한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제대로 시스템 갖출 때까지는 그냥 두는 게 좋겠다.”

    “잘 생각했다. 돈 앞에서 눈 돌아가는 것에 이길 장사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왜 헬릭스가 말하면 더 무섭게 들리지?”

    그녀의 말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산전수전 더러운 꼴 많이 보고 겪은 남자의 해탈한 미소였다.

    헬릭스가 말을 돌렸다.

    “마법방어구를 못 찾으면 다른 쓸 만한 거라도 찾으면 좋겠군. 레아 너는 뭐가 가지고 싶나?”

    “음…… 마법통신구?”

    “그리고?”

    “그리고 또? 호감 마법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어.”

    “호감 마법? 사랑받는 마법 말인가?”

    헬릭스의 목소리에 보물 창고 구석에 놓인 루비 목걸이에서 반짝 빛이 났다.

    그렇지만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두 연인은 그걸 보지 못했다.

    “레아, 너는 지금도 사랑받는 사람이 아닌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 어?”

    말을 잇던 레아가 헬릭스 뒤를 가리켰다.

    “저거 옷 같은데? 방어구 아닐까?”

    둘은 얼른 일어나 다가가 물건을 살폈다. 통으로 입는 긴 튜닉 모양의 옷이었다.

    입으면 어깨에서 손목까지 긴 소매가 이어지고, 목에서부터 발목까지 품이 크게 내려오는 헐렁한 모양이었지만, 금사로 복잡한 자수가 놓여 무척 화려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런 거 입으면 누가 봐도 대마법사님이다 하겠다.”

    “그렇군. 어쩐지 눈에 익은데.”

    헬릭스는 마법 튜닉을 펼쳐 보며 유심히 살폈다.

    “방어막 기능이 있는 것 같다. 입으면 사용자한테 맞춰서 크기도 바뀌는 것 같고…….”

    “그럼 우리가 찾던 거네!”

    레아가 냉큼 그의 손에서 튜닉을 가져와 뒤집어썼다. 거대한 포대처럼 크기만 하던 옷이 그녀의 몸에 맞춰 줄어들었다.

    “와 이거 신기하다. 이제 방어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보면 되겠네.”

    “……아니다.”

    헬릭스의 손이 레아의 몸을 감싼 마법 튜닉을 힘주어 잡았다. 이런 마법 아티팩트 중에는 생각 못 한 기능이 담겨 있어 위험했다.

    ‘레아, 너는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한가!’

    전에 아즈라의 마나 조각을 냉큼 입으로 가져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정체 모를 옷을 입어 버릴 줄이야. 그가 속으로 후회하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은 이 튜닉을 제대로 다시 살펴보자.”

    “……헬릭스, 목소리가 왜 그렇게 급해?”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않나.

    헬릭스는 입을 열면 잔소리가 폭포처럼 새어 나갈까 봐 꾹 참았다. 곧 오염된 땅으로 떠나야 하는데 지금 그녀의 마음을 긁고 싶진 않았으니까.

    “레아, 일단 그걸 벗어 봐라.”

    “알았……어?”

    레아가 당황했다.

    아무리 낑낑대며 난리 쳐도, 마법 튜닉은 그녀의 몸에 풀로 붙인 것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속에 있는 옷을 벗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레아의 얼굴이 파래졌다.

    “안 벗겨져!”

    헬릭스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기다려 봐라.”

    그는 마법 튜닉 여기저기에 설명이나 문자라도 있나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화려한 자수가 있는 부분을 짚어 보고 이음매나 보석이 박힌 부분엔 마나도 넣어 보았다.

    레아의 귀가 빨개졌다.

    “읏…….”

    헬릭스가 몸 여기저길 만져 보며 마나를 넣어 대니 온몸이 간질간질하고 조금씩 열감이 끓어올랐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그녀는 열심히 제 반응을 억눌렀다. 요상한 마법 튜닉을 벗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불타올라서 어쩌겠다는 건가.

    ‘지금은 얼른 이것부터 벗어야……. 응?’

    이상했다.

    귀와 목이 화륵 달아오른 건 알았지만, 다른 곳까지 뜨거워지고 있었다.

    심장과 단전의 마나 코어가 맹렬하게 도는 느낌이 들면서 바람과 화염이 몸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레아, 튜닉 등판에 글씨가 나타났다.”

    “뭐, 뭐라고 쓰여 있어?”

    그가 고대어라고 중얼거리더니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이 옷은 위대한 마법사 모스카가 제자들에게 내리는 시험이다.”

    “시험?”

    “스승을 넘어설 때까지 벗을 수 없는 옷이라고……?”

    “뭐어?”

    레아가 놀라 돌아보았다. 헬릭스는 창백해져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괴짜 영감이 그런 옷을 만든다는 소릴 들었던 것 같다. 그 영감다운 짓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레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때는?”

    “모스카 영감 말인가? 제자들이 다 도망갔다.”

    “…….”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갑자기 전생에 한국에서 읽었던 무협지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옷으로…… 폐관 수련 비슷한 걸 시키는 거네?’

    무협지에서도 싫다는 제자들을 강제로 가두고 수련시키는 건 미친 스승 아닌가? 그런데 이 마법사는 아예 옷도 못 벗게 하면서 수련시키려고 했다고?

    갑자기 어지러워진 레아가 이마를 짚었다.

    “레아, 괜찮나?”

    “으…….”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헬릭스.”

    긴장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모스카란 마법사가 얼마나 셌는데?”

    “……대마법사 중의 대마법사라고 불렸다.”

    레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헬릭스는 내가 이거 못 벗어도 도망가지 않을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치, 그럴 리가 없지?”

    잠시 풀어져서 웃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 침울해졌다.

