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전쟁의 승리 후, 많은 이들이 레아를 따르겠다고 나섰다.
“저희 이번에 많이 반성했습니다.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귀족 나리들 말이 틀린 게 없지 뭐예요?”
마법사들이 레아를 우러르며 말했다.
“정말 경험 없는 저희들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저희가 어떤 취급을 당했을지…….”
“경험이 없는데 당연하지. 처음부터 내가 기싸움 때문에 쪽수라도 있어야겠다 싶어서 무리한 거야. 신경 쓰지 말게. 경험이야 앞으로 쌓으면 되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 경험을 공녀님 밑에서 쌓고 싶습니다!”
“어…… 어?”
제국의 일반인 마법능력자들 역시 많은 수가 제국을 떠나 레아를 따르겠다고 했다. 황태자의 대량 비약 투여로 고향과 가족을 잃고 조종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오켄 제국 쪽으로는 침도 뱉고 싶지 않습니다!”
“마법사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시는 공녀님을 모시고 싶어요!”
의외로 뱀 기사단원 중에서도 몇몇 이들이 그녀를 따르고 싶어 했다.
“……어릴 때 인체실험 이후 황태자에게 복종하며 살아온 거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저희 경력직인데…… 드래곤로드께서 거두셔서 써먹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카라이는 어쩐지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모양이었다.
“주인님께 첫 번째로 복종하는 건 나다.”
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카라이,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그렇지만 이제 공녀님이라고 부르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제 레아의 위상은 그저 공작가의 영애로 머물기엔 너무 커져 버렸던 것이다. 헬릭스가 제안했다.
“레아, 이참에 마법의 탑을 재건하는 건 어떤가?”
“마법의 탑?”
그녀는 솔깃했다. 마법학교만으로는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마법사가 많아졌으니, 아예 마탑을 부활시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마법의 탑 세우면 마탑주도 세워야겠네? 헬릭스가 할 거야?”
헬릭스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웃었다.
“나는 수호자다. 마탑주는 레아 네가 해야지.”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저 드래곤로드인데요?”
“안다.”
“그런데 마탑주도 하라고요?”
“드래곤로드와 마탑주가 한 사람이면 내가 수호자 임무를 하기가 훨씬 수월하겠군.”
어라? 그녀는 입을 오므리며 눈을 더 빠르게 깜박였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럼 만날 업무 핑계로 붙어 있을 수 있겠네?”
“그럼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나.”
절대 놔주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손이 레아를 꽉 잡았다. 가슴이 든든해서 그녀가 헤실헤실 웃었다.
“이제 도망 못 가지롱. 내가 마탑주에 드래곤로드니까 헬릭스는 싫어도 나랑 봐야 하지롱.”
“싫어지는 때가 올지 모르겠다.”
헬릭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볼 때마다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아픈데.”
레아는 충동적으로 그의 멱살을 꽉 잡아 끌어내렸다.
쪽. 그녀가 헬릭스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의 매끈한 피부와, 예상치 못한 까끌까끌한 느낌이 레아의 입술을 스쳤다.
‘으앗.’
저질러 놓고 그녀가 오히려 놀랐다.
헬릭스가 숨을 멈추고 몸을 굳히던 그 감각.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여자에게 집중하고 놓치지 않으려는 그 긴장이, 겁도 없이 훅 들어섰던 그녀에게까지 느껴져서.
미친 듯이 의식되는 동시에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신이 돌아오며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미쳤어, 미쳤어!’
석고상처럼 굳은 헬릭스에게서 후다닥 떨어졌다.
레아가 저질러 놓고 민망해서 도망가려 할 때였다. 떨어지려던 몸이 휙 반쯤 돌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헬릭스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손을 꽉 잡았던 것이다.
“놔아.”
“안 된다.”
단호하게 말한 헬릭스가 슬쩍 깍지까지 꼈다.
생긴 기회는 지나치지 않는 헬릭스였다. 퐁. 손을 간질이며 마나가 들어왔다. 다른 때보다 훨씬 뜨거운 마나였다.
레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헬릭스가 눈을 마주치며 깍지 낀 손을 슬쩍 풀었다가 다시 천천히 잡았다. 긴 손가락이 레아의 손가락을 비비듯 스치며 얽혀 왔다.
