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헤쳐 나올 수 있었으면서 여자들 숲에 한참 있더니, 왕자와 춤출 타이밍에 달려오는 건 또 뭐람.
기분이 나빴지만 레아는 춤에 집중했다. 어쨌든 저를 위해 마련된 행사에서 추태를 보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꾸아악.
‘앗, 밟았다.’
밟고 싶은 마음이 쪼끔 있긴 했지만, 진짜 밟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당황해서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제법 아플 텐데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무덤덤한 얼굴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봐라, 레아.”
헬릭스가 레아의 허리를 잡고 속삭였다
“나와 춤추는 게 낫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남자들은 발등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평소 같으면 웃을 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화가 났다. 그녀는 드레스 밑으로 그의 정강이를 찼다.
“……윽.”
대차게 차였는데 헬릭스는 신음을 삼키며 레아를 리드했다. 그 태연한 얼굴에 더 화가 끓어서, 레아는 춤이 끝나자마자 테라스로 나가 버렸다.
챠악!
막 테라스에 커튼을 치는데 헬릭스가 비집고 들어섰다.
“레아.”
급히 쫓아온 듯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부르지 마, 나쁜 놈아.”
헬릭스는 흠칫했다.
레아의 목소리가 젖어 가고 있었다. 그가 당황해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
“……왜 우나?”
“안 울거든?”
속상해서 울망울망하는 얼굴로 레아가 도리질했다. 헬릭스는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왜 그러나?”
“왜 나한테 만날 딴 남자랑 춤추면 발 밟을 거라고 그래?”
말문이 막혔다. 헬릭스는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마음과 미안함을 담아 레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힘껏 도리질 쳤다.
“그냥 나랑 춤추고 싶다고 하면 안 돼?”
“……뭐?”
레아의 푸른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부풀었다. 말을 못 잇는 헬릭스를 보자 더 화가 났다.
‘네 성격에, 나한테 함부로 한 남자들을 몰래 응징할 정도로 날 좋아하면서.’
그러면서 끌려오는 척하고, 싫은 척하고, 좋아하지 않는 척하고.
“내가 다른 남자랑 춤추는 게 싫다고, 너랑만 추면 좋겠다고 말하면 안 돼? 왜 만날 나만 솔직해야 되는데?”
하얀 뺨에 또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에 헬릭스는 가슴이 쓰라렸다.
‘바보 같은 놈.’
그는 충격에 머리가 멍했다.
‘내가 수호자의 의무와 복수심에 갇혀 있는 동안…… 레아도 불안했던 건가.’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제 마음도 제대로 모르고, 알아도 표현도 못 해서 제 여자를 울리다니.
늘 웃으면서 먼저 다가와 준 레아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나오게 만들다니.
“레아……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지금 그 말 듣자는 게 아니잖…… 아닌…….”
울음을 참다가 얼굴이 빨개진 그녀를 보자 헬릭스는 제가 대신 울고 싶었다. 그가 더듬더듬 레아의 손을 잡았다.
“……솔직하게 말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헬릭스가 레아의 손을 제 가슴 위로 이끌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쿵쿵 뛰었다.
“그러니 이걸로 확인해 보면 안 되겠나.”
“…….”
“레아.”
그가 속삭였다.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시간도, 심장이 뛴다는 느낌도, 모두 너 때문이다.”
그녀의 손을 제 가슴에 꾹 누르며 헬릭스가 말했다.
“그러니 다 네 거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힘찬 박동, 진심 어린 낮은 목소리.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자, 헬릭스의 얼굴에 설산을 녹여 아이스크림을 만든 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레아는 그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반칙이야.”
“……얼굴이 말인가?”
“얼굴도 반칙이지만, 다른 게 더 반칙이야.”
그녀가 말했다.
“이럴 때만 솔직하고.”
“…….”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네 맘대로 틱틱대다가, 화내면 그제야 예쁜 말 하고.”
“내가 그랬나?”
헬릭스는 자괴감에 빠졌다.
수호자의 의무감에 골몰하느라 레아를 의식적으로 피한 건 맞았다.
‘그녀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런데 레아에게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던 노력이 습관이 되어 버려 상처를 주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용서해라, 레아. 내가 고치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칭찬을 하루에 백 번씩 하면 되겠나?”
레아는 헬릭스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요령 없는 남자였다. 진심만 가득하고,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늘 한결같이 와닿는 마음이 있었다.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겠다고, 네가 원하는 걸 해 주고 싶다고. 항상 레아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보였다.
이번에도 그럴 테지. 그녀가 말하는 건 진짜 열심히 하려는 이 남자가 좀 귀여워서, 레아가 코끝을 찡그렸다.
“……서른 번. 그리고 나랑 솔직하게 애정표현 하는 거 연습해.”
“이렇게 말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헬릭스가 레아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말보다 행동이냐고 하고 싶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마음이 노글노글 풀어졌다.
“으휴, 진짜.”
레아는 투덜거리면서도 헬릭스의 손에 뺨을 비볐다. 헬릭스가 멈칫하더니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레 훔쳤다.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던 레아가 그를 보고 웃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홀 안쪽에서 음악이 바뀌었다. 헬릭스가 물었다.
“추겠나?”
“진짜?”
되물으면서도 레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헬릭스는 그녀를 달랑 들어 레아의 발을 제 발등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뭐야? 아하하하.”