    “그럼 나 엄청 센 대대대마법사 될 때까지 제대로 씻지도 못할 거 아냐? 샤워마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난 물 속성은 없는데?”

    레아의 말에 헬릭스가 고장 난 로봇처럼 반응했다. 그의 고개가 끼기긱 소릴 낼 것처럼 천천히 그녀에게 향했다.

    “……샤워마법?”

    “응. 옷 입고라도 씻어야 하잖아. 못 벗으니까.”

    레아가 옷을 못 벗는다.

    무서운 선고를 들은 양 헬릭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소리가 없었다.

    “……빨리 대대대마법사가 되어 벗으면 될 게 아닌가?”

    그가 서둘러 그녀를 제 앞에 앉혔다.

    “그, 그런가?”

    “그렇다.”

    단호한 대답에 휘말린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의 큰 손이 바삐 심장과 단전 위치로 마나를 넣어 주었다.

    “레아 넌 이미 대마법사니 내가 도와주면 금세 대대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다. 힘을 내라.”

    “어, 어? 힘낼게……?”

    뭔가 이상했지만 헬릭스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그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숨을 몰아쉬면서 제 마나와 그가 넣어 준 마나를 함께 몸에 휘돌게 하려 집중했다.

    헬릭스의 마나가 무서운 속도로 그녀에게 쏟아졌다.

    끙끙거리며 집중하던 레아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그를 돌아보았다.

    “근데 헬릭스, 이렇게 급하게 할 필요 있어? 나가서 천천히 벗어도 되잖아.”

    “천천히라니, 무슨 소리인가.”

    헬릭스는 세상 끔찍한 소릴 들었다는 듯 정색했다.

    “모스카 그 영감이라면 옷에 무슨 짓을 더 했을지 모른다, 빨리 벗어서 다시 여기 버리고 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까진 안 했을 거 같은데?”

    “레아, 네가 마법 시대 괴짜 마법사들의 인성을 몰라서 그런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다. 얼른 마나 샤워를 해 보지.”

    “…….”

    레아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마나 샤워라면 예전에 비약 중독자들 치료할 때 했던 긴급 조치 아냐?’

    그렇지만 지금 헬릭스의 표정은 그때보다 더 급해 보였다. 잠시 미심쩍어하던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가 그렇게 말하면 맞겠지, 뭐.”

    그가 멈칫했다. 수려한 얼굴에 죄책감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이런 긴급 상황 앞에 오래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파앗!

    긴긴 수호자의 인생에서 최대치를 찍는 마나가 방출되며, 레아를 향한 마나 샤워가 시작되었다.

    ❀ ❀ ❀

    퀘엥.

    레아는 며칠 만에 해쓱해져서 아즈라의 보물 창고에서 나왔다.

    그와 그녀의 손에 마법 튜닉은 없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계속 쏟아진 수호자표 급속 마나 샤워로, 레아는 방어구 따위는 필요 없는 위대한 대마법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빠르게 대대대마법사 급이 되었지만 그녀는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다.

    “으…….”

    삭신이 쑤시고 얼얼해서 죽을 것 같았다. 레아의 앓는 소리에 헬릭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후회했다.

    ‘너무 기뻐서 튜닉을 바로 벗어 버린 게 잘못이었어…….’

    안에 입었던 옷을 다 벗은 걸 왜 깜박했던 걸까.

    헬릭스는 마법 튜닉을 벗은 뒤에도 왜 마나 샤워를 쏟아부으며 제게 달라붙었던 걸까.

    “……거짓말쟁이.”

    레아의 중얼거림에 그가 움찔했다.

    “아픔이란 걸 모르는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더니, 계약 사기야.”

    “크흠.”

    헬릭스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마나를 잔뜩 부어 놨으니 푹 쉬어라.”

    미안해하며 말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깐 달걀처럼 반들반들했다.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에서 뿜뿜 행복의 빛이 넘쳐흘렀다.

    그가 그 얼굴로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래도 레아, 네 덕분에 여러모로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레아가 헬릭스를 쏘아보았다.

    ‘왜 내가 강해졌는데 당한 기분이지?’

    뚱한 얼굴로 쳐다보는 그녀의 귓가를 그가 살살 매만졌다.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이었다.

    “잘 다녀오라고 안 해 주나?”

    “당연히 잘 다녀와야지.”

    레아가 흥 하고 헬릭스의 멱살을 슬쩍 잡아끌었다. 순순히 끌려오는 그를 향해 그녀가 속삭였다.

    “다치면 각방이야.”

    “……절대 다치지 않고 몸 성히 다녀오겠다.”

    그제야 레아가 비싯 웃었다.

    “헬릭스가 나 걱정하는 것처럼, 나도 헬릭스 걱정하는 거 알지?”

    그녀가 헬릭스의 뺨에 제 이마를 비비며 말했다.

    “무사히 나한테 돌아와. 안 그러면 앓아누울 거야. 앓아누웠다가 막 여기저기 불 지르고 파괴해서 나쁜 대마법사 되어 버릴 거야.”

    “그런 대마법사를 혼내 주는 게 내 일인데.”

    “어머 무서워라.”

    말과 달리 이어지는 웃음은 청량했다. 그도 웃으며 레아에게 제 얼굴을 비볐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제 연인.

    떨어지는 순간이 아쉬운 만큼, 다시 만날 날도 기대하게 만드는 그녀의 눈웃음이 오늘따라 더 예뻤다. 까르륵 장난스럽게 울리는 웃음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레아, 네 웃음에 중독될 것 같다.”

    “빨리 와서 또 보고 들으면 되지.”

    그래야겠다.

    이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 전에, 파랗게 반짝이며 접히는 이 눈빛이 아른거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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