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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97)화 (97/120)

97화

미쳤냐고 대답하려던 혀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듯, 몸이 레아의 의지를 배반하고 얌전히 억눌려 복종했다.

“으…….”

약에 취한 듯 흐느적대기 시작하는 그녀를 향해 아르카이크가 드래곤의 권능을 더 쏟아 냈다.

푸른 눈에서 총기가 사라지고, 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생경했다. 제 손안에서 무기력하게 떠는 레아의 모습에 아르카이크는 숨을 멈췄다.

레아의 육체, 몸짓, 체향과 눈가의 떨림 하나까지도 모두. 자신이 인간의 신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생전 처음 느낀 인간의 욕망에 어질해진 드래곤이 제 소유물에 손을 뻗었다.

“……나의 마법사.”

아르카이크가 목줄기를 따라 코를 미끄러트리며 그르렁대듯 속삭였다.

“드래곤의 성녀.”

“…….”

“마지막 기회다.”

아르카이크가 집착 어린 목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에 이를 세웠다. 레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나를 선택해.”

너와 있으면 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무가치한 세상에 작고 예쁜 빛이 켜진다.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과거의 치부도, 너라면, 드래곤의 성녀인 너라면 알아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르카이크 본인도 모르는 마음은 짧은 말에 담기지 않았다. 레아의 가슴에 가 닿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싫은 순간을 견디듯 돌처럼 굳어 있었다. 거부를 느낀 아르카이크가 레아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녀의 푸른 눈은 맹렬히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

공기가 달라졌다.

레아에게서 떨어진 아르카이크의 눈이 완연한 금빛으로 변했다.

“내가 준 것으로.”

드래곤의 화염이 쏟아지며.

“너를 파멸시키리라!”

레아의 몸이 불꽃에 휩싸였다.

❀ ❀ ❀

피어트 공작가의 연구소 근처.

낡은 건물 이층에서 트로우 백작과 그의 장남 얀 트로우 경은 시근덕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전에 비밀클럽 뒤채에 불을 질렀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을 구한 게 피어트 기사단이란 말이냐?”

“예! 확실하다니까요!”

트로우 경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피어트 놈들이 얼마나 입단속을 했는지, 여즉 입도 뻥끗 안 해서 모르고 넘어갈 뻔했잖습니까! 니니안 고년도 말해 놓고 아차 하더라고요!”

지난 재판 이후 몰락 직전으로 몰린 트로우 백작가. 그 장남인 얀 트로우는 이제 수도 사람들이 다들 인정하는 ‘목이 달랑달랑한’ 신세였다.

그에 반해 여배우 니니안은 유명세를 얻어 점점 더 인기 상승세인 뜨는 별. 우연히 마주친 식당에서 니니안이 트로우 경을 모르는 척 무시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 감정도 안 좋은 사이 아닌가?

하지만 얀 트로우는 생각이 달랐다. 감정이 안 좋건 제가 죽이려 했건, 어쨌거나 여배우 따위가 귀족인 저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휘청대도 귀족이다. 너 따위 계집 하나 처리 못 할 것 같아?’

트로우 경이 을러대자 니니안도 울컥했다.

‘이 멍청한 새끼야, 너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내가 아무 줄도 안 잡았을 거 같니? 날 구해 준 분들이 너도 내버려 두지 않을걸!’

‘줄? 어디 높은 분 하나 잡은 모양인데…… 한 번 구해 줬다고 널 두 번 구해 줄 거라 믿나? 귀족의 변덕스러움을 모르는군. 여전히 어수룩한 구석이 있어.’

‘그럴 리 없어. 내가 목숨 걸고 증언도 해 드렸는데……!’

아차차. 그제야 얼굴이 하얗게 된 니니안이 서둘러 자리를 떴지만, 트로우 경은 이미 잘 들은 뒤였다.

빠득. 그가 분한 듯 이를 갈았다.

“그래 놓고 자기들은 쏙 빠지고 우리가 불 지른 걸 이용해서 여론몰이를 했다니. 아주 겉으로만 고상하지 속은 약아빠진 놈들 아닙니까?”

“화낼 것 없다.”

그러는 트로우 백작의 목소리도 분노로 차가웠다.

“우리도 여론몰이를 하면 될 게 아니냐.”

트로우 경이 백작을 미심쩍게 쳐다봤다.

“이미 잃을 민심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여론몰이를 한단 말입니까?”

“우리를 띄우진 못해도 피어트 공작가를 깎아내릴 순 있지 않느냐.”

백작이 말했다.

“연구소에 병실이 꽤 많이 딸려 있다고 하던데. 그곳에 불을 지르고 마법이라고 소문내면…… 레아 피어트가 화염마법으로 불내서 사람을 죽였다고, 다들 입방아를 찧지 않겠느냐?”

트로우 경이 놀라 입을 뻐끔댔다.

“……다, 다들 레아 피어트의 마법에 환호하는데 그 작전이 먹힐까요?”

“하나만 볼 줄 아는 놈 같으니.”

백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사람들은 강한 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만큼이나 모르는 힘도 두려워하기 마련이지. 미지의 강한 힘이 제 편이 아니라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깨닫는 순간 돌아설 것이다.”

“…….”

“너도 재판장에서 겪어 봤으니 알 게 아니냐. 환호가 비난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이야.”

트로우 경은 그제야 이해했다. 백작이 왜 이 건물 일층에 기름 따위를 가득 채워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아버지, 전부터 이 계획을 구상해 두셨던 겁니까?”

잠시 침묵했던 트로우 백작이 무겁게 속삭였다.

