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적의 공격이다!”
새벽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삐이이이, 쾅쾅쾅쾅쾅!
사방을 깨우는 경고음에 페이런의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들은 비몽사몽간에 눈을 의심했다.
동쪽으로부터 태양이 아니라 화염이 밀려오고 있었다.
붉은 해일 같은 화염은 성벽을 녹일 기세로 달려들며 페이런의 진지를 대낮처럼 밝혔다. 레아가 잠옷에 커다란 망토만을 걸친 차림으로 튀어 나갔다.
“파이어월! 윈드!”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강력한 화염과 바람마법이 일어났다. 불길의 벽이 해일 앞을 막아서고, 바람이 부추기듯 밀어냈다.
“오오! 마법사님!”
“화염과…… 바람의 마법사!”
그녀를 깔보고 등한시했던 귀족들이 경탄의 눈으로 쳐다봤지만 시원해할 겨를이 없었다. 불길이 밀리고 있었다.
‘더 강해졌어!’
아르카이크는 이제 인간인 척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놓고 퍼붓는 드래곤의 마법이 이쪽을 압살시키려는 듯 쇄도했다.
“레아!”
급히 달려온 헬릭스를 보고 레아가 화색을 띠며 물었다.
“카라이는?”
“준비해 두고 왔다. 내 손을 잡아라!”
헬릭스의 지원을 받은 레아의 불길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마치 화산폭발을 보는 듯한 강력함에 레아 본인도 놀랐다. 마나를 느끼는 이들은 모든 흐름이 그녀에게 몰린 이질감에 몸을 떨었다.
제국군의 선두에 선 아르카이크가 이를 악물고 헬릭스를 노려보았다.
‘수호자의 힘을 되찾은 건가……!’
레아의 불의 벽이 아르카이크의 화염해일을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승산이 있겠어!”
그 순간 아르카이크가 화염을 거둬들였다.
“우어어어!”
세뇌시킨 마법능력자 군단이 인간방패가 되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읏……!”
레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좀비들처럼 제 의지를 잃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소름 끼쳤다. 그렇지만 차마 화염마법으로 그들을 공격할 순 없었다.
몬스터와 달리 사람을 태우는 건 거부감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들은 훈련된 군대와 달리 국경 근처 마을들에서 비약을 먹고 살아남아 차출된 일반인들이었다.
‘자기 의지라곤 하나도 없이 이용당하는 사람들인데……!’
그녀가 애써 바람으로 그들을 밀어내려고만 할 때였다.
파밧!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뱀 기사단원이 휙 튀어나와 레아를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
“레아!”
헬릭스의 몸이 저도 모르게 레아 앞으로 나섰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뱀 기사단원은 갑옷만 남기고 가루로 변했다.
“어……?”
“……마나 흡수를 과하게 한 모양이다.”
헬릭스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소름이 돋으면서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헬릭스, 저 좀비…… 아니, 저 세뇌된 사람들한테서 마나 좀 빼앗아 줘! 기운 없어서 주저앉게!”
그의 눈에 감탄하는 기색이 어렸다.
“내게 맡겨라!”
그러잖아도 쓰러져 앓다 그대로 차출된 일반인들이었다. 몸 상태와 영양 상태가 이미 매우 나빴던 그들은 헬릭스의 마나 흡수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인간방패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국 기사들이 돌격해 왔다.
“어차피 이놈들은 시간끌기용 얕은 수였을 뿐! 우리가 왜 제국이라 불리는지 알려 주겠다!”
그사이, 페이런 쪽에서도 레아와 헬릭스가 시간을 벌어 줘서 진영을 갖추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페이런의 방패병과 창병들이 침착하게 돌격에 대비했다.
“가호를!”
헬릭스가 페이런의 병사들에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사기가 솟아오른 그들은 온몸으로 기사들의 돌격을 막아 냈다.
“커흑!”
그렇지만 제국 기사들 사이사이, 누군가 불길이 치솟는 무기를 휘둘렀다. 누군가 마법이 깃든 채찍을 휘두르며 변칙적으로 움직였다. 기사들 사이에 섞여 있던 뱀 기사단원이 전열을 흩트리고 있는 것이었다.
놈들의 교란에 페이런의 방어막이 뚫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이렇게……!”
그때였다.
“크허어어억!”
제국군의 후방에서 시퍼런 검기가 나타나 휩쓸었다. 피어트 기사단과 루얀이었다. 소드마스터와 그의 기사들은 미친 맹수들처럼 제국군을 휘젓고 찢었다.
레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카라이!”
번쩍!
황금빛 찬란한 마법 방어막이 페이런의 방어막 앞에 펼쳐졌다.
“크악! 으어억!”
제국군이 방어막과 루얀의 검기 사이에 끼면서 전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앞쪽에선 페이런의 군대가, 뒤쪽에선 피어트 기사단과 루얀이 착실하게 제국군을 도륙했다. 전장을 혼란에 빠트리던 뱀 기사단원들도 루얀의 검기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이 하찮은 놈들이……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아르카이크가 분노했다.
황금안이 형형하게 뜨였다. 드래곤의 지배력이 최대한으로 방출되며 전장의 생물들을 찍어 눌렀다.
“……어윽!”
전장에서 싸우던 이들이 폭풍에 눕는 풀잎들처럼 괴로워하며 쓰러졌다. 소드마스터인 루얀조차 대검을 바닥에 꽂고 간신히 서서 버텼다.
황금빛 방어막이 빛을 잃었다. 레아만이 헬릭스에게 안겨 서 있는 전장에서, 아르카이크가 두 사람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
팽팽한 대치 속에서 아르카이크의 모습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것이었던 육체에 비늘이 돋아났다. 발톱이 솟아나며, 머리는 순식간에 길게 자라 솟구쳤다.
