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바람과 불꽃이 작은 요정들처럼 춤추며 소녀의 몸 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곧 따뜻한 훈풍으로 변했다.
혈색이 돌아온 소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
“…….”
레아가 저도 모르게 소녀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얘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 고생이야.’
안쓰러운 마음 사이로 울컥하는 분노가 치밀었다.
‘우리는 잘못한 거 없이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데.’
어쩌다 얽혀 고생하는 작은 소녀에게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세세한 사정이 다를 뿐, 소녀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어쩌다 얽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법사가 된 게 아니던가.
‘잘못한 건 망할 트로우 놈들이랑 아르카이크 그놈인데.’
뱀 기사단을 풀어 추적을 방해한 것도, 무고한 이들에게 드래곤의 마나로 만든 비약을 먹이라 지시한 것도 놈일 텐데.
레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에 있었으면 멱살을 잡고 침을 뱉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
그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부름에 화답하듯이 머릿속이 거세게 울렸다.
[레아 피어트! 나의 마법사! 드래곤의 성녀여!]
레아의 몸이 후득, 허물어졌다.
“공녀님!”
비명 같은 외침이 귀에 들리는 것도 잠시, 그녀의 정신은 어딘가로 강하게 끌려갔다.
❀ ❀ ❀
‘감히, 감히!’
소년이 카랑카랑하게 외치며 발버둥 쳤다.
애써 짜낸 목소리엔 위엄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두려움 가득한 아이의 목소리일 뿐이었다.
‘끄, 끄흐윽.’
제 소리 같지 않은 울음소리가 돌벽을 타고 울렸다.
‘감히 황자의 몸에 손을 대다니!’
온 힘을 다해 외쳐 봤자, 달려드는 우악스러운 어른들의 손을 피할 순 없었다.
‘좀 가만있으라고.’
누군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소년은 바닥에 엎어져 제압당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굴욕감과 공포에 작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팔 제대로 잡고 있어.’
‘흐윽, 흑, 황자님…….’
‘등신아, 짜고 있을 거면 비켜.’
누군가를 밀친 이가 소년의 등을 무릎으로 누르며 손목을 잡아 바닥에 고정했다. 제 팔 쪽으로 다가오는 칼을 보고 소년이 도리질 쳤다.
‘시, 싫어! 싫어!’
버둥댈 때마다 차가운 돌바닥에 뺨이 긁혔다. 아프고, 무서웠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아바마마!’
‘아 좀, 가만히 있으라고.’
‘애 하나도 제대로 제압 못 하냐.’
기사들과 달리 서툰 손길들이, 오히려 소년의 팔에 여러 번 상처를 냈다.
‘으악!’
‘피, 피를 받아! 얼른!’
놈들은 소년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맥을 자를까요?’
‘미쳤어? 한 번 쓰고 시체 치울 거야?’
‘하긴, 진짜 드래곤 알이 반응할지도 모르니까 공급체를 살려 둬야죠.’
공급체.
태어나서 들은 말 중에 가장 끔찍한 말이었다.
가망 없는 황자. 빨리 태어난 것 외에는 쓸모없는 황자. 황실의 흔한 쓰레기.
잘못한 것 하나 없어도, 어미의 출신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저를 그렇게 불렀다.
그래도. 그래도 저는 황자였다.
황실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니 제값을 하라는 부황이 저를 이 미친 마법소굴로 밀어 넣었을 때에도 소년은 믿었다.
자신은 황자라고.
그런데 지금, 이렇게 굴욕적으로 엎드려 피를 뺏기며 ‘공급체’라고 불리고 있는 지금, 소년은 깨달았다. 제국에게도, 부황에게도, 이 마법학자들에게도, 자신은 가축 같은 존재라는 걸.
‘실험체가 깨어났다!’
알에서 깨어난 짐승이 처음 들은 건 그 소리였다.
그렇지만 더 신경 쓰이는 건 다른 감각이었다. 알껍데기에 붓다가 제 머리에도 뒤집어쓰게 된 뜨끈한 피.
기분이 이상했다.
‘그만해, 싫어!’
그 피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 어린 인간의 비명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갑자기 엄청난 통증이 밀어닥쳤다.
‘크오오!’
울부짖으며 떨치려 했지만 몸은 이미 구속구에 묶인 상태였다. 굵은 바늘로 심장을 찌른 인간이 중얼거렸다.
‘과연 드래곤하트…….’
‘이 피에 흐르는 마나가 얼마야?’
탐욕스러운 목소리들이었다.
죽여 버린다. 이 미천한 것들을 다 죽여 버릴 테다!
최강의 생명체인 드래곤이었다. 하찮은 인간들이 저를 이렇게, 제 도구처럼 취급하다니!
상처 난 자존심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어린 드래곤이, 가까이에 쓰러져 있는 어린 인간의 눈과 마주쳤다.
어린 인간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도 나랑 같은 처지구나.’
그 순간, 레아가 서 있는 공간이 바뀌었다.
사방이 붉게 타오르는 화염. 아르카이크가 꿈에 나올 때마다 보이는 그곳이었다.
레아의 눈이 흔들렸다. 혼란스러웠다.
‘뭐야, 방금 그건?’
실험체와 도구로서 고문당하는 어린 드래곤과 소년.
이런 건 그녀가 예상했던 게 아니었다. 보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알 수 있었다.
‘이건 설마……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의 과거인가?’
정말 믿고 싶지 않았지만 레아의 감은 이게 진실일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싫다고 계속 말하는 아르카이크 황태자의 말들. 그 말과 방금 본 과거의 광경이 닿아 있지 않은가.
‘오켄 황실 놈들, 애랑 드래곤한테 무슨 미친 짓들을 한 거야?’