“황태자께서도 동의하셨다.”

“오켄 황태자가요?”

“망쳐서라도 손에 넣겠다는 뜻이시겠지. 제 힘도 감당 못 하고 사람을 죽이는 화염마법사라니…….”

백작의 주름진 입매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무리 피어트 공작가가 용을 써도, 얼마나 보호할 수 있겠느냐?”

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건너편 연구소의 이층에서 불꽃이 확 치솟았다.

두 부자는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아, 아버지…… 저게?”

“……황태자의 짓인가?”

백작이 외쳤다.

“당장, 당장 아래 대기한 놈들에게 움직이라 일러라! 지금이다! 지금 해치워야 해!”

❀ ❀ ❀

한편 헬릭스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뭔가…….’

뭔가 제 머릿속에 금이 간 기분이었다. 아즈라의 음성이 웅웅 울려 댔다.

‘네가.’

그 목소리가 무형의 힘이 되어 제 머릿속을 계속 내리치고.

‘드디어.’

망치질 같은 소리에 어딘가가 쩌적 갈라지며 기억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드래곤로드 아즈라…….’

멸망의 별이 시시각각 떨어지던 때에.

마지막 설득을 위해 찾아간 헬릭스를 봉인하며 아즈라가 했던 말들.

‘너는 실패한 수호자다.’

‘너는 진정 지키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말이 용언으로 하는 속박임을, 수호자로서의 제 힘을 봉인하는 마법임을 몰랐었다. 그때 아즈라가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

‘그 마음을 알아야 너는 진짜 수호자가 되리라.’

그 말이 제대로 기억났다.

‘그 마음? 그 마음이 뭐란 말인가? 진정 지키고 싶은 마음이란 건가?’

늘 수호자로서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해 온 헬릭스로서는 아즈라의 말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반듯한 이마가 구겨지고 있을 때였다.

“헬릭스 님!”

그에게로 달려온 자넷이 눈물범벅이 되어 외쳤다.

“공녀님을 구해 주세요! 공녀님이, 갑자기 불꽃에……!”

헬릭스의 몸이 그대로 뒤돌았다.

그 순간부터 그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어떻게 달렸는지, 자넷이 뒤에서 뭐라고 했는지, 주위에 누가 있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쓰러진 채 몸에서 불꽃이 솟구치는 레아만이 현실이었다. 헬릭스가 달려가 의식 잃은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불꽃이 제게 붙어 옷을 태우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제 품에 늘어져 안긴 이 여자만이 중요했다. 몇 번이고 껴안아도, 그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주는 이 여자가 무사해야만 했다.

“레아……!”

헬릭스가 타들어 가는 그녀의 드레스를 제 몸으로 가리며, 레아의 뺨에 볼을 비볐다. 화염에 휩싸였는데도 흰 뺨은 차갑기만 했다.

“제발 눈을 떠라.”

레아를 안고 있는데도 배 속이 공허하고 쓰라렸다.

울컥하는 감정이 배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목으로, 목에서 눈으로.

결국엔 머리까지 올라와 온통 쥐어뜯는 듯했다.

“레아, 제발.”

레아가 이대로 쓰러질 순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레아는 눈을 떠야 했다.

헬릭스가 터져 나오는 감정을 못 이겨 꽉 껴안을 때마다 그랬듯이, 팔을 둘러 그를 마주 껴안아야 했다.

제 의지가 가득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맞춰야 했다.

살아서.

살아서 그의 옆에 있어야 했다.

헬릭스가 온 힘을 다해 레아를 끌어안았다.

‘이 여자만은 지킬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그의 내부에서 뭔가가 무너졌다.

갑자기 둑이 터지듯 사방에 마나가 폭발했다. 레아의 몸에서 날뛰고 있던 아르카이크의 마나를, 둑 앞에 놓인 촛불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압도적인 양의 마나였다.

“으……!”

저절로 사그라든 불길 속에서 레아가 신음했다.

둑 앞에서 수압에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이 그녀를 꽉 내리누르고, 이어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헬릭스……!”

레아의 손이 구명줄을 잡듯 헬릭스에게 매달렸다. 그와 닿은 곳마다 벼락을 맞는 것 같았지만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레아!”

헬릭스가 놀라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떼려 하자, 그녀가 필사적으로 그를 껴안았다.

“이상해. 헉. 이상해!”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아이처럼 매달리는 레아를 헬릭스의 손이 쓰다듬었다. 그의 큰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나가……?”

❀ ❀ ❀

드르르……!

트로우 백작가의 사병들은 빠르게 기름통을 굴렸다. 통에서 새는 기름이 건물 벽면을 따라 도랑처럼 흘러갔다.

졸졸졸. 기름 냄새가 훅 풍기자, 사병들은 절로 멈칫했다. 지금 벌이는 짓이 어떤 짓인지 실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거 이래도 되나?’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는 있지만 선을 넘는 느낌에 그들이 주춤거렸다.

“뭐 하는 거야?”

뱀 기사단원들이 재촉했다.

“왜 멈칫거려? 죽고 싶어? 빨리 불씨를 던져!”

횃불을 들고 있던 사병이 급히 오른손을 움직였다.

“멍청아, 낮게 던져야지!”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병도 조심스레 몸을 낮추며 횃불을 던졌다. 화르륵. 기름 위에 붙은 불이 순간적으로 치솟았다.

“좋아. 이제 꺼질 일은 없겠…… 어?”

번쩍!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빛에 그들이 고개를 피하며 눈을 감았다.

“으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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