인간과 드래곤이 섞인 모습으로 변한 아르카이크가 헬릭스의 품에 안긴 레아를 노려보았다.
점점 붉어지는 시야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홀로 제 색을 가지고 빛나고 있었다.
‘그자가 아니라…… 나를 선택했다면, 네가 나를 구원했다면, 너만 나를 선택했다면……!’
어둡고 격렬한 마나가 공기를 울리는 가운데 그가 레아를 향해 팔을 뻗었다.
드래곤 최후의 소원과 집착이 응축된 강력한 힘이었다. 파랗게 질린 레아를, 헬릭스가 온 마음을 다해 껴안았다.
지켜야 했다.
놈의 마나에서, 집착에서, 위협에서! 그녀를 지켜 낼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았다.
품에 갇힌 레아가 그의 옷자락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혼자 죽으면 안 돼! 죽으려면 같이 죽어!”
헬릭스는 긴박한 와중에도 픽 웃고 말았다. 긴장이 잠시 풀리는 짧은 순간, 그는 제 몸의 이변을 느꼈다.
악착같이 자신을 가두고 있던 봉인의 마지막 한 겹이 벗겨졌다. 돌을 매단 구속복에서 벗어난 듯한 해방감이 척추를 관통하며…… 익숙한 힘이 전신을 채웠다.
“……죽는 건 우리가 아니다, 레아.”
그가 그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르카이크, 인간의 이름을 대신 취한 화염의 드래곤이여.”
헬릭스의 음성이 마나를 담고 전장을 울렸다.
“네게서 마나의 권한을 박탈한다.”
몇백 년 만에 이루어진 수호자의 판결에 마나가 술렁였다.
스스스스…….
평원을 뒤덮었던 어두운 마나가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르카이크가 제게서 빠져나가는 힘을 느끼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그 순간 하늘에서 화답하듯 소리가 울렸다.
“크와왕!”
상공에 드래곤 해츨링들이 무더기로 나타나 크와앙 울부짖었다.
“쿠, 쿠앙아?”
쿠앙이가 동생들을 죄다 이끌고 나타난 것이었다. 파닥거리는 해츨링 무리들은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로 깜찍했다. 그렇지만 드래곤의 마나에 영향을 받는 자들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다.
“쿨럭!”
인간방패로 쓰였던 일반인 마법능력자들이 기절하고, 뱀 기사단도 패닉에 빠졌다. 제국의 마법능력자들은 모두 황태자의 지배력에 복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정신을 지배하던 통신이 사라지고 여러 채널이 연결된 것이나 다름없는 혼란이었던 것이다.
‘아르카이크 황태자의 지배력이 완전히 깨졌구나!’
레아는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드래곤로드의 위엄을 보여 줄 때였다. 그녀가 하늘을 메운 드래곤 해츨링들에게 외쳤다.
“나를 따르라!”
“쿠왕왕!”
레아의 판단은 옳았다.
황태자의 지배력이 완전히 깨지고 전장 사람들이 허덕이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레아가 헬릭스를 쳐다봤다.
“…….”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헬릭스가 그녀에게 팔을 벌리자 레아는 그를 꽉 껴안았다. 마나가 온몸으로 쏟아지며 넘치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헬릭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마무리는 네가 하는 거다, 레아. 차기 마법의 수장으로서, 드래곤로드로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아르카이크를 똑바로 노려보며 지팡이를 내밀었다. 놈에게 마나로 찍어 눌릴 때마다 꼭 해 보고 싶었던 마법이 있었다.
“헬파이어!”
지옥에서 솟은 듯한 새파란 불길이 아르카이크를 삼켰다.
❀ ❀ ❀
“…….”
황태자는 레아의 불꽃에 타오르면서 해츨링들과 그녀를 쳐다보았다. 목숨이 다하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이제껏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아집의 꺼풀이 벗겨졌다.
저들이 맞았다.
고강하고 정의로운 드래곤.
인간에게 이용당해 멸망한 드래곤.
아르카이크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드래곤 해츨링들은 레아를 따르며 행복해 보였다.
드래곤의 멸망이 인간 때문이었건 아니건, 이젠 멀고 먼 과거의 일이었다. 자신과 황실 사이의 은원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황실 지하실험장에 갇혀 있던, 그의 본체였던 드래곤의 육체도 마지막을 맞이했다. 드래곤의 육체에 갇혀 있던 황자의 영혼이 아르카이크 앞에 나타났다.
뜻밖에도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맹약자…… 이제 끝났다.”
둘이 이제 되었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맹세했던 것들은 이루어졌어.”
학대받던 소년과 실험체로 쓰이던 해츨링의 약속은 비틀린 형태로 이뤄졌다.
제국이 끝나길 바랐으나 사실 황실을 죽도록 증오하던 소년. 그 소년이 미워하던 제국의 황실은 사라졌다.
인간이 멸종하길 바랐으나 사실 홀로 남은 드래곤으로서 외로웠던 해츨링. 다른 알들은 그처럼 실험에 휩쓸리지 않고 좋은 인간 성녀를 만나 행복해졌다.
어쩌면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드래곤들은 부활했고 제국의 황실은 끝났으니까.
‘마지막 미련이 있다면…….’
황태자가 흐릿해지는 눈을 깜박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레아를 시야에 담았다.
‘너를 얻었어야 했는데. 네가 옆에 있었다면 나도 미래를 꿈꿀 수 있었…….’
생각이 끊어지며, 드래곤과 황자의 영혼은 산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