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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10)화 (110/120)
  • 110화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페이런의 수도는 축제 분위기였다.

    한때 더포드 남작의 붉은 장미로 뒤덮였고, 그 전에는 페이릴리 팬클럽이 백합으로 가득 채웠던 번화가는 이제 불꽃 장식을 단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니, 자네도 그걸 달았나?”

    “자네도?”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상인들이 목소리를 높여 호객했다.

    “대마법사 레아 피어트 님을 기념하는 펜던트 팝니다! 뚜껑에는 정교한 불꽃 조각이, 안에는 대마법사님의 귀하신 초상이 그려진 펜던트 팝니다!”

    “불꽃의 기운을 담은 마력석 브로치가 단 5골드! 단 5골드에 화염의 기운을 느껴 보세요!”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열성 종자들은 극장으로 달려갔다. 시내의 유명한 극장마다 레아 피어트의 활약을 공연하면서 연일 전석 매진이었다.

    특히 ‘불꽃의 마법사’라는 연극이 제일 인기가 좋았다. 여배우 니니안이 연기하는 레아가 엄청나게 생생하고 매력적이라는 평이었다.

    연극을 보고 나온 이들은 다들 극장을 쉬이 떠나지 못하고 감상을 나눴다.

    “크, 그 장면에서 레아 피어트 님이 외치실 때 아주 소름이 돋았다니까! 나를 따르라!”

    “나는 거기, 초반에 그때가 참 멋있더라고. 예쁘면 마녀? 그럼 난 대마녀냐? 하면서 그 예쁜 얼굴이 확 드러나는데, 어우…….”

    “우리 대마법사님이 참으로 아름다우시고 출중하시지요!”

    쑥 끼어든 퉁퉁한 남자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기겁했다.

    “다, 당신 뭐야?”

    “이번에 우리 대마법사님 팬클럽을 창단한 랜달 더포드라고 합니다. 관심 있으시면 저희 팬클럽과 함께 대마법사님의 매력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눠 봅시다!”

    “랜달 더포드?”

    듣던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그 찌질한, 장미와 백합 전쟁으로 레아 피어트 님을 괴롭혔던 그놈?”

    “아, 아니 오해십니다.”

    “페이릴리 팬클럽으로 레아 피어트 님을 지겹게 쫓아다니더니, 이젠 대마법사 팬클럽이냐?”

    “쯔쯔, 칼로시 대공 집안이 다 망해도 정신을 못 차렸구먼.”

    “저 인간은 더 혼 좀 나야 돼! 트로우 백작이랑도 손잡았었다던데!”

    더포드 남작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오, 오해십니다! 저는 대마법사 레아 피어트 님의! 아름답고! 강력하고! 결단력 넘치시는! 모습을 멀리서 흠모해 왔으며…….”

    “썩 꺼져! 비열한 놈!”

    “얼굴 가죽도 두껍지!”

    사람들의 야유에 더포드 남작은 헐레벌떡 도망쳤다. 그 와중에도 가슴에 꽂은 불꽃 펜던트는 꼭 쥔 채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비웃었다.

    “저런 놈을 놔두시다니, 레아 피어트 님은 자비로우시기도 하지.”

    “굳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 있으시겠나? 어차피 아무도 상대 안 할 텐데.”

    “루얀 피어트 님이 보시면 검기로 쓱싹해 버리시는 거 아냐?”

    ❀ ❀ ❀

    겨울이 끝나고, 봄.

    북부 헬칸에는 거대한 쌍둥이 탑이 세워졌다.

    ‘우리 레아가 마법의 탑 수장이자 드래곤로드 아닙니까? 두 마법집단의 우두머리가 된 거니까, 그 업적을 기념해서 탑도 두 개로 지어야지요!’

    루얀의 의견에 적극 찬성한 공작가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리케일 소공작이 온 나라의 건설업자와 장인들을 부르고, 피어트 공작이 물량공세를 퍼붓고, 힘 쓰는 일에는 루얀과 피어트 기사단이 나섰다.

    마법학교, 연구동, 수련동 등 마법사들을 체계적으로 길러 낼 수 있는 시스템은 레아와 헬릭스와 주치의가 머리를 맞대고, 간혹 루얀과 카라이와 필도 의견을 보탰다.

    공간 활용과 꾸미기라면 자기가 전문이라고 진두지휘한 공작부인의 손끝에선 세련되고 쾌적한 공간들이 태어났다.

    쿠앙이를 비롯한 해츨링들은 탑이 올라가는 동안 부지런히 자재를 날랐고, 여기저기서 마법을 쓰면서 타르를 녹이고 석고를 굳히는 등 시간이 걸리는 일들을 빠르게 처리했다. 덕분에 건물은 드래곤들의 땀과 정성이 배어 여러 마법 효과를 두르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만 년도 거뜬할 것 같다.”

