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헬릭스는 설명했다.
레아의 경우에는 몸이 너무 약해 특별히 그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 치료했고, 때문에 그녀는 마법을 다루기 적합한 육체가 되었다.
카라이의 경우에는 먼 선조 중에 드래곤이 있어, 피에 용혈이 섞여 있었기에 살아나 마법능력자가 되었고.
마법학교의 아이들은 그런 카라이의 피를 받으면서 치료받아서 생명도 구하고 마법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 비약 사태 때는 워낙 대량으로 치유한 것이라, 살아남기만 해도 큰 성공인 셈이었다. 그런데 마법능력이 발현되다니…….”
헬릭스는 추측했다.
“내 생각으론 놈이 비약에 들어간 드래곤 마나 비율을 낮춘 것 같다. 그러면 죽을 확률은 낮아지고, 마법능력자가 되어도 능력이 약하게 발현되겠지. 이렇게 대량 치유를 해도 마법능력자가 높은 확률로 생길 것이고.”
레아가 머리를 짚었다.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약한 권속을 타국에 잔뜩 만들려는 의도야 빤했다.
“그러니까 아르카이크 그놈이 페이런에 대량으로 첩자를 만들려고 했다는 거네?”
“그렇다.”
헬릭스와 레아의 말에 리케일도 중얼거렸다.
“가능한 이야기군. 그들이 죽으면 페이런에 소란이 일어나니 좋고, 살면 사는 대로 첩자들이 페이런에 생기는 셈이니…….”
“하층민들에게 뿌린 것도, 애초에 불만 많은 자들을 첩자로 삼으려고 노린 걸 겁니다.”
“당장 마법능력자들을 모아서 감시해야겠다.”
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큰오빠. 이건 그렇게 해결될 일이 아닌 거 같아.”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번 성공했으니, 수틀리면 다음번엔 빈민가 우물에라도 풀어 버릴 수 있잖아.”
순간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마스터는 속으로 당혹했다.
‘암흑길드에서 오래 구른 우리 애들도 바로 저렇게 생각 못 하는데…….’
전생 헬조선의 위력이었다. 레아가 말을 이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을 죽게 놔두거나 살아난 마법능력자를 가둘 순 없잖아?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해.”
“뭘 어떻게 말이냐?”
“그건 내가 알 것 같다.”
헬릭스가 말했다.
“더 강한 드래곤이나 대마법사가 강한 마나로 압박하면, 아르카이크의 ‘권속’이 풀릴 거다.”
❀ ❀ ❀
오빠들과 마스터가 돌아가고, 헬릭스는 마나를 넣어 주겠다며 남아 그녀를 살폈다. 쿠앙이도 나와서 레아의 무릎에 앉아 애교를 부렸다.
‘드래곤 마나 위협만 없으면 이 행복을 만끽할 텐데.’
레아는 속으로 폭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어디 플래카드라도 내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보다 더 센 드래곤이나 대마법사 찾습니다.
“우리 드래곤들은 쿠앙이가 제일 나이 많고 센데…….”
“쿠왕!”
쿠앙이가 제가 가장 강하다며 의기양양하게 울었다. 과연 만 한 살도 안 된 드래곤다운 위풍당당함이었다.
레아가 저도 모르게 쿠앙이를 달랑 들어 올리고는 말랑말랑한 볼을 눌렀다.
“……얘가 압박해 봤자 깜찍하기만 할 거 같은데?”
“쿠앙앙.”
쿠앙이가 항의했다.
다른 녀석들은 알에서 깨어나지도 못하는데 나는 먼저 깨어나서 날아다니기까지 한다! 쿠와앙, 위협적으로 울 줄도 안다!
“그래, 그래. 우리 쿠앙이가 제일 강하고 똑똑한 드래곤이고말고.”
“쿠오왕.”
만족스러워하며 날개를 파닥거리는 쿠앙이를 보며 헬릭스가 말했다.
“이렇게 어린 드래곤에게 사람들을 맡기느니, 레아 네가 하는 게 어떤가?”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드래곤이 아닌데? 마법도 아직 아르카이크보다 약하고.”