“뭐긴 뭔가. 춤이지.”
“아하하. 이거 아빠들이 아가들 데리고 추는 춤이잖아?”
“아니다.”
헬릭스가 시침 딱 떼며 레아의 허리에 제 손을 얹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뜨거운 손이 스텝을 밟는 그의 발에 얹힌 그녀의 몸을 단단하게 지탱하며 제게로 끌어당겼다.
“레아.”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키스해도 되나?”
레아는 대답 대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 ❀ ❀
비약에 중독됐던 급한 환자들이 거의 일어나자, 피어트 연구소에 딸린 병상들은 모처럼 여유로워졌다.
“휴우. 이제 이 층 병상들은 다 비었죠? 오늘은 여기 시트를 죄다 갈아야겠네.”
하녀 모나가 팔을 걷어붙였다.
“모나, 너무 힘쓰는 거 아니야? 적당히 해. 다 나은 지도 얼마 안 됐으면서.”
“진짜 잘 나았나 봐요. 힘이 솟아서 일을 막 해치우고 싶은 거 있죠?”
모나의 말에 다른 하녀들이 깔깔 웃었다.
“난 다 나으면 놀고 싶을 거 같은데, 모나는 성실하네.”
“아프다 나으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잖아? 건강해지니까 일도 하고 싶은가 보다. 열심히 해.”
하녀들이 응원하며 다른 일거리를 찾아 멀어졌다. 모나는 그 모습들을 보며 생긋 웃었다.
빚 때문에 막장 자작 집안의 하녀로 일하길 이 년. 그러다 자작에게 앙심 품은 요리사가 비약을 수프에 타는 바람에 중독되어 피어트 연구소로 실려 왔던 그녀였다.
‘지랄통 속에서 고생하다 한창 나이에 이렇게 죽나 싶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천국이었다.
“루룰룰루.”
중독은 깨끗하게 나았지, 자작은 망했지, 일자리 잃었다고 망연해하는 그녀를 피어트 연구소에서 하녀로 채용해 줬지.
피어트 연구소는 수당도, 동료도, 근무 강도도 자작의 저택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와 모나는 걷어 낸 시트들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어?”
동료들 말 들을걸.
몸이 무게를 못 이겨 뒤로 넘어가는 찰나,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시트를 조금만 덜 들걸. 더 가벼울 줄 알았는데.
“어어어?”
두 팔이 정말 가벼워졌다. 모나는 놀라서 균형을 잡으며 제 빈 팔을 쳐다보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제 팔에 얹혀 있던 시트들이 둥둥 떠올라 있었다.
“이게 뭐야?”
❀ ❀ ❀
“비약에 중독됐던 사람들 중에서 마법능력자가 나온다고?”
마법 연습을 하다 불려온 레아가 놀라 되물었다.
“확실해?”
“확실하다. 피어트 연구소에서 치료받고 나은 사람들 중에서 벌써 세 명이나 나왔어.”
리케일의 말에 헬릭스가 심각하게 말했다.
“치료했던 이들을 모두 검사해 봐야겠다.”
“부탁하지. 앞으로 얼마큼 나올지 알 수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라…… 헬릭스가 감별해 주면 든든하겠군.”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는 생각에 잠겼다.
“하긴 나도 그렇고, 카라이나 우리 마법학교 애들도 그렇고, 드래곤 마나 먹고 마법능력이 생겼으니까. 이번에도 안 그러리란 법은 없네.”
“문제는 그 사실을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도 알고 있었을 거란 겁니다.”
마스터가 말했다.
“가짜 약을 악의적으로 푼 건 트로우 백작가로 밝혀졌지만, 비약을 여기저기 뿌린 건 아무래도 오켄 황태자 쪽 같으니까요.”
마스터의 말에 레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헬릭스와 피어트 공작가의 두 공자도 심각해졌다.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말했다.
“트로우 백작가에서 뿌렸다기엔 비약의 양이 많았다.”
“양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스터가 설명했다.
“비약을 푼 자들을 심문하니 하나같이 사회 하류층에, 불만이 많고, 많은 이들이 먹는 음식에 접근하기 쉬운 자들이었죠. 모두 똑같이 진술했습니다. 낯선 자가 비약을 독약처럼 건넸다고요.”
“일부러 잃을 게 없는 자들에게 접근해서 소란을 일으키라 사주한 건가…….”
리케일이 중얼거리자 루얀이 이마를 구겼다.
“왜 그렇게 쓸데없이 복잡한 짓을? 소란을 일으키는 게 목적이면 아무 데나 뿌려도 됐잖아.”
“꼬리를 자를 생각이었을 거다. 하층민들이 현실을 원망해 일으킨 소요 사태 정도로 감추려 했겠지.”
리케일의 말에 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큰오빠. 그냥 꼬리 자르기로 하기에는 일에 드는 품이 너무 커. 결과도 이상하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마법능력자들이 생기고 있잖아.”
“그 점이 이상합니다.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가 페이런의 국민들을 마법사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헬릭스가 말했다.
“응?”
“오켄 황태자는 페이런 국민들을 마법능력자로 만들 생각일지도 모른다. 제 권속으로 삼기 위해서…….”
“권속이라고?”
“드래곤은 제 마나로 만들어진 마법능력자와 마법사를 지배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