“이렇게 하면 손이 차지 않을 거다.”
“……난 불꽃의 마법사라 뜨거운 여자거든?”
그녀가 응수하며 그의 손을 같이 깍지 끼었다. 당당하게 말한 것과 달리 귀가 새빨갰다. 헬릭스가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레아 네 귀가 귀엽다고 내가 얘기했던가?”
“안 했는데. 난 원래 귀여워.”
“그렇게 말하니까 목도 귀여워졌다.”
“……안 되는데. 나 이제 마탑주니까 위엄 있어야 하는데.”
레아의 작은 투덜거림에 그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 ❀ ❀
전후처리에서 레아와 헬릭스가 맡아야 할 건 마법 부분이었다. 두 사람은 레아를 따르겠다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마법사들은 마법의 탑을 만들 거니까 거기 소속시키면 되겠는데. 해츨링들은 어떻게 하지? 마법의 탑에서 같이 지내긴 좀 그렇잖아.”
헬릭스는 생각해 둔 게 있던 모양이었다.
“북부 헬 산맥 너머의 땅 말이다.”
“응. 오염된 땅?”
“거기에 드래곤들 터전을 만드는 건 어떤가?”
“음……?”
의외의 제안에 레아가 의아해했다.
“왜 하필 거기야?”
“드래곤들을 인간들과 너무 섞여 살게 하면 위협이 된다. 마탑주와 드래곤로드를 같이 겸하는 네게 귀찮은 일도 많이 생길 거고.”
“으음. 하긴 오염된 땅이면 사람들은 없긴 하겠네. 그래도 애들한테 환경 안 좋으면 어떡해?”
“그곳이 비록 재난과 드래곤들 자폭으로 변형되고 몬스터들이 우글대는 땅이 되었지만, 이젠 많이 정화되었다. 드래곤들이라면 잘 살아남고 정화까지 하고도 남을 거다.”
“정화라……. 하긴 옛 드래곤들이 저지른 일을 후손들이 수습하는 것도 괜찮겠다.”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앙이 보니까 조기 인성교육…… 아니 조기 용성교육이 중요한 거 같아. 어릴 때부터 정화작업을 하면 ‘드래곤의 힘을 조심해서 써야 하는구나’ 책임감이 생길지도 모르고.”
“내가 그렇게 가르치겠다. 가끔 레아 네가 좀 보듬어 주면 좋을 거다.”
헬릭스의 말에 그녀가 동의하며 웃었다.
“그럼 마법의 탑은 북부에 세워야겠네?”
레아가 마탑주가 되고, 헬릭스가 드래곤들을 데리고 헬 산맥 너머에 자리를 잡으면 서로 맞닿아 있는 북부 헬 산맥쯤이 마탑 자리로 적절해 보였다.
“새로 알아볼 것도 없다.”
헬릭스가 말했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곳에 마법의 탑을 세우면 되지 않겠나.”
“아즈라의 레어?”
잠깐 놀랐던 그녀가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제 와서 돌려 달라고 할 거야 어쩔 거야. 비밀 마법공간이랑 감춰진 아티팩트들도 많고, 무엇보다 마법의 도서관이 제일 깊숙한 데 있으니까 딱이네.”
“그렇다. 그 위에 마법의 탑을 올리면 위장하기도, 결계를 만들기도 좋을 거다.”
레아는 신나서 손뼉을 쳤다.
“그러면 바로 밑에 피어트 별장도 있으니까, 거기에다가 마탑 관리소랑 방문자들을 위한 임시숙소를 운영하면 되겠네. 마탑 건물만 지으면 완성이겠는데?”
헬릭스가 미소 지으며 제안했다.
“이럴 게 아니라 바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지금 가 보겠나? 마법의 탑 밑그림도 그릴 겸 말이다.”
“응, 응. 갈래.”
❀ ❀ ❀
레아와 헬릭스는 오랜만에 북부의 별장으로 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신기해했다.
“나 여기 요양 올 때에는 ‘너무 추울 테니까 한겨울 되기 전에 돌아가야지’ 그랬었는데.”
“더 빨리 돌아갔다가 한겨울에 다시 들른 셈이군.”
