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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00)화 (100/120)

100화

“……계약자의 보석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자넷이 부탁하기도 했고.”

“자넷이?”

“새벽에 네 방 벽난로에 불을 돋우러 갔는데 없더라며, 나더러 찾아 달라더군.”

“…….”

“자넷 고생 좀 그만 시켜라, 레아.”

“아니, 난 조용히 수련하다 아침 전에 돌아가려고 그랬지……. 근데 날 찾아 달라고 헬릭스 너한테 그랬어?”

“아까 널 구해 달라고 내게 달려온 것도 자넷이었다.”

“그랬어?”

몰랐던 사실에 레아가 눈을 깜박이다가 웃었다.

“자넷이 헬릭스 널 믿고 있나 봐.”

헬릭스는 그런 레아를 내려다봤다. 오기 전 자넷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공녀님을 부탁드려요. 안 그런 척하시지만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헬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가 화염에 휩싸인 걸 본 순간 헬릭스 자신도 미칠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는데, 직접 겪은 본인은 어떻겠는가.

‘레아 너는 무서우면 화를 내지.’

생각해 보면 북부에서부터 그랬다. 떨면서도 화를 내고, 그 분노를 동력 삼아 몬스터를 퇴치하고 마법 수련을 했다.

‘네가 더 강해지면 덜 무서워질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하지.’

헬릭스는 레아의 그런 강한 면도 좋았다.

어떻게든 맞서려는 투지로 가녀린 몸을 꼿꼿이 세우고 버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여자가 내 편이라는 생각까지 들면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렇지만 레아 너는 그렇게 강한 사람만은 아니다.’

강한 면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눌러놓은 두려움. 그 약한 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제 여린 살을 보이는 것 또한 사랑스러웠다.

그 두려움과 불안을 다독이고 쓰다듬으면, 제게만은 경계를 풀고 여린 면을 모두 보이고 맡기는 것이다.

‘그러니 너를 위로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헬릭스가 큰 손으로 레아의 양 뺨을 감쌌다. 그의 뜨거운 손가락이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레아, 다 네 거다.”

저도 모르게 떨고 있던 레아가 오한을 멈추고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그가 반복했다.

“화염마법도, 그걸 이루는 마나도 다 네 것이다.”

“…….”

“두려워할 것 없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헬릭스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한참 만에 다시 열린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자기가 준 걸로 날 파멸시키겠다고 했어.”

“다시는 그럴 수 없을 거다.”

헬릭스의 확언에 레아가 물었다.

“왜? 헬릭스 네가 수호자의 힘을 되찾고, 날 다른 마나로 많이 채워서?”

“그것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애초에 그 드래곤이 억지를 부리는 거니까.”

“억지?”

“그렇다.”

헬릭스는 설명했다.

드래곤의 마나에서 마법을 이끌어 낸 건 레아의 능력과 노력이라고.

마나를 제공했다고, 개화한 마법과 그 마법사까지 제 것이라 주장하는 건, 옛날 옛적에 드래곤이 제 마음에 드는 인간을 찍어 처음부터 끝까지 마법사로 만들었을 때에나 통하던 얘기라고.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헬릭스가 고심하더니 요약했다.

“멋대로 금화 한 개를 쥐여 주고 한참 만에 찾아와서 네 재산 다 내놓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 ❀

역시 사람은 돈으로 비유해야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 같았다. 레아는 바로 깨달았다.

“황태자 그놈이 사채업자 양아치네!”

그녀의 결론에 헬릭스가 픽 웃었다.

“도마뱀에, 사채업자에, 양아치인가? 드래곤의 명성이 울겠군.”

“그놈이 명성에 먹칠하는 짓을 하니까 그렇지. 우리 쿠앙이처럼 귀엽고 착하게만 굴었으면 이런 취급 안 받았을 텐데.”

“……쿠앙이가 착한 줄은 모르겠군.”

