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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07)화 (107/120)

107화

이들을 지휘해야 하는 패트릭 왕자는 귀족들의 여론에 골치 아픈 기색이었다.

“피어트 공녀, 나야 공녀의 활약을 지켜봐 왔으니 믿지만 솔직히 귀족들은 그렇지 않소. 이대로 마법사들만 믿고 제국과 대치해도 괜찮을지 다들 불안해하고 있지.”

“그럼 이대로 제국의 노예가 되자는 말인가요?”

“노예라니?”

“수사적인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정신까지 지배되는 노예 말이에요.”

레아는 얕게 한숨을 쉬며 강하게 말했다.

“제가 사기를 위해 공개적으로는 말 안 했지만…… 왕자님, 저 마법능력자들의 군대는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짧게 설명했다.

저 군대는 지금 만들어지는 군대라고. 아마도 근처의 제국민들에게 비약을 먹여서 강제로 마법능력자들을 만들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패트릭 왕자의 눈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국경지방의 제국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우리 페이런에도 일어날 뻔했습니다. 일전의 가짜 약 사건 이후 잠시 일어난 독약 사건들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그랬지. 트로우 백작가에서 가짜 약이 주춤하자 그런 수까지 썼었어.”

“그게 아르카이크 황태자의 드래곤 마나를 희석시켜 푼 비약을 사람들에게 먹인 것이었습니다. 그걸 먹은 이들은 황태자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수족이 되고요.”

“…….”

“저와 헬릭스가 재빨리 조치하지 않았다면 수도에 아르카이크 황태자의 세뇌에 빠진 마법능력자들이 돌아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패트릭 왕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레아가 말을 이었다.

“승산이 없어 보여서 불안해지시는 건 압니다. 그렇지만 왕자님, 이건 할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그렇군.”

패트릭 왕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갑자기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항복은 물 건너갔군그래.”

“예.”

자국민과 스스로가 정신까지 복속된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싸워야만 했다.

레아가 달래듯 말했다.

“드래곤로드 자리를 제가 차지했으니, 다른 드래곤이 아르카이크를 넘어서는 위압감만 한번 발휘해 줘도 상황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왕자가 웃었다.

“믿을 건 우리 마법사님뿐이로군.”

웃고 있지만 그녀의 말을 완전히 신용하진 않는 희미한 미소였다.

‘그렇겠지.’

레아도 제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드래곤로드 자리는 차지했는데, 다 자란 드래곤은 한 마리도 없고 말도 못 하는 해츨링들뿐이니까.’

게다가 자신의 마나 중 하나는 아르카이크의 마나였다.

‘승산이라…….’

그녀도 답답했다. 승산이란 게 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그렇지만 아르카이크에게 굴복해 노예가 되면 자신도 그렇고 다들 어떤 꼴이 날지 빤했다. 저 국경 끝에서 몰려오는 좀비 같은 마법능력자들이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내가 힘을 내야 해. 나한테는 수호자가 있잖아. 헬릭스의 무한 치트키…… 아니, 무한 마나라면 내 마법도 아르카이크 못지않아!’

레아가 멈칫했다.

‘……못지않겠지? 그래야 할 텐데?’

일단 카라이한테 여론 안심용으로 마법 방어막 금빛으로 크게 쳐 달라고 해야겠다. 헬릭스가 카라이 훈련시키러 갔으니까 그 정도는 되겠지.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헬릭스 보고 싶다.”

❀ ❀ ❀

어두운 밤, 레아는 답답한 마음에 막사를 나와 밖을 걸었다.

“쿠왕!”

성벽 아래를 걷고 있으려니 혼자 어딜 가냐는 듯이 쿠앙이가 날아와 따라붙었다. 그녀가 피시시 웃으며 쿠앙이를 꼭 껴안았다.

“쿠앙아, 힘들지?”

“쿠오앙.”

“안 힘들다고? 대단하네.”

레아가 중얼거렸다.

“난 힘든데.”

“쿠앙앙.”

쿠앙이가 속상하다는 듯 머리를 비빚거렸다. 레아는 쿠앙이를 들어 올려 볼을 비볐다.

“에효. 나도 이렇게 고생할 생각은 없었는데.”

“쿠옹.”