“그러게.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건강해져서.”
다 네 덕분이라는 듯 레아가 헬릭스의 팔짱을 끼며 눈을 찡긋했다.
“내 상상대로라면 레아 너는 더 건강해져야 하는데 말이다.”
“……당분간은 사양할게요. 저 여태까지 너무 많이 고생해서 좀 쉬고 싶어요.”
진저리를 치는 그녀를 보고 그가 웃었다. 둘은 노닥거리면서 별장에서 헬 산맥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올랐다.
“이 길도 진짜 오랜만이다. 헬릭스가 만날 여기서 뛰라고 나 훈련시켰잖아.”
“내 인생에서 너만큼 못 뛰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나 그 정도였어?”
레아가 새삼 충격을 받을 때였다. 헬릭스가 그녀를 쿡쿡 찔렀다.
“레아, 저길 봐라.”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은색 잎을 가진 단풍나무가 여전히 잎을 늘어트린 채 우거져 있었다. 다른 눈꽃 덮인 침엽수들 사이에서 홀로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레아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 주위에 올망졸망 세워진 눈사람들을 보고 픽 웃었다. 마법학교 애들이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지금 보니까 진짜 대놓고 마법 비밀문이네.”
“다시 들어가 보겠나?”
헬릭스의 제안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은색 단풍나무를 통과해 아즈라의 레어에 들어섰다.
“…….”
헬릭스를 처음 만난 인공동굴도, 그 가운데 있는 봉인진도 그대로였다.
결계에 배터리로 쓰이는 마나석 기둥까지도 여전히 꽂혀 있었다. 레아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헬릭스. 우리 저거 부술까?”
그녀의 손가락이 봉인진을 가리켰다. 헬릭스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직도 내가 저기 들어갈까 봐 무섭나?”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생각해 보니까 이젠 저게 필요 없잖아.”
그녀가 말을 이었다.
“헬 산맥 너머 오염도 거의 가라앉았고, 해츨링들이 가면서 몬스터들도 얌전해졌다며. 결계가 더 이상은 필요할 거 같지 않은데…… 위험하기만 하고.”
헬릭스가 가만히 내려다보자 레아는 괜히 딴청을 부리다가 결국 실토했다.
“그리고 여기 위에 마탑 올릴 건데, 여기 살면서 내 남자 고생시켰던 물건을 자꾸 마주치기 싫단 말이야.”
툭 세게 말해 놓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헬릭스를 쳐다보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레아에게 물었다.
“……마주치면 어떤 생각이 드나?”
“어떤 생각이 들긴. 속상해. 얼마나 오랫동안 힘들었을까 싶어서 속상해 죽겠어.”
그녀가 헬릭스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며 손을 올려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보면 힘들고 나쁜 기억 떠올릴까 봐 걱정도 되고.”
“……레아 네가 이러면 나도 걱정이 든다.”
마르고 가라앉은 목소리. 그가 레아의 손을 제 뺨에서 떼어 손끝에 입을 맞췄다.
“나도 아르카이크처럼 되면 어쩌나.”
이를 세워 천천히 그녀의 손가락을 씹으며, 헬릭스가 낮게 말했다.
“레아 널 머리부터 발끝까지 삼켜 버리고 싶어지면 어쩌나.”
이상한 일이었다. 아르카이크가 저런 말을 했을 때는 치 떨리게 소름 돋고 무서웠는데. 헬릭스가 말하니 목이 말라 왔다.
“…….”
얼굴에 와 닿는 그의 시선이 간지럽고 오싹했다. 그녀가 헬릭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럼 맛만 보게 해 줄게.”
레아가 입술을 포개 왔다. 달콤한 아찔함에 헬릭스가 허리를 감으며 깊이 입을 맞췄다. 그녀가 그에게서 몸을 떼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대답 안 했는데.”
헬릭스는 잠깐 ‘뭐였지?’ 하는 눈빛이었다. 그가 봉인진을 발견하고는 레아를 다시 끌어당기며 한 손으로 마탄을 쏴 버렸다.
콰광!
한 방에 봉인진을 부숴 버리고 헬릭스가 다시 레아에게 집중했다. 그녀도 웃으면서 그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