“귀엽긴 하지?”

“그것도 더 생각해 보겠다.”

흥에 겨워 꼬리를 흔들며 쿠왕쿠왕. 은색 인간, 오늘 레아를 보았나. 오늘도 아주 어여뻤다. 레아가 맛있는 버터과자를 주었는데 내가 반은 흘린 것 같다. 아까워 죽겠다 우는 모습은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있잖아, 헬릭스. 나 드래곤의 성녀 좀 싫었는데.”

헬릭스가 레아를 내려다보며 뒷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쿠앙이는 잘 교육시켜야겠어. 아르카이크 놈처럼 양아치가 되게 만들 순 없잖아?”

“음…… 그건 아닌 듯하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레아 너는 쿠앙이에게 너무 무르지 않나. 적절한 훈육을 위해 나도 참여하는 게 좋겠다.”

“헬릭스는 너무 엄할 거 같은데.”

“오해다. 나에게 훈련받은 레아 네 체력을 봐라.”

“아앗. 팩트로 공격당했어.”

❀ ❀ ❀

투닥대던 레아는 헬릭스의 어깨에 기대어 깜박 졸았다. 눈을 떴을 때는 새벽 별이 뜨고 있었다.

“깼나?”

“응.”

레아가 고개를 비빚비빚하며 그의 어깨에서 머리를 뗐다. 눈을 돌리자 어둠 속에 고요한 호수가 보였다.

‘아직도 달빛이…….’

창백한 새벽 달빛이 반쯤 얼어붙은 수면에 반사되어 사위가 밝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헬릭스를 쳐다봤다.

은발 위로 부서져 내리는 달빛 아래, 조각 같은 얼굴에 음영이 졌다. 그 얼굴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레아를 내려다봤다.

“바람이 찬데, 더 일찍 깨울 걸 그랬다.”

헬릭스가 제 망토로 그녀를 싸며 확인하듯 뺨을 만졌다.

“따뜻한 마나 계속 넣어 줬으면서.”

“그래도 늘 부족한 것 같다.”

크고 뜨거운 손이 얼음조각상을 만지는 것처럼 레아의 얼굴을 더듬었다. 자신의 손끝에서 녹아내릴까 두려워하듯 천천히.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운 손길에 그녀가 말갛게 그를 올려다봤다. 헬릭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까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나도 무서웠어.”

“……그래.”

헬릭스가 나직하게 대답하며 레아를 감쌌다. 그의 품에 얼굴을 붙인 그녀가 폭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안 무서워.”

“하루, 종일이라도 이렇게 있을 수 있다.”

“……그건 내 체력이 안 되는데?”

“그것도 내가 되게 만들 수 있다.”

레아가 웃으며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처음에 나 마법 가르칠 때 생각난다. ‘내가 되게 만들 거다. 하다 보면 된다’ 막 그랬었잖아.”

“그땐 마나를 조금씩 전해 줬었지.”

“난 마나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뒤집어지게 놀랐는데, 헬릭스는 그 마나가 적다고 생각했을 만하네.”

레아는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아까 헬릭스가 나한테 수호자 힘을 개방해 줬잖아? 나 그러고 나서 훨씬 강해진 거 같아.”

그녀가 오른손을 호수 쪽으로 내밀었다. 확신이 섰다.

‘아까 바람마법도 훨씬 더 강하고 잘됐는걸.’

그래. 이 마법은 자신의 것이었다. 처음 계기를 누가 어떻게 주었건 지금 이 화염마법은 레아 자신과 헬릭스가 함께 쌓아 올린 것이었다.

‘내 거야.’

자신의 남자 품에서, 레아가 확신에 차 생각했다. 뺏으려 드는 놈들은 망할 트로우든 도마뱀이든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녀의 두 눈이 투지로 불타올랐다. 레아가 힘차게 외쳤다.

“파이어볼!”

화르륵!

