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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06)화 (106/120)
  • 106화

    오켄이 페이런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선봉은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였다. 그는 이 전쟁의 명분을 주장했다.

    ‘오켄 제국의 보물인 드래곤의 피를 페이런에서 멋대로 가져가 유출시켰으니, 이는 제국에 대한 모욕이며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제국의 지엄함을 보이고, 버릇없는 속국을 응징하겠다는 것이었다.

    페이런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드래곤의 피를 유출시킨 범인으로 지목된 트로우 백작가가 뒤집어졌다.

    “황태자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트로우 백작이 절규했다. 트로우 경은 그 옆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구나.

    “아버지, 황태자가 우릴 쓰고 버릴 패로 생각하는 걸 모르셨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쩌잔 말이냐?”

    “어쩌긴요. 도망쳐야죠!”

    트로우 백작과 트로우 경은 급하게 도주했다.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던 가신들과 첩자들도 뿔뿔이 달아났다.

    왕실의 명령을 받은 루얀 피어트가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그들을 추적했다. 그가 기사들을 독려했다.

    “놈들을 잡아라! 생포하지 않아도 좋다! 잡아 온 자에겐 특별포상을 내리겠다!”

    트로우 백작과 트로우 경은 끈질기게 도망쳤다. 간계와 협잡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이들답게 아득바득 동쪽으로 향했다. 동부 산맥이 나오든, 동남쪽 항구가 나오든, 걸리는 대로 국경을 넘어 도망칠 요량이었다.

    그렇지만 동부 국경에는 피어트 공작가의 영지가 있었다.

    이미 레아가 청혼을 거절할 때부터 전쟁 준비를 하며 바짝 군기가 선 피어트 가문의 기사들이 동부 국경을 지켰다.

    도망치다 보니 산 쪽으로 왔던 트로우 백작과 트로우 경에겐 외통수였다.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그들을 이번엔 루얀의 추적대가 몰아세웠다.

    “트로우 백작의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백작은 비쩍 마른 몰골로 칼을 맞은 채 발견되었다. 한때 페이런 사교계를 쥐락펴락하던 인물답지 않은 초라한 최후였다.

    며칠 후, 혼자 도주하던 트로우 경도 잡혔다.

    그는 칼을 맞은 백작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고 진술했다. 그렇지만 기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도중에 트로우 경이 백작을 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으음.”

    별반 놀랍지 않은 소식에 루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로우 백작이 장남을 천대하고 무시한다는 이야기는 비밀도 아니었다.

    “트로우 백작의 시체를 왕성으로 가져가라. 아마도 본보기로 매달라고 하시겠지만, 따로 명령이 있을지도 모르니.”

    “예. 트로우 경은 어찌할까요?”

    “그자도 왕성으로 끌고 가야지.”

    아마도 지하감옥에서의 짧은 나날들과 특별처형이 그를 기다릴 터였다. 루얀이 말고삐를 돌렸다.

    “우리는 국경으로 가자.”

    “예, 단장님. 저 근데…….”

    “뭐냐?”

    기사가 주저하며 말했다.

    “총공세를 펼친다더니, 황태자하고 그 군대는 국경에 보이질 않는데요…….”

    “…….”

    “놈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 ❀ ❀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제국 황성에 있었다.

    뱀 기사단원들과 그는 한 몸처럼 황성을 쓸고 다니며 황족들의 목을 베었다. 제일 먼저 죽인 황제의 피는 이미 식은 지 한참이었다.

    페이런에 대한 선전포고는 눈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페이런으로 출전하는 척하던 황태자는 방향을 돌려 황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반역의 칼을 휘둘렀다.

    “아르카이크……!”

    끝까지 그를 붙들고 늘어지던 이황녀 아르지나가 잇새로 그의 이름을 뱉었다.

    “네놈이 이럴 줄 알아야 했는데…… 아바마마만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어도!”

    “…….”

    “그놈의 드래곤이 뭐라고! 나도 드래곤과 계약했다면, 이렇게 당하지는……!”

    아르카이크가 피투성이가 된 이황녀의 턱을 쥐었다.

    “너는 큰 착각을 하고 있다.”

    그가 느리게 말했다.

    “드래곤과 계약을 한다 해도 인간은 인간일 뿐이지.”

    검은 눈동자가 완전한 황금빛으로 변했다. 맹수의 동공이었다. 이황녀가 숨을 들이켰다.

    “너는…… 아르카이크가 아니군!”

    황태자의 손에서 길게 손톱이 솟아 나왔다. 턱을 쥐었던 손이 빠르게 목을 찔렀다.

    “드래곤, 드래곤이었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황녀의 몸이 허물어졌다.

    황성에선 피의 숙청으로 황제와 황족들이 모두 제거되었다. 남은 황족이라곤 아르카이크 오켄뿐이었다.

    적절한 계승권자가 다 사라진 상황에서 황위에 오를 이는 그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아르카이크는 황제의 관을 받을 수 없었다. 대신관이 그의 황위 계승을 승인하지 않고 자결한 것이었다.

    “그 노친네가 끝까지…….”

    국교를 이끄는 대신관의 자결은 아르카이크의 황위 계승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악마요! 그는 제국과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거외다!’

    이황녀와 황후와 그 지지자인 귀족들을 믿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놈이 뭐라 하며 죽었다더냐?”