“그래도 미친 오켄 황태자가 너희 드래곤로드가 되는 건 막아야 하잖아. 안 그래?”

“쿠왕!”

“그치? 우리 쿠앙이가 왜 때문에 사람을 개뼉다구처럼 여기는 나쁜 드래곤이 되어야 하죠? 이렇게 귀엽고 착하고 사랑스러운데?”

쿠앙이가 길게 울었다.

“쿠와아앙!”

깊게 긍정한 쿠앙이가 자기만 믿으라는 듯 품에서 벗어나 날아가기 시작했다.

“쿠, 쿠앙아? 어디 가?”

레아는 파닥파닥 가는 쿠앙이를 뒤쫓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걸음으로 날아가는 쿠앙이를 잡기는 무리였다.

“헥, 아니, 헥, 어디 간 거야……?”

레아는 헉헉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낯선 막사 근처까지 오게 된 것 같았다.

“너무 차이 나는 전력이 아닙니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패트릭 왕자의 보좌관 목소리였다.

“페이런 민심이 흉흉합니다. 친제국파 귀족들도 상황이 이러니 숨죽이곤 있지만 불만이 아주 많고요.”

다른 귀족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게 다 피어트 공작가와 레아 피어트 탓입니다. 국경을 맡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이렇게 승산 없는 전쟁에 끌어들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맞습니다. 화염마법사라고 해서 든든한 전력일 줄 알았는데 원. 쇼만 잘하지 데리고 오는 마법사라고는 다들 어린애들뿐이고.”

“말이 좀 심하군.”

패트릭 왕자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그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왕자님께서 피어트에게 무르게 구셔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청혼을 거절하게 놔두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페이런이 망하게 생겼어요. 그때 청혼만 수락했어도 황태자가 페이런을 놔뒀을 겁니다.”

레아는 빡치지만 눌러 참았다. 지금 나서 봤자 얻을 게 없었다.

이를 꽉 악물고, 조용히 물러나기 위해 발을 뒤로 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몇 발짝만 더 가면 이 지긋지긋한 말들을 안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안 하던 뒷걸음질을 치던 그녀의 발이 드레스 자락을 밟고 말았다.

‘으아악!’

레아는 비명을 참으려고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

몸이 안 넘어갔다.

퐁.

단단하게 그녀를 잡은 손이 놀라지 말라는 듯 퐁퐁 마나를 불어넣었다.

‘헬릭스구나!’

❀ ❀ ❀

헬릭스는 레아를 안아 올린 뒤 아예 그 자리를 떴다.

그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단단한 품에 기대어 있자니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헬릭스가 그녀를 호젓한 공터로 데려갔다.

“여기 앉아라.”

그가 우람해 보이는 아름드리나무 낮은 가지에 레아를 올려 앉혔다.

“왜 여기로 왔어? 막사로 갈 줄 알았는데.”

“좀 시원해지라고 데려왔다.”

헬릭스 말대로 나뭇가지 위에서 보니 눈이 시원했다. 막사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과 멀리 어두운 국경마을들이 보였다.

“나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다.”

“아니, 진짜 나 괜찮아. 나 페이릴리였잖아? 평판 일일이 신경 쓰면 못 산다니까.”

헬릭스는 가볍게 말하며 웃는 그녀에게 속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경이 아예 안 쓰이는 건 아니잖나.”

그가 손을 내밀어 레아의 뺨을 쓸었다. 그 말에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새삼 울컥했다.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기기만 해 봐, 진짜.”

“레아, 전쟁이 끝나면 마법의 탑을 세우자. 그리고 페이런 왕국 대 마탑주로 협상을 하는 게 어떤가.”

“협상?”

“저런 말 했던 자들 자르지 않으면 동맹은 보류한다고 하는 거다.”

헬릭스답지 않은 뒤끝 있고 구체적인 복수계획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헬릭스 나 진짜 괜찮아졌는데……?”

“좀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안 괜찮다.”

달빛에 하얗게 비치는 그의 얼굴이 서늘했다.

“아무리 날 모르는 자들의 말이라고 해도, 그 수런거림에 마음이 긁히는 걸 내가 모르겠나.”

헬릭스 또한 수없이 당했던 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레아가 작게 욕했다.