정작 불을 일으킨 레아 자신도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붙은 불이 얼음 위에서도 꺼지지 않고 파랗게 불타올랐다.

“와…….”

레아가 얼른 불꽃을 없애 놓곤 제 손을 내려다봤다.

“와, 세상에.”

제 손과 헬릭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레아가 중얼거렸다.

“헬릭스가 마나로 날 재조립했어…….”

“재조립까진 아니다.”

헬릭스가 약간 멋쩍은 듯 시선을 돌렸다.

“레아 네 몸이 정순한 상태가 되어 마나의 흐름과 활용이 높아진 것뿐이다. 마나의 속성이 불순한 것을 없애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응?”

그거 뭔가 활용방안이 무궁무진하게 들리는데요.

헬릭스의 말을 듣던 레아의 머릿속에 생각이 스쳤다.

“헬릭스. 불순한 것을 없앤다면…….”

레아의 눈이 반짝였다.

“비약도 인체엔 불순한 거 맞지?”

헬릭스도 깨닫고 멈칫했다. 레아가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마나 샤워를 시키면 환자들에게서 독이나 비약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헬릭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연구소로 가 보는 게 좋겠다.”

❀ ❀ ❀

“……아니,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주치의가 졸음 섞인 얼굴로 헬릭스와 레아를 맞이했다. 이제 막 해가 뜨는 시각이었다.

“잠깐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레아가 연구소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봅니다.”

덩달아 잠이 깨 끌려 나온 신입 연구원이 불퉁한 얼굴로 주치의를 향해 수군거렸다. 주치의가 입조심하라는 눈짓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무얼 확인하시려고요?”

“제일 상태가 양호한 환자에게 안내해 줘.”

레아의 거침없는 명령에 연구원은 속으로 불만스러워했다.

‘아니 공녀님이면 공녀님이지, 꼭 이런 꼭두새벽부터 와서 환자를 보여 주니 마니 해야 하나? 자기가 의사인가?’

선배 연구원들은 종종 얘기하곤 했다.

‘레아 피어트 공녀의 몸이 약하지 않았으면 이 연구소도, 피어트 상단의 많은 약품들도 없었을 거다.’

‘존재만으로도 페이런 왕국의 의료 발전에 엄청난 공을 세운 분이시지.’

그렇지만 아직 신입인 연구원은 그런 찬양이 내심 아니꼬웠다.

‘그런 걸로 치면, 살리겠다고 연구소를 차린 피어트 공작가가 더 칭송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약품 가격을 낮게 받고 화장품을 높게 받자고 제안한 건 레아 공녀님이시지. 그리고 화장품 모델로 사교계에서 활동해서 약품 쪽에 쓸 자금이 모자라지 않게 배려해 주셨어.’

‘너무 좋게만 보시는데요? 그거야 사교계에서 잘나가고 싶어서 한 거 아닙니까?’

연구원은 비딱한 시선으로 앞서가는 레아와 헬릭스의 뒷모습을 쫓았다. 저 훤칠한 남자와 딱 붙어서 다니는 것도 영 꼴 보기 싫었다.

‘공작가 외동딸에 미인이라고 다들 너무 후한 거 아냐?’

약재사 길드 놈들은 저 헬릭스란 놈을 쳐주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연구원은 근본도 알 수 없는 인간이 연구소에서 설치고 다니는 꼴도 거슬렸다.

헬릭스가 뭐만 손댔다 하면 선배 연구원들이 ‘오오!’ 하면서 배알 없이 감탄을 연발하는 것도 웃겼다.

‘게다가 저 남자만도 아니잖아.’

연구원은 연구소에 자리 잡고 있는 카라이를 떠올렸다. 해사한 얼굴을 해 가지고 레아 피어트 공녀만 보면 온갖 알랑방귀에 재롱을 피우는 놈이었다.

‘도대체 저딴 놈이 왜 우리 연구소에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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