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03)화 (103/120)
  • 103화

    화려하던 저택은 쓰레기장이 되고, 상단 건물은 재수 없다고 팔리지도 않았다. 몰려든 시민들에게 겁먹고 집사며 하인들도 다 도망가 버렸다.

    ‘고용인들보다 기사랑 사병들이 당장 더 문제지.’

    기사들도 사병들도 거의 잡히거나 빠져나갔다. 남은 건 다른 데 갈 수 없는 이들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트로우 백작가의 개로 길러진 첩자 놈들은 여기저기 원한이 쌓인지라, 나가 봤자 칼빵 맞을 게 뻔하니 버티고 있었고.

    한 줌 기사들은 집안이 대대로 트로우 백작가의 봉신이라 영지도 다 엮여 있어서, 가족들이 고향에서 내쫓길까 봐 울며 겨자 먹기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황태자가 파견해 둔 뱀 기사단원들이 아직 남아 있지만.’

    트로우 경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자신들의 전력으로 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능력이 좋으면 뭐 하는가. 오만한 데다 백작과 트로우 경을 제 아랫사람 급으로 취급하는 놈들이라, 오히려 백작가가 이용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생각할수록 답이 없었다.

    ‘그러니까 왜 피어트 공작가를 거꾸러트리려고 해서!’

    피어트 공작가만 안 건드렸어도 오늘날 트로우 백작가가 이 지경까지 몰리진 않았을 텐데. 트로우 경은 입술을 씹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냥 나도 동생들처럼 가문과 연을 끊어 버릴까?’

    그렇지만 동생들과 트로우 경의 처지는 달랐다.

    제국으로 유학 가고, 교단에서 수련 중인 동생들과 달리 트로우 경은 가문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몰린 기분에 그가 진저리를 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트로우 백작은 책상 모퉁이를 붙잡고 이를 갈았다.

    “두고 봐라.”

    “예?”

    “황태자께서는 레아 피어트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버지.”

    “포기하셨다면 우리를 이미 내치셨겠지. 하나 지난 작전에 비약을 그리 많이 주신 걸 봐라. 뱀 기사단원들도 아직 이곳에 놔두시지 않느냐?”

    “…….”

    “그러니 우리 가문도 아직 살아날 구멍이 있어……!”

    트로우 경은 백작의 광기 어린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차라리.’

    그의 눈이 위험스레 빛났다.

    ‘차라리 내가 백작이 돼서, 수도를 정리하고 트로우 가문의 영지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 ❀ ❀

    페이런의 왕성에서는 신년을 축하하며 무도회가 열렸다.

    간만의 왕실 무도회였지만 이번 무도회의 화제는 단연 피어트의 활약이었다. 하마터면 수도 한복판에서 독약이 풀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까.

    “그뿐입니까? 원래 이렇게 한파가 오는 겨울이면 꼭 전염병이 번졌는데…… 피어트 가문에서 그것도 잡았다면서요?”

    “독약 푼 놈들이 피어트 감기약하고 똑같이 만들어서 장난치니까, 아예 새로 더 효과 좋은 감기약을 내놨다더군요.”

    “프리미엄 감기약도 있다는데 드셔 보셨나요? 비싸지만 효과가 진짜 확실하다던데.”

    “어휴, 그거 진짜 물건이에요. 제 아들이 매해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그걸 꾸준히 먹고부터 기침 한번 안 한답니다.”

    “허어, 피어트 상단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 셈이로군요. 수완이 대단합니다.”

    귀족들이 피어트 공작가의 공로를 인정할 정도니 수도의 백성들은 말해 무엇하랴.

    “먹고살기도 힘든데 가짜 약까지 퍼지면서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했는데. 진짜 그 감기약 덕분에 살았지. 귀족들 중에 피어트 공작가처럼 우릴 생각해 주는 가문이 없어!”

    “좋은 감기약을 싸게 팔자는 게 레아 공녀님 생각이었다며? 역시 남다르시다니까.”

    “우리 옆집 할매가 그 가짜 약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공녀님이 기사들 데리고 직접 데려가서 고쳐 주셨다잖아? 그분은 그리 어여쁘시고, 마음씨도 고우시고. 성녀 아냐, 성녀?”

    “아니 성녀라고 하기엔 트로우 가문 기사 놈 매달 때 성격 보통 아니시던데…….”

    수도 사람들은 연일 피어트 공작가를 찬양하느라 바빴다.

    페이런 왕실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숟가락을 올렸다. 수도 백성들에게 구휼품을 베풀고, 신년회 겸 피어트 공작가의 공을 치하하는 자리로 무도회를 연 것이다.

    “다 좋은데 말이지.”

    레아가 무도회에 입장하면서 헬릭스에게 작게 투덜거렸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차려입은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까마귀 깃털처럼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드레스는 레아의 카리스마를 강조했고, 단순하고 세련된 마력석 장신구는 마법사임을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하나 과감하고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지만, 레아의 기를 누르기는커녕 싱그럽고 해사한 미모를 더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헬릭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눈을 빼앗기며 몸을 기울였다. 레아가 그의 귓가에 종알거렸다.

    “왜 하필 무도회야? 그냥 만찬회나 칵테일파티 같은 걸로 하면 안 되나?”

    “백성들한테 먹을 것을 베풀었으니 행사가 겹치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동의하면서도 심란한 낯으로 무도회장을 둘러봤다.

    사실 왕실에서는 레아를 띄우기 위해 무도회를 준비했다. 사교계 명사이자 미인인 그녀라면 무도회에서 더 돋보일 거라 여긴 것이다.