    헬릭스까지 약간 질린 목소리로 감탄할 정도였다.

    이팝나무의 하얀 꽃들이 구름처럼 피어난 어느 봄날, 전례 없이 빠르고 거대하고 단단하게 지어진 마법의 탑 완공식이 열렸다.

    “어머, 어쩜…….”

    “환상의 나라에 초대받은 것만 같군요.”

    초대받은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북부의 자연과 어우러진 쌍둥이 탑의 대담한 위용에 한 번 놀라고, 마법의 탑 내부가 넓고 밝고 쾌적해서 또 한 번 놀라고.

    이 모든 것의 주인인 강력한 마법사가 너무나도 젊고 아름다운 것에 새삼 다시 놀랐다.

    완벽한 완공식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여러 손님들의 감탄과 인사가 한참 이어진 뒤, 공작부인은 레아를 붙들고 빠져나왔다.

    “레아야, 이제 주인 노릇은 거의 다 했으니 가서 쉬렴.”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올라가 봐. 엄마가 선물을 마련해 놨단다.”

    공작이 옆에서 약간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을 보탰다.

    “커흠, 아빠도 거들었다. 네 오빠들도.”

    “지금까지 해 주신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어리둥절해하는 레아를 공작 부부가 웃으며 등 떠밀었다. 그녀를 인계받은 자넷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안내했다.

    “공녀님, 이 마법 사다리는 맨 꼭대기층으로만 통하는 거래요. 맨 꼭대기층은 공녀님…… 아니 탑주님이 쓰실 거고요.”

    “내 전용 엘리베이터…… 아니, 마법 사다리야? 꼭대기층이 내 집이고?”

    “예. 어서 올라가 보세요.”

    전생에서 꿈도 못 꿔 봤던 펜트하우스를 마탑 꼭대기에 지어 보네. 레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으로 올라갔다.

    “레아. 어서 와라.”

    조금 전부터 안 보이던 헬릭스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우리……. 크흠.”

    말이 안 나오는지 그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우리……의…… 집에 온 걸 환영한다.”

    넓은 테라스를 끼고 두 개의 돔처럼 빛나는 꼭대기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와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헬릭스는 감탄하는 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껏 잡아 본 그의 손 중에서 제일 차가운 것 같았다. 그녀가 놀라는 와중에도 헬릭스는 레아를 꼭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와아…….”

    넓은 테라스에 하늘이 가까이 맞닿아 있었다. 꽃이 만발한 나무들 아래로 야외온천이 김을 피워올리는 광경에 그녀가 입을 벌렸다.

    “이걸…… 언제 다 준비했어?”

    레아가 목이 잠겨서 뒷말을 못 잇자 헬릭스는 초조해하며 물었다.

    “공작가 사람들한테 물어봐서 마련했는데…… 마음에 안 드나?”

    그녀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겨우 입을 떼었다.

    “아냐, 너무 좋아. 좋아서 말이 안 나와.”

    헬릭스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레아를 마저 이끌어 테라스 중앙으로 데려갔다.

    봄꽃이 하얗게 핀 꽃나무가 온천 위로 그늘을 드리우며 꽃잎을 떨어트리고, 따뜻한 물이 가득 차 김이 폴폴 올라왔다.

    헬릭스가 근처 해먹에 그녀를 앉히고 옆에 앉았다. 레아는 신고 온 신발을 톡톡 벗고 온천 가장자리에 발을 담갔다.

    “으아아…….”

    얼굴이 스르르 풀어지는 그녀를 보던 그가 툭 물었다.

    “이번엔 제대로 온천에 찾아온 건가?”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무슨 소리야?”

    “네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온천에 속아서 왔다고 했지 않나. 아즈라가 영험한 온천이 있다고 꾀었다고.”

    “푸하,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당연하지 않나. 레아 너의 일인데.”

    “진짜로?”

    놀라던 레아가 까르르 웃었다.

    “뭐야, 그걸 어떻게 기억해? 헬릭스, 그때부터 나 좋아했구나?”

    헬릭스가 진지하게 고백했다.

    “사실 레아 너를 아즈라의 레어에서부터 짝사랑해 왔다.”

    “어?”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내가 먼저 좋아한 거 아니었어?”

    “아니다.”

    그가 분명하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다.”

    “…….”

    “오래전부터 많이 좋아했지만 이게 그런 감정인 줄 미처 몰랐다. 네 모든 게 눈에 박히고, 네가 닿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수호자에게 걸린 저주인 줄 알았다.”

    “……뭐야, 칭찬만 늦게 배우는 줄 알았더니.”

    레아는 눈이 빨갛게 돼서 타박했다.

    “왜 이렇게 느렸어?”

