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럴 리가 있나.”
헬릭스가 절대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이대로 폭동이 일어난다면 폭도들은 지나가는 길에 있는 가게 문도 부수고 가게도 털 것이다. 트로우 백작가로 가기는 할 테지만 약삭빠른 트로우 백작과 트로우 경은 이미 도망친 뒤일 터. 그럼 옷 잘 입고 있는 사람인 집사를 끌어내서 질질 끌고 다니며 돌팔매질을 하고, 그러다 눈에 보이는 귀족 저택이나 가게마다 해코지를 할 거라고도 했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세세한 묘사에 레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떻게든 해야겠어. 헬릭스, 재판에서처럼 내 목소리랑 존재감 좀 키워 줄 수 있어?”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는가.”
그는 살짝 타박하며 레아의 등에 손을 댔다. 마나가 몸을 달구며, 떨리던 몸에 열과 용기가 차올랐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명예로운 페이런의 시민들이여!”
레아가 크게 외쳤다.
“오늘 또 트로우 백작가의 악행을 여러분께 알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들의 불에 타 죽을 뻔하다가 빠져나온 몸, 시민들의 분노를 깊이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갑자기 터져 나온 기품과 위엄 넘치는 목소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놈들의 사악함을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화염마법사 레아 피어트입니다. 이런 제가 불에 타 죽을 뻔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일까요? 그렇지만 트로우 놈들은 성공할 뻔했습니다. 놈들이 이렇게 위험한 자들입니다!”
레아가 상대적으로 약간 높은 다리 위에서 군중들을 내려다봤다.
“명예로운 페이런의 시민 여러분, 여러분만 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을 돕고, 인도해 줄 사람을 따라가십시오! 소드마스터 루얀 피어트를!”
“루얀 피어트!”
“루얀 피어트! 소드마스터!”
사람들이 루얀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루얀의 놀란 눈이 허공에서 레아와 마주쳤다. 더 설명이 없어도 둘의 뜻이 통했다.
파앗!
강변에서 파란 검기가 솟아올랐다. 레아가 힘차게 외쳤다.
“갑시다! 가서, 트로우 백작을 매달아 버립시다!”
“트로우 백작을 매달자!”
“매달자!”
그녀를 따라 울리는 군중의 외침 속에 소드마스터의 음성도 힘을 보탰다.
“가자!”
폭주하기 직전의 레밍 떼 같던 사람들이 모두 목을 길게 빼며 검기의 주인을 눈에 담았다. 검 끝에서 검기가 푸른 불꽃처럼 솟아올랐다.
“나를 따르라!”
루얀이 외치며 검기를 한 바퀴 휘둘렀다. 그가 새파란 광선 끝으로 트로우 백작 저택 쪽을 가리켰다.
“트로우 잡놈들 잡으러!”
“와아아!”
❀ ❀ ❀
루얀이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트로우 백작가를 와그작와그작 부수고 있는 동안, 레아는 헬릭스와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휴. 정신없는 하루였어.”
레아가 헬릭스에게 업혀 한숨을 쉬었다.
“고생했다.”
헬릭스가 그녀를 업은 채 강변을 따라 걸었다. 공작저로 향하는 방향에 레아가 물었다.
“응? 우리 연구소로 안 가?”
“오늘은 푹 쉬자.”
헬릭스의 말에 그녀가 그의 어깨에 턱을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이 너무 많았어…….”
“그래. 그러니 가서 푹 쉬고, 내일 레아 네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도 먹자.”
“다 나 힘나는 거뿐이네.”
헤헤 웃은 레아가 제 뺨을 헬릭스의 목덜미에 비볐다. 헬릭스가 목을 움츠리지 않으려고 상체를 쭉 펴며 말했다.
“……떨어트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헬릭스가 이 정도로 날 떨어트릴 리 없잖아. 오늘 수호자의 힘도 엄청 돌아왔는데.”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헬릭스가 수호자로서의 힘이 봉인됐다고 말할 때마다, 지금도 능력 많은데 뭐가 봉인됐단 거지 했거든. 근데 돌아오고 나니까, 와아!”
레아가 부르르 떨었다.
업고 있는 헬릭스가 멈칫하는 줄도 모르고, 제 이야기에 몰입한 그녀가 그의 어깨며 등을 두드렸다.
“나 이게 마나 샤워라는 건가 했다니까? 무슨 혈관을 마나로 다 씻어 내는 줄 알았잖아.”
“……그런 느낌이었다면 다행이다.”
헬릭스가 레아를 추어올리며 꽉 잡았다.
“더 이상은 황태자도 레아 네게 개입할 수 없을 테니.”
그답지 않은 스산한 목소리에 레아가 안심하란 듯이 목을 껴안았다.
“그럼. 네가 있는 한 이제 난 무적이야.”
“나한테는 좀 져 줬으면 좋겠다.”
“아닌데. 많이 지고 있는데. 너무너무 좋아해서 막 홀라당 넘어가고 있는데.”
그녀가 제 몸을 헬릭스에게 밀착하며 그의 귀에 뽀뽀했다. 쪽. 귀에 크게 들리는 소리에 헬릭스는 세상이 반으로 쪼개지는 기분이었다.
‘……아닌가. 내 심장 쪼개지는 소리인가.’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레아가 말했다.
“나만 좋은 거 아니지?”
“무슨 소린가.”
“나만 너 봉인 풀려서 좋은 거 아니지?”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헬릭스 너 수호자로서의 힘을 되찾는 거 늘 바라 왔잖아. 근데 왜 나만 말해.”