    레아가 얼마나 몸치인지 알려지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내가 춤추다 실수하면 다들 난리 날 거 같은데.”

    헬릭스와 딱 붙어 있는데도 주목도가 장난 아니었다. 그가 주위를 훑어보더니 속삭였다.

    “일단 좀 아픈 척하고 있는 게 어떤가.”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 그럴까?”

    “레아 네가 피곤한 건 사실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잖나. 여기 기대어 있으면 내가 음료를 가져오겠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헬릭스는 빠른 걸음으로 음료 진열대를 향해 멀어졌다.

    ‘응?’

    헬릭스가 레아에게서 떨어져 음료가 진열된 테이블로 다가가자마자, 한 무리의 영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둘러쌌다.

    ‘뭐지, 저 인기는?’

    레아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물론 헬릭스가 지금 이 무도회장에서 제일 멋있기는 했다. 레아의 드레스와 맞춤으로, 푸른 광택이 도는 검은색 연미복을 입고 긴 은발을 늘어트린 모습은 마주친 이들이 숨을 삼킬 정도로 매혹적이었으니까.

    ‘이보세요들. 그래도 내가 있는데, 이건 아니지.’

    그녀의 눈꼬리가 치켜올라 갔다.

    ‘골키퍼 있으면 골대에서 멈칫거리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몰라? 페이런의 연애 상도덕이 언제 이렇게 됐어? 앙? 확 그냥!’

    이대로 진격해서 데리고 와 버릴까.

    잠시 고민하던 레아는 일단 참았다. 헬릭스라면 금세 여자들을 뿌리치고 돌아오겠지.

    “…….”

    그런데 한 사람, 두 사람, 네 사람.

    헬릭스를 둘러싼 영애들의 덤불은 자라나기만 할 뿐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금씩 속이 끓어올랐다.

    “여기.”

    시원한 거라도 마시고 가라앉혀야지. 그녀가 음료 트레이를 들고 오가는 시종을 불렀다.

    그때였다.

    레아가 노려보던 스파클링 와인을 낯선 손이 트레이에서 집어 들었다. 그 손이 빙글 돌며 그녀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왕자님?”

    패트릭 왕자가 빙긋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레아 공녀. 요즘에 활약이 대단하시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제 작은 노력을 알아봐 주시고 이리 연회까지 베풀어 주시니, 페이런 왕실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왕자는 매끄럽게 말하는 레아를 빙글빙글 웃으며 쳐다보았다.

    “공녀, 한배를 타고 있는 사이에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럴 순 없지요.”

    “공녀의 예의를 루얀 경이 반만 받아 가면 딱 좋겠는데 말입니다.”

    패트릭 왕자의 농담에 레아가 핏, 웃음을 흘렸다.

    “이루어지기 어려운 희망을 품고 계시는군요, 왕자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루얀 피어트에게 예의라니, 말을 말지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드는 왕자를 보고 그녀가 다시 웃었다. 만날 제 둘째 오빠를 괴물이나 우상 취급하는 이들만 보다가 이렇게 또래 친구 대하듯 하는 반응을 보니 신선하고 유쾌했다.

    “그럼 루얀 피어트 경의 예의를 위해, 건배.”

    짐짓 엄숙하게 말하며 내민 잔에 레아도 기꺼이 제 잔을 부딪쳤다. 챙 소리도, 갈증 났던 목에 닿는 청량한 발포주도 시원했다.

    ‘흥. 그래, 뭐. 헬릭스랑만 붙어 있을 필요는 없잖아? 나도 원래부터 사교계 유명인사라고.’

    왕자가 말했다.

    “저야 공녀에게 말도 걸고 좋습니다만, 오늘따라 접근하는 남자가 없군요.”

    “그러네요.”

    패트릭 왕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딱히? 지금은 왕자님이 계시고, 아까는 헬릭스가 있어서가 아닐까요?”

    “영애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겁니다.”

    레아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슬쩍 눈을 굴렸다. 다른 이유가 있어?

    “최근 영애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자들이 사교계 파티에 잘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쩐지 쾌적하다 싶더라니. 그녀는 속마음을 누르고 왕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더포드 남작은 과음하다 ‘운이 없어서’ 계단에서 미끄러졌고, 필립 칼로시 영식은 ‘사고로’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하더군요.”

    “……‘운’이 아니고, ‘사고’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글쎄요.”

    패트릭 왕자가 잔을 돌리며 시선을 잠깐 멀리 주었다.

    “저는 그저 소문을 얘기하는 겁니다.”

    레아도 왕자가 쳐다보는 쪽을 돌아봤다. 영애들의 숲에서 헬릭스가 이쪽을 찌르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혹시 헬릭스가?’

    그녀가 설마 하는 동안 왕자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빙글빙글 짙어졌다.

    ‘정말로? 헬릭스가?’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도는 커플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가 어느 순간 느려졌다. 바스락 치맛자락이 접히는 소리와 은근한 인사들이 오가고, 춤곡이 바뀌었다.

    패트릭 왕자가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실까요, 영애?”

    레아가 멈칫하다 그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번개처럼 다가온 헬릭스가 레아의 손을 제 손 위에 턱 얹었다.

    “이런.”

    뻣뻣한 말투로 헬릭스가 말했다.

    “이번은 제 순서인가 봅니다, 왕자님.”

    파트너를 눈앞에서 가로채였지만 왕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흔쾌히 물러났다. 그가 가볍게 물었다.

    “공녀, 다음번에는 내 순서가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며 헬릭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사뿐히 돌렸다.

    얼결에 같이 춤추게 된 레아는 뚱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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