    “……시중들던 다른 신관의 말로는, ‘신께선 미래만 보여 주시고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나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리라’ 하고는 자결했다고 합니다.”

    “…….”

    보좌관이 눈치를 보았다.

    “어쩌시겠습니까? 새 대신관을 세우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정화의식 때문에 그렇다는데요…….”

    아르카이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됐다. 즉위식은 미루지.”

    “정말이십니까? 제국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어서 천명하셔야 할 텐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홀로 남은 황태자의 지위로도 제국을 멸망시키는 건 충분했다.

    ❀ ❀ ❀

    소리 없이, 조용히.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켄 제국은 페이런과 맞닿은 국경지방의 마을들을 돌며 우물에 비약을 탔다. 영문도 모른채 수많은 주민들이 쓰러졌다.

    간혹 살아나는 이들은 이미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절대명령을 따라, 그들은 무덤으로 변한 고향마을을 등졌다. 황태자의 군대는 그렇게 합류한 마법능력자들로 점차 불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게 하더니, 이제 뭔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리케일의 말에 기사들을 이끌고 함께 출전한 패트릭 왕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군대가 아닌 것처럼 보여서 걱정일세.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드래곤의 계약자라고 하던데…….”

    레아와 헬릭스도 그 옆에서 긴장한 채 국경 근처를 바라보았다.

    산맥이 끝나고 평원이 펼쳐지는 저 땅이 오켄 제국의 땅이었다. 저 끝에서 몰려오는 마나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아르카이크가 일을 벌인 것 같다.”

    헬릭스의 말에 망루에 서 있던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패트릭 왕자가 속삭이듯 물었다.

    “뭔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겠나?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국경지방에 마법능력자의 군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왕자의 사기가 팍 꺾인 게 느껴졌다. 레아가 얼른 나섰다.

    “왕자님,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한테도 마법사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거뒀던 마법사들이 불려 왔다. 그런데 그 선두에 선 사람을 보고 레아의 눈이 커졌다.

    “필?”

    “공녀님!”

    이제 좀 아이 티를 벗고 소년티가 나기 시작한 필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녀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여길 왜 와?”

    “제가 마법사들 중에 제일 세요!”

    레아의 눈앞에서 노예상과 수염이 억지로 비약을 먹였던 필. 소년은 어느새 어엿한 마법사가 되어 자기도 공녀님처럼 화염마법사라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이래도 되나?’

    물론 지난 수도의 비약 사태에서 마법능력이 생긴 이들은 아직 초보 중에 상초보였다. 그들보다는 이전부터 마법학교에서 수행했던 아이들이 더 강하긴 할 터였다.

    ‘그래도 애들인데! 전쟁인데!’

    레아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마법사들을 보고 군대의 귀족들도 여론이 흉흉해졌다.

    “죄다 어린애들과 여자들뿐 아닙니까?”

    레아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비겁한 트로우 놈들이 여자와 애들한테 주로 비약을 먹인 게 제 탓입니까? 놈들이 그래서 마법사들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데.”

    “그래도 전력이 되어야지요!”

    귀족들이 흥분해서 외쳤다.

    “여자와 어린애들이 전쟁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피를 보면 기절이나 할 텐데!”

    “제가 화염마법사로, 몬스터 사냥 경험이 있다는 말은 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이익……! 몬스터 사냥과 전쟁은 또 다른 얘기입니다!”

    한바탕 설전이 이어졌다. 생선장사 출신 마법사가 그 말을 전해 듣고 투덜댔다.

    “피를 보면 기절하는 건 귀족 나리들이겠지! 우리 여자들은 원래 한 달에 한 번씩 피 보느라 피에 아아주 익숙하거든? 안 그래?”

    “그럼!

    나이 든 여자 마법사들이 걸걸하게 호응했다.

    레아는 다른 마법사들이 기죽지 않도록 분위기를 주도하는 그녀들이 고마웠다. 그렇지만 지킬 건 지켜야 했다.

    “그러게 말이야. 귀족 나리들한테 그 말 그대로 전할 수 없어서 유감이네.”

    “하하하! 공녀님도 참.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그래도 애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자네들이 쟤들은 적당히 뒤로 빼 주게.”

    “그럼요. 애들은 일단 건강하게 크고 봐야지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마법사는 수명도 길다고 했는데. 지금 전쟁통에 트라우마 생기면 앞으로 백여 년은 고생할 텐데, 귀한 마법사를 그렇게 만들어야 쓰겠어?”

    마법사들은 레아를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뭉쳤다. 어쨌거나 그들을 살리고 마법의 길을 열어 준 건 최초의 화염마법사 레아 피어트 공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귀족들의 군대는 또 달랐다.

    “믿을 만한 남자 마법사라도 하나 있었다면…….”

    “말씀을 삼가시지. 내 동생이지만 화염마법과 바람마법 양쪽에서 일가를 이룬 인재니까.”

    “피어트 경, 공녀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건 알겠소. 그렇지만 저쪽에서는 드래곤의 계약자에 마법능력자들의 군대가 밀려오고 있단 말이오! 그런데 이쪽은 제대로 된 마법사는 하나에, 저런 오합지졸뿐이라니!”

    “저들이 정말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제국에 항복 서신을 보내는 게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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