헬릭스는 순간 침묵했다. 가슴속이 레아가 좋아하는 슈크림이 된 것 같았다.
드래곤의 성녀니. 아즈라가 계획한 대로 되느니 마느니.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봉인되었던 시간 내내 그의 마음을 할퀴었던 아즈라의 독기 어린 용언 저주들도, 가장 뼈아팠던 ‘너는 실패한 수호자’라는 말도.
이 달콤한 파도 속에서는 아무 의미 없이 흐물흐물 떠내려갔다.
“……네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헬릭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너는 모를 거다.”
과거의 그에게는 ‘수호자로서의 인생’밖에 없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헬릭스는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말할 수 있었다. 껍질뿐인 명예를 두른 외롭고 고집스러운 생을 걸어왔노라고.
그런 그에게 레아가 알려 주었다.
상처를 보듬는 법을. 소박한 것에 기뻐하는 법을. 소중한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레아 너는 내게, 진짜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을 알려 주었다.”
헬릭스의 심장 소리와 함께 듣는 진심이 너무 크고 묵직했다. 레아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죽였다.
“반쪽이었던 수호자는 이제 없다.”
헬릭스가 나직하게 이어 말했다.
“날 온전한 수호자로 만든 게, 레아 너다.”
❀ ❀ ❀
그날 밤.
레아는 공작저의 제 침대에 누워 헬릭스의 말을 떠올렸다.
‘으아아아아.’
그녀는 속으로 발버둥을 쳤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 파닥거리다 제풀에 지쳐 바로 누웠다.
“…….”
잠이 안 왔다.
부드러운 이불을 몸에 감고 옆으로 누워도, 도리질 치다 똑바로 누워 캐노피의 하늘하늘한 레이스 장식을 쳐다봐도.
자꾸 헬릭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레아 너다.’
‘네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네가 날 온전한 수호자로 만들었다는 헬릭스의 나직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을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너무 팔딱팔딱 뛰어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안 되는데. 내일 헬릭스랑 맛있는 디저트 카페 갈 건데.’
레아가 억지로 눈을 감고 조용히 몸을 쭉 폈다.
타닥. 타닥.
방 안이 고요해지자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가끔 불길이 쉭 일어나는 소리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불.
갑자기 오싹해지는 기분에, 그녀가 팔을 쓸었다.
“어?”
팔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듯했다. 레아가 놀라 손을 떼었다.
하얀 팔에 보이는 거라곤 소름 돋은 피부뿐이었지만, 한번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불. 제 몸에 붙던 불.
“…….”
레아가 침을 삼켰다.
의식을 잃은 동안 저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떠올랐다.
아르카이크 오켄의 미친 짓거리들과, 벗어나려는 제 발버둥을 제압하며 욕망에 들끓던 놈의 속삭임이 기억을 긁었다.
‘……네가 본 것과 함께 사라져라.’
‘내가 준 것으로 너를 파멸시키리라!’
그 음성을 떠올리자 온몸이 발작하는 것처럼 부들거렸다.
‘무서워.’
그녀는 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아르카이크의 속박에서 깨어나자마자 용감하게 트로우 백작의 부하들을 해치웠지만, 역시 황태자에게 죽을 뻔한 두려움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카이크 오켄…….’
무섭고 화가 났다. 놈에게 휘둘리던 낮의 일도, 지금껏 떨고 있는 이 상황도.
그녀가 손을 더 꽉 맞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떨고 있을 수만은 없어.’
레아는 이불을 젖히며 발딱 일어났다.
❀ ❀ ❀
페이런의 수도에서 가까운 한밤중의 호숫가.
풍덩!
펄럭펄럭 날아온 사람이 요란하게 호수에 빠졌다.
“후아.”
호수에서 얼른 고개를 내민 레아가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안 봤겠지?”
주위를 둘러보고 천천히 착지하려 했는데, 미숙한 비행마법으로 인해 호수에 빠져 버렸다.
“으으, 추워.”
레아가 오들오들 떨며 인적이 없는 호숫가로 헤엄쳐 나왔다.
숲으로 둘러싸인 호젓한 호수는 수도를 가로지르는 페이강 상류에 있는 숨겨진 명소였다.
‘예전에 작은오빠가 혼자 수련한다고 오던 곳이었지.’
가끔 아픈 레아를 데리고 나와 바람 쐬게 해 줬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땐 마차 타고 한참 걸렸는데. 비행마법으로 날아오니까 생각보다 금방이네. 여기서 몰래 수련하고 아침이 되기 전에 다시 날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아가 품에서 마법지팡이를 꺼냈다.
그녀가 둥글게 제 주위로 원을 그렸다.
“파이어!”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엥?”
레아는 당황해서 저를 내려다보고, 제 주위를 다시 둘러봤다.
당연히 불꽃이 솟아서 물에 쫄딱 젖은 몸을 말릴 줄 알았는데, 불은 고사하고 마나도 반응이 없었다. 레아가 다시 마법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파이어!”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파이어! 파이어! 파이어볼! 파이어월! 파이어스톰!”
온갖 화염마법을 부르짖어도 안 되자, 레아는 마법지팡이를 팽개치고 양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헬파이어!”
끼룩!
그녀의 괴성에 놀란 철새 한 마리만 호숫가에서 날아올랐다.
“…….”
사방이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저벅.
“……내 이럴 줄 알았다.”
등 뒤에서 헬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헬릭스?”
레아가 놀라 돌아보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