소름 끼쳐 하던 그녀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헬릭스는 아르카이크 황태자가 드래곤이라고 했는데.’
지금 본 기억은 뭔가 달랐다.
‘그럼 드래곤의 기억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황자의 기억도 함께 있지?’
❀ ❀ ❀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는 조용히 분노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드래곤의 성녀라는 자신의 마법사.
‘드래곤의 성녀라면, 드래곤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게 아닌가.’
현실은 반대였다. 제 마법사의 마나는 다른 마나로 채워져 점점 더 그와의 연결이 희미해지며, 저를 떠올리는 일조차 별로 없었다.
‘레아 피어트.’
초조했다. 이대로 놓치고 마는 것인가.
결국 제게서 벗어나 헬릭스인지 뭔지 하는 그놈과 찰싹 붙어서, 저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도록 놔둬야 하는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그대로 페이런으로 달려가 납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헬릭스라는 그놈이 수호자라면 소용없는 일.
‘한 번만.’
황태자는 거미줄을 쳐 놓은 거미의 심정으로 기다렸다.
네가 나를 생각하면. 걸리기만 하면. 그때는 온 힘을 다해 너를 낚아채리라.
❀ ❀ ❀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그를 떠올렸을 때. 아르카이크는 망설이지 않고 레아를 제 의식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너무 힘이 과했던 것일까.
레아의 의식은 그가 깊이 묻어 놓았던 의식 심층부, 가장 쓰라린 기억으로 향했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굴욕적인 과거를 들키고 만 것이다.
성큼.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다가가는 아르카이크의 발걸음은 급했지만, 생각은 무겁고 혼란스러웠다.
그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레아의 팔을 낚아챘다. 놀란 그녀가 팔짝 뛰었다.
“놔……!”
평소보다 반응이 느렸다. 아르카이크는 검은 눈동자로 레아를 내려다봤다.
“봤나?”
“…….”
레아의 눈동자에 자신이 비쳤다. 위험하게 번들대는 눈빛을 한 사내가 그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레아가 차마 도리질 치지 못하고 자신을 쳐다보았다.
“봤군.”
그가 짓씹듯 말했다.
“……네가 본 것과 함께 사라져라.”
아르카이크가 레아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큽!”
갑자기 목을 조르는 압력에 그녀가 숨을 멈췄다. 새빨갛게 부푼 얼굴로 버둥대는 레아를 보며 아르카이크는 갈등했다.
이대로 죽일까. 죽여 버릴까.
죽이고, 하찮고 증오스러운 인간들만 있던 세상으로 다시 돌려놓을까.
“쿨럭!”
“늘 다짐하지.”
아쉬운 듯 아르카이크가 속삭이며 그녀의 목줄기를 손으로 훑었다. 오도도 돋는 소름을 그의 손톱이 긁어내렸다.
“너를 보기 전에는.”
아르카이크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널 죽이겠다고.”
죽이면 흔들리지도 않으리라.
“널 보기 전에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늘 널 보고 죽일 거라고 다짐한단 말이야.”
그가 입술을 레아의 귀 끝에 붙였다. 차가운 뱀 같은 감촉이었다.
“어리석은 짓이지.”
황태자의 매끈한 얼굴에 조소가 걸렸다.
그랬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은 활활 타오르며 그를 재촉했다.
이 여자를 잡으라고. 이 여자의 밝은 빛을 손에 넣지 않으면 너는 파멸이라고.
“이제 알겠어. 네가 드래곤의 성녀여서 그랬던 거야.”
“…….”
아르카이크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구해 달라고 말해.”
그가 속삭였다.
“고통받는 인간들을 구해 달라고 말해.”
앙다물려 있던 레아의 입술이 열렸다.
“……말하면, 들을 거야? 사람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크흐흐.”
아르카이크가 몸을 말며 웃음을 뱉었다. 제 속이 까발려진 자 특유의 시원하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래, 난 사람이 싫다.”
황태자의 검은 눈 속에 금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와 내 맹약자에게 그런 짓을 한 인간을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지?”
“……좋아하진 못해도 놔둘 수는 있잖아.”
레아의 말에 아르카이크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기엔 내게 너무 많은 잘못을 했지.”
“잘못한 인간들이랑 네가 해친 인간들은 다르잖아.”
“과연 다를까?”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가 시니컬하게 뱉었다.
“인간은 결국 다 비슷하다. 주제를 모르고 큰 힘을 탐하고, 건방지지.”
“…….”
아르카이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렇지만 네가 구해 달라고 하면 구해 주겠다.”
“……네가 한 거잖아.”
아르카이크의 눈에 금빛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뭘 말이지?”
“가짜 약. 독감. 비약.”
또박또박 읊는 레아의 말에 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고 해도 병마를 좌지우지할 순 없어.”
“……넌 드래곤이잖아.”
아르카이크의 눈이 변했다.
“너라니.”
검은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변했다. 사나운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알았으면 나의 로드라고 해야지.”
압박감에 숨이 막혀 오는 레아의 목을 아르카이크가 잡아 올렸다.
“버릇이 없군.”
너를 마법사로 깨운 것도. 네 혈관을 채운 마나도. 내 힘인데.
아르카이크의 생각이 그대로 레아의 뇌로 꽂혀 왔다.
“네 능력이라 생각했나?”
그의 손에서 일어난 불길이 조롱하듯 그녀의 머리끝을 태웠다. 화염이 뱀의 혀처럼 그녀에게 달라붙어 옷깃과 머리끝을 조금씩 살라 먹어 갔다.
“놔……!”
몸을 비트는 레아를 꽉 붙들며, 아르카이크가 그르렁댔다.
“나의 로드라고 불러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