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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11)화 (111/120)
  • 외전 1화

    여름이 왔다.

    해가 길어지고, 헬 산맥도 싱그러운 녹음으로 부풀어 올랐다.

    마법의 탑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도 조금 변했다.

    늘 따스한 김이 오르던 온천은 풀장으로 바뀌며 차가운 물로 채워졌고, 하얀 꽃을 피웠던 나무들은 잎이 무성하게 우거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다.

    흔들흔들.

    레아는 나무 그늘 밑 해먹에 앉아서 다리를 가볍게 저었다. 음료수와 디저트를 가져온 자넷이 물었다.

    “탑주님,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응. 충분해.”

    그녀가 자넷이 건넨 음료를 들이켰다. 얼음이 동동 뜬 탄산수에서 산뜻한 레몬과 라임의 맛이 났다.

    “아, 시원하다.”

    여름날 이렇게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니.

    새삼 제가 건강하단 사실이 실감되어서 레아는 웃었다. 지켜보던 자넷도 따라 미소 지었다.

    “입에 맞으세요?”

    저를 보고 웃는 얼굴이 맑았다. 레아가 음료를 마시며 그런 자넷을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10개월쯤 되었을까. 그사이 자넷은 산골 소녀티를 벗고 유능한 하녀가 되어 있었다. 키도 조금 컸고, 얼굴도 어른스러워졌다.

    그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뜯어보자 자넷이 제 얼굴을 쓸었다.

    “왜요, 탑주님?”

    “아니. 자넷도 많이 달라졌구나 싶어서. 분위기도 멋있어지고.”

    “제가요?”

    자넷이 손사래를 쳤다.

    “멋진 건 탑주님이죠!”

    “그래?”

    “그럼요!”

    그녀가 눈을 빛냈다.

    “저는 아직 잊을 수 없어요. 망할 신관 놈한테 발정의 악마 추하다우스냐고 하시던 그 모습! 그 박력!”

    “콜록!”

    레아는 사레가 들려 콜록댔다.

    “……왜 하필 그 대사야?”

    “그야 제 가슴을 울렸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말로 이기는 능력이 있었으면! 너무 멋있었어요!”

    우리 자넷 취향이 좀 이상한 게 아닐까.

    ‘설마 내 옆에 붙어 있다 날 닮아 가는 건 아니겠지?’

    레아는 이래저래 민망해져서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그런 그녀에게 냉큼 부채를 갖다 바치던 자넷이 음료를 가져온 트레이를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수도에서 소공작님께 편지가 왔어요.”

    “큰오빠가?”

    레아는 자넷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 뜯었다. 그녀가 해먹을 느릿하게 흔들며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흐음…….”

    레아의 푸른 눈이 날카로워졌다. 자넷은 집중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물러났다.

    그녀가 톡톡 편지를 치며 중얼거렸다.

    “진짜 이제 차기 왕권을 준비하려는 건가?”

    “차기 왕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으악!”

    해먹에 감겨 그대로 뒤로 넘어가려는 레아를, 헬릭스가 급히 잡았다.

    “뭘 그렇게 놀라나.”

    “딴생각 중이었단 말이야…….”

    여전히 벌렁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그녀가 투덜거렸다. 그가 달래듯 레아의 어깨를 만지다 편지를 발견했다.

    “소공작에게서 편지가 왔나 보군.”

    “응. 패트릭 왕자가 요즘 오빠들한테 자꾸 자기 오른팔이 되라고 하나 봐. 작은오빠한텐 새로 작위도 내려 주겠다고 한다던데.”

    “흐음.”

    헬릭스가 레아의 표정을 살폈다.

    “레아, 소공작과 루얀이 패트릭 왕자의 세력이 되는 게 싫으냐?”

    “싫을 리가 있겠어?”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패트릭 왕자한텐 불만이 없어. 고마운 부분도 많고. 그렇지만 페이런 귀족들 중에 몇 명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네.”

    그녀만 아르카이크 황태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으면 전쟁까진 안 했을 거라느니, 쇼만 할 줄 아는 어린 여자 말을 너무 믿어 주는 거 아니냐느니. 전쟁 때 귀족들이 지껄였던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혈압이 올랐다.

    “막상 청혼이 왔을 때 지들이 뭐라고 했는데? 소드마스터란 국부를 유출시킬 수 없으니 패트릭 왕자나 칼로시 놈들이랑 결혼해야 한다고 난리 쳤으면서.”

    헬릭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건너와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내가 더 옆에서 힘이 되어 줬어야 했다.”

    후회하는 목소리에 레아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죄인은 네 죄를 알렸다!”

    “정말 잘못했다.”

    “어허, 정말 잘못했습니다라고 해야지.”

    “……정말 잘못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에 그녀가 빵 터져 웃었다. 레아가 여왕처럼 우아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네 죄를 더 묻지는 않겠노라.”

    헬릭스는 몸을 숙여 그녀가 내민 손에 입술을 묻었다.

    “자비로운 나의 여왕님.”

    따뜻한 숨결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그가 속삭였다.

    “그래도 벌을 내려 주십시오.”

    “벌?”

    레아가 눈을 반으로 접었다.

    “무슨 벌을 내려 주지?”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뭐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다정한 음성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며 되물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건 다?”

    “진짜, 모두 다.”

    “그럼 나 하나 있는데.”

    레아가 다른 손을 뻗어 헬릭스의 가슴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심장 박동에 제 가슴도 괜히 더 강하게 뛰었다.

    그녀가 선고했다.

    “죄인은 반성하며 앞으로 내게 계속 사랑을 바치도록 해라.”