“드래곤의 성녀니까 조건이 될 것 같은데…….”
헬릭스가 중얼거렸다.
레아는 그의 입에서 드래곤의 성녀 얘기가 나오자 괜히 긴장해서 눈을 굴렸다.
“레아.”
“으, 으응?”
“아예 이참에 드래곤로드가 되어 버리는 건 어떤가?”
레아가 쿠앙이를 떨어트렸다.
쓰다듬는 손길에 노글노글해지고 있던 쿠앙이가 급히 날아올랐다.
“쿠왕! 쿠와오앙!”
그렇지만 쿠앙이의 위협적인 외침도 레아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네? 뭐요?”
“왜 갑자기 존댓말을 쓰고 그러나. 드래곤로드 말이다.”
“아, 아니…… 저는 드래곤도 아니고…… 저는 대마법사인 걸로 충분합니다!”
답지 않게 어색한 존댓말을 쓰며 뻣뻣해진 모습을 보니 헬릭스가 오히려 마음이 안 좋았다.
“너무 마음 쓸 거 없다. 네가 드래곤의 성녀가 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잖나.”
“아니, 그건 그렇지만…….”
우물쭈물하는 레아에게 헬릭스가 말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드래곤의 성녀나 드래곤로드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너무도 평온한 표정이라, 레아는 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드래곤들이 널 배신했다며…….”
“인간도 날 배신한 적은 많다.”
인간은 배신하고 뒤통수쳐서 수백 년 동안 결계 마나 배터리로 써먹지는 않았을 텐데……? 레아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헬릭스가 그 기색을 읽었는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내 힘을 독점하려고 나를 얼음마법굴에 가뒀던 대마법사 얘기는 했던가?”
“아니, 그런 돈 놈이?”
“내게 반했다며 제 왕국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한 번만 자 달라던 왕도 있었다.”
“미친놈 아니야?!”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씩씩대는 레아를 보고 그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냉큼 헬릭스를 껴안았다.
“이제 그런 미친놈들 나타나면 다 일러. 내가 아주 그냥 최강 화염마법으로 뼛가루도 안 남게 만들어 줄 거야.”
“든든하군.”
으스스한 말이었지만 그의 귀에는 사랑스럽게만 들렸다. 헬릭스가 제 품에 쏙 들어온 레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레아 네가 드래곤의 성녀인 걸 받아들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이나 인간이나, 종족이 문제가 아니라 나쁜 마음을 먹은 놈들이 문제라고.”
“…….”
“아즈라와 그를 따르던 드래곤들이 내게 못 할 짓을 한 건 맞지만, 쿠앙이와 알들에겐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가 정말로 증오하고 수호자의 힘으로 처단해야 할 건…… 드래곤 종족 자체가 아니라 아르카이크 같은 타락한 드래곤이겠지.”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껴안은 팔을 풀고 그를 쳐다보았다. 헬릭스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 레아, 차라리 네가 드래곤로드가 되어서 드래곤 알을 다 깨우는 게 어떤가.”
“쿠앙! 쿠아앙!”
쿠앙이가 대찬성이라는 듯 둘 위를 빙글빙글 돌며 날았다.
내가 아예 내친김에 드래곤로드까지 되어 버린다고?
레아가 침을 꼴딱 삼켰다.
“지, 진짜 그래도 될까?”
“물론이다. 드래곤 알들도 그걸 바랄 거다.”
“쿠와앙!”
❀ ❀ ❀
레아는 헬릭스와 함께 알들에게 갔다. 쿠앙이도 함께였다.
“……여기에 드래곤 알들이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하겠나.”
“혹시 아르카이크가 쳐들어올까 봐 피어트 공작저 안에는 만들 수 없었단 말이야.”
드래곤 알들의 둥지는 옛 세이건 공작저의 지하실에 있었다.
유리아가 납치당하고 돌아온 뒤 무서워하며 새 공작저로 이사한 뒤, 새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는 큰 저택이었다.