“귀쟁이 엘프고, 떼쟁이 드래곤들이고 미친놈들이라니까. 우리 헬릭스 두고 깎아내릴 게 뭐가 있다고.”

헬릭스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 미친놈들이다.”

“그렇다니까.”

“미친놈들이 이렇게 많은 세상에서 레아 네가 좋은 말만 들을 순 없다는 걸 안다.”

“…….”

“그렇지만 나와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네 세상을 좋은 걸로 다 채우고 싶다. 네가 내게 했듯이.”

그녀의 목이 꽉 막혀 왔다. 한참 만에야 겨우 말이 새어 나왔다.

“나…… 그렇게까진 안 해 준 거 같은데.”

“넘치게 해 줬다.”

“그럼 칭찬해 줘.”

헬릭스가 진지하게 고심했다.

“어떤 좋은 말을 해 줘야 하나. 마나의 가호가…….”

“예쁘다.”

짧은 말에 헬릭스가 눈을 깜박였다. 레아가 헬릭스의 손을 잡고 올려다보며 재촉했다.

“응? 얼른.”

“예쁘다.”

“또 해 줘.”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레아가 배시시 웃었다.

행복감으로 차오른 눈매가 둥글게 휘고, 광대와 뺨이 부풀었다.

헬릭스는 너무 행복해도 가슴이 뻐근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레아의 뺨을 감쌌다.

“레아 너는 어떻게 이렇게 예쁜가.”

그녀가 그의 말에 화답하듯 손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뜨거운 손에 닿는 보송하고 말랑한 감촉에, 헬릭스는 긴장해서 레아의 뺨을 만졌다. 무심코 쥐었다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너로 인해 배우는 감정이 얼마나 많은지.”

누군가를 잃을까 봐 이렇게 두려워한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좋아?”

레아의 질문에 헬릭스가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좋은 적이 없었다.”

“그럼 또 칭찬.”

그녀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나뭇가지에 앉은 채 다리를 바동거렸다. 파란 눈에 장난기와 애정이 함께 엉켜 반짝였다.

“뽀뽀. 얼른.”

레아는 입술을 내밀며 재촉했다. 헬릭스가 숨을 멈춘 채 그녀를 응시했다. 도톰한 분홍색 입술이 확 시야를 채워 아찔했다.

재촉하듯 작게 웃는 소리에 헬릭스는 참지 못하고 그 입술을 삼켰다. 까륵 새던 웃음이 곧 가쁜 숨으로 바뀌고, 다시 신음으로 바뀔 때까지 헬릭스는 계속 레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넌 실패한 수호자다, 헬릭스.’

두려웠다.

자신이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

그때 지키지 못했던 이들처럼 레아 또한 지키지 못한다면…….

그가 큰 손으로 레아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온이 제 품에 갇혔는데도 모자랐다. 불안하고, 모자라고, 또 모자라서…….

“……헬릭스.”

가쁜 숨을 달싹이며, 레아가 그의 뺨에 제 얼굴을 비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디 가지 마. 나랑 같이 있어.”

“……물론이다.”

헬릭스가 그녀의 눈꺼풀에, 눈썹에, 코끝과 귓불에 입을 맞췄다. 자잘한 키스에 바르르 떠는 몸짓까지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터질 듯했다.

처음으로 깨달은 감정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무뎌지기만 했던 그의 삶에 밝혀진 촛불이고, 바람이고, 햇살이었다. 그는 간절히 바랐다.

이 여자와 함께 있고 싶다고. 그러니 이 여자가 있는 세상을 지키고 싶다고.

레아가 옆에서 숨을 쉬고, 그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더 생생하고 아름다워지는 세상을…….

그를 둘러쌌던 수호자의 단단한 껍질이 녹아내렸다. 오래도록 같은 법칙으로만 움직였던 헬릭스의 세상은 레아의 불길에 휩싸여 전혀 다른 것이 되고 있었다.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

그는 레아에게 입을 맞추며 깨달았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반할 수밖에 없는 여자에게 반하고, 제 세상이 무너지는 이 일들이 기꺼워서 그는 굴복했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항복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헬릭스?”

갑자기 밀려드는 힘에 그가 비틀거렸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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