    “느렸다. 바보처럼 느렸다.”

    헬릭스가 곧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런 내가 너의 연인이 되어도 괜찮을지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마음을 전해 왔다.

    “레아, 많이 사랑한다.”

    “…….”

    “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가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언제나 레아 네게 더 도움이 되고 싶고, 늘 옆에 있고 싶다.”

    가슴이 조여들었다가, 팡 터질 것 같았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두근두근 울렸다.

    귓가에서 심장이 북을 치는 것 같았다. 목이 타서, 레아는 해먹 옆에 놓인 샴페인을 쭉 들이켰다.

    그녀가 맨발로 찰랑찰랑 온천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 물을 가르고 가던 레아가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그럼 이리 와.”

    헬릭스가 홀린 듯 그녀를 따라 더운물을 헤치며 들어섰다.

    레아는 무엇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 자신만 바라보며 다가오는 헬릭스를 보자 가슴이 새삼 뛰었다.

    어스름 보랏빛으로 변하는 하늘, 저녁이 되며 선뜻해지는 봄의 공기, 물살 위로 꽃잎들을 후두둑 떨어트리며 흔들리는 꽃나무들.

    그리고 그 모든 게 변해도 그녀를 바라볼 것 같은 그.

    다가온 헬릭스가 레아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경의를 담은 듯 정중한 동작이었다.

    “늘 이 안에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이 있다고 생각했다.”

    젖은 입술이 재차 고백했다.

    “레아 너는 내 세상을 바꾸었다. 너를 만나기 전에는 세상을 수호하는 일은 의무인 줄만 알았다.”

    그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안다. 세상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기쁜 일이야?”

    “레아 네가 사는 세상 아닌가.”

    헬릭스는 행복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내가 지켜야 할 세상에 네가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이 사랑스럽다. 내가 그런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수호자라는 게 자랑스럽고.”

    헬릭스는 양손으로 레아의 얼굴을 감쌌다.

    “그 동굴에 네가 기적처럼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난 이런 감정을 몰랐겠지. 이렇게 충만하고 뿌듯하고…… 심장이 조여들 만큼 행복한 감정을. 그러니 레아, 그런 네게…….”

    그가 속삭였다.

    “나를 다 주고 싶다.”

    “…….”

    “받아 주겠나?”

    레아의 뺨이 달아올랐다. 눈앞의 남자가 흐려지는 건 온천에서 뻗어 오르는 수증기 때문일까. 이대로는 머리가 녹아 버릴 것 같아, 그녀가 코끝을 찡그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 사양 같은 거 안 할 거야. 헬릭스 마음도, 몸도,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받을 거야.”

    레아는 물에 젖은 손을 들어 그의 가슴께에 땅땅, 도장 찍는 시늉을 했다.

    “다 내 거야.”

    헬릭스가 순간 멈칫했다. 그 반응에 그녀도 뒤늦게 살짝 얼어붙었다.

    레아가 슬그머니 손을 떼는데 그의 손이 강하게 붙잡았다. 열기가 넘실대는 회색 눈과 눈물 고인 푸른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훅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살자.”

    헬릭스는 감격과 기쁨으로 환해져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도 되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너와, 남은 생을 계속 함께 살아가도 되나?”

    레아는 그 기쁨에 자신까지 몸이 떨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 놔두고 혼자 살 생각이었어?”

    투정하듯 팔을 벌리자 헬릭스가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물보라가 일어 흠뻑 젖었지만, 둘 중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따뜻한 물속에 반쯤 잠긴 몸도 서로를 껴안은 몸도 뜨겁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레아.”

    그가 부르는 그 목소리가 마법 같았다. 그녀의 세상이 좁아지고 온통 익숙한 것으로 가득 찼다. 북부의 숲 같은 헬릭스의 체향, 터질 것 같은 그의 심장 소리, 그녀를 늘 보호하듯 감싸는 온기.

    레아는 헬릭스의 가슴을 꽉 마주 껴안았다.

    “이렇게 너랑 같이 살래. 오래오래.”

    “……건강하게?”

    “당연하지.”

    처음 계약을 떠올리며 둘이 키득키득 웃었다. 헬릭스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연인의 입술을 깨물었다.

    포퐁.

    “앗! 헬릭스, 마나를 이렇게 넣는 건 반칙…… 아니야?”

    “일단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고 규칙을 정하는 게 어떤가.”

    “아니, 그, 으……으앗?”

    마법의 탑이 새로 시작되는 밤.

    꼭대기층 옥상정원에선 봄바람에 꽃잎들이 떨어졌다. 풍등처럼, 반딧불이처럼 두 연인 사이를 밝히던 마나는 점점 더 밝아져만 갔다. 오래도록.

    마탑의 역사도, 둘의 나날들도 이제 시작이었다.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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