그녀는 유리아에게 부탁해 이곳을 몰래 빌려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둥지는 관리해서 깨끗해.”
“지하인 데도 공기가 좋은 것 같다.”
“쿠왕.”
쿠앙이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레아는 심호흡하고 앞을 바라봤다.
사막에서 가져온 모래 위에 놓인 드래곤 알들이 올망졸망 그녀를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드래곤 아가들아, 이제 그만 일어나자.”
“쿠앙.”
동의한 쿠앙이가 울었다.
“쿠와오아옹. 쿠왕왕.”
일어나서 얼른 성녀 레아한테 한 표 줘라. 성녀, 우리 예뻐해 주고 지켜 준다.
“쿠왕? 쿠와앙?”
쿠앙이가 멈칫했다. 레아와 헬릭스도 알아들었다.
어떤 알이 인간인 레아보다 성룡인 아르카이크를 지지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질문한 모양이었다. 헬릭스가 저도 모르게 위협적인 마나를 뿜었다.
“……못된 드래곤이 되면 수호자인 내가 나서겠다.”
“……쿠오옹.”
봤냐. 은색 인간 무서운 인간이다. 마나 다 말려 버린댄다.
알들 중 하나가 어쩐지 오들오들 떠는 것 같았다. 그 알에서 해츨링이 뿌지직 껍질을 깨고 나왔다.
“삐이삐.”
“쿠앙.”
레아를 지지한다는 파란 해츨링에게 쿠앙이가 다가가서 근엄하게 앞발로 투덕였다. 잘 생각했다, 아우야.
뿌직. 뿌지직.
다른 알들도 움직이며 해츨링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사실 자기는 사막에 있을 때부터 레아의 따뜻한 마나가 맘에 들었다, 난 레아가 아즈라의 지팡이 들었을 때부터 우리 대장인 거 알아봤다, 우리 챙겨 주고 마나 안 모자란지 들여다봐 준 게 고마웠다.
해츨링들은 제각기 삐삐거리며 레아를 지지했다.
순식간에 커다란 병아리들의 대장이 되어 버린 기분에 레아는 얼굴을 감쌌다. 생각보다 귀여운 이 녀석들을 잘 끌어 주고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그녀의 감정을 느낀 해츨링들이 헤헤거리며 레아를 둘러싸고 삐삐 울었다.
헬릭스도 미소 지었다.
“드래곤로드가 된 것을 축하한다, 레아.”
“……수호자님한테 축하받으니까 진짜 실감이 나네요?”
❀ ❀ ❀
그 시각.
오켄의 황성에서는 아르카이크가 제 본체 옆에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실험에 시달리고 얼마 전 큰 상처를 입은 드래곤. 그 육체는 이제 막 성룡이 된 몸답지 않게 너덜너덜했다.
“푸우우.”
지치고 지친 원래 아르카이크 황자의 영혼이 애써 마지막을 유예하려고 버티고 있는 것이 숨결마다 느껴졌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아르카이크는 다른 드래곤들이 멀리서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성녀를 드래곤로드로 인정했다는 것도.
“……인간이 드래곤의 로드라니.”
웃기는 일이었다. 아르카이크가 실소를 뱉었다.
자신의 명령을 받은 뱀 기사단원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알들이었다. 결국은 못 찾아내고 저쪽이 먼저 깨우고 말았다.
‘내가 직접 나섰다면 먼저 찾아낼 수 있었을까.’
이 시기에 오켄을 비울 수 없어 부하들에게 맡겼지만, 사실 가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본체가 또 공격당할까 봐, 욕심내서 레아 피어트를 데려오려 하다가 헬릭스와 대치할까 봐. 그리고 그가 알들을 데려오면 결국 그들도 황실의 실험체가 되어 버릴까 봐.
“…….”
아르카이크가 피로한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잠에서 깨어난 드래곤, 원래의 황자가 그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에겐 이제 나와 한 맹약뿐이지.”
“…….”
“약속을 지켜라.”
“……그래.”
황태자가 차갑게 웃었다.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