    그가 제 심장 위에 올린 레아의 손을 감쌌다. 꽉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소중한 것을 만지듯 하얀 손을 잡았다.

    “……그건 벌이 아니라 상이 아닌가.”

    쪽. 헬릭스가 그녀의 손등에 재차 입을 맞췄다. 레아가 꺄르륵 웃었다.

    “그런가? 상인가?”

    “그렇다.”

    그가 그녀의 손을 제 뒤로 두르며 꼭 끌어안았다. 레아가 얼결에 마주 안으며 헬릭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청량하고 싱그러운 향이 풍겼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를 계속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다니, 이보다 더 큰 상이 없다.”

    솨아아.

    나뭇잎들을 흔들던 바람이 둘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름의 나무 그늘. 푸른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그녀를 껴안은 그에게서 나는 익숙한 체취. 언제나처럼 빠르게 박동하는 그의 심장.

    그녀가 그를 더 꼭 껴안으며 말했다.

    “나한테도 헬릭스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상이야.”

    헬릭스는 숨을 멈췄다.

    솨아아아.

    나뭇잎들을 흔드는 바람이 저를 흔드는 것 같았다. 세상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에, 그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어떻게 레아는 이렇게 한순간에 제 세상을 천국으로 뒤바꿔 놓는 것인가.

    “레아.”

    숨을 토하듯, 헬릭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나 여깄어, 헬릭스.”

    제 가슴에 안겨 있어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또 어찌 알았을까. 사랑스러운 대답에 그가 레아의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작게 웃는 몸짓에 더 자잘하게 입을 맞추는 사이, 바람이 그녀가 해먹에 내려놓았던 편지를 휙 날렸다.

    “아, 편지!”

    레가가 헬릭스에게서 몸을 떼며 바람마법을 썼지만 편지는 더 멀리 날아가기만 했다. 헬릭스가 얼른 달려가 편지를 잡아 디저트 트레이 밑에 놓았다.

    “요즘 바람 장난이 느는 것 같다.”

    “응. 대마법사 되고 나니까 자꾸 이래.”

    대마법사가 되자 불도 바람도 그녀를 더 친밀하게 느끼는 기색이었다. 바람이 미안한 듯 레아의 뺨을 훑다가, 물러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더 헝클였다.

    “아이참.”

    유쾌함과 귀찮음이 뒤섞여 레아가 콧잔등을 찡그릴 때였다.

    가까이 온 헬릭스의 큰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한 번에 잡아 정리해 주었다. 매끄러운 백금발을 귀 뒤로 꽂으며,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레아의 귓불을 만졌다.

    “됐다.”

    문지르는 손끝은 담백했지만 그녀의 귓가에서 목선으로 이어지는 하얀 피부에는 솜털들이 바짝 일어섰다. 레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간지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이렇게 많이 만져도 매번 간지럼을 타나.”

    헬릭스는 신기하고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귓불에 이어 뺨을 슬쩍 쓸었다. 경계심 없이 말갛게 웃는 표정과 달리 뺨에는 보얗게 솜털들이 일어났다.

    “…….”

    그는 레아의 이런 간극이 싫지 않았다.

    마음으론 퍽 믿고 있으면서, 몸은 남자로 의식하며 긴장하는 모습이라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헬릭스가 느릿하게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는 손길에 레아의 귀가 달아올랐다. 그가 몸을 숙여 빨간 꽃잎 같은 귀를 살짝 깨물었다. 오스스 다시 올라오는 솜털들과 부드러운 피부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헬릭스의 입술이 목으로 미끄러졌다.

    “으응…….”

    그녀가 반응하며 허리를 틀자 해먹이 흔들렸다. 그는 균형을 잃는 레아를 보호하듯 껴안고는 더 바짝 몸을 붙였다.

    “아으…….”

    출렁이는 해먹에 파묻힌 그녀가 작게 신음했다. 뜨거운 손과, 입술과, 헬릭스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그녀를 간지럽히는 긴 은발의 감촉에 점점 더 정신이 몽롱해졌다.

    “레아.”

    나직하고 가라앉은, 열기를 애써 누르는 목소리. 그 다정하고 갈급한 부름에 그녀도 목이 마르고 가슴이 뛰었다.

    “왜…….”

    레아가 팔을 들어 헬릭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왜 참는 소릴 내. 안 참아도 되는데…….”

    “…….”

    그의 회색 눈에서 이성이 빠져나갔다.

    ❀ ❀ ❀

    헬릭스는 제 옆에서 잠든 레아를 보며 반성했다.

    도롱도롱 약하게 코까지 고는 모습이 너무나 지쳐 보였다.

    ‘……내가 너무했나.’

    얼굴은 물수건으로 닦아 주었지만, 부푼 입술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뽀얀 얼굴빛도 어쩐지 좀 파리하게 변한 것 같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둥근 어깨를 짚으며 슬쩍 마나를 넣어 주자, 퓨 하고 이상한 한숨을 뱉더니 그쪽으로 돌아누웠다.

    ‘자는 모습까지 이렇게 귀여울 일인가.’

    그가 참지 못하고 뺨을 슬쩍 찔렀다. 레아가 살짝 찡그리며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헬릭스…….”

    약간 허스키해진 목소리가 꿀처럼 달게 들렸다.

    헬릭스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탈출했다 돌아온 이성이 다시 들썩거렸다.

    “사기야. 유교맨인 줄 알았는데…….”

    “…….”

    뭐가 사기란 건가.

    유교맨은 또 뭔가.

    레아는 가끔 이렇게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잠꼬대로는 더했다.

    “살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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