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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95)화 (95/120)
  • 95화

    두근. 두근. 두근.

    맥이 뛸 때마다 온 혈관이 심장처럼 마구 날뛰었다. 배 속이 숯을 품은 듯 타오르고, 근육이 제 것이 아닌 양 꿈틀댔다.

    레아는 헬릭스의 상태도 눈치채지 못하고 종알댔다.

    “정말 생각할수록 화나네. 엘프 아니라 엘프 할아버지들이라도 다시 만나면, 그 잘난 콧대를 꽉 꼬집어 주자…… 읍?”

    종알대는 그녀의 입술을, 헬릭스가 급하게 삼켰다.

    평소 부드럽고 배려 가득하던 입맞춤과 달리 목마른 듯 달라붙는 키스였다. 그녀를 다 빨아들일 것처럼 거센 키스에 레아는 그대로 휩쓸렸다.

    “자, 잠……!”

    숨이 막히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레아가 주먹으로 헬릭스의 가슴과 어깨를 다급하게 때렸다.

    헬릭스는 그제야 잠시 입을 떼고 그녀를 쳐다봤다. 여유라곤 하나도 없는 눈빛이었다.

    “레아.”

    갈라지는 목소리로 부르는 자기 이름에, 레아의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에 오롯이 그녀만이 담겼다.

    “레아.”

    목줄을 푼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 표정으로, 헬릭스의 뜨겁고 긴 손가락이 악기의 현을 누르듯 레아의 등줄기를 더듬어 왔다.

    오싹한 감각에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열기에 전염되는 몸이 바르르 떨렸다.

    “헬릭스…….”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난폭하고, 그녀의 숨도 몸도 다 가둘 것처럼 덮쳐 오지만 두렵지 않았다.

    “레아.”

    헬릭스가 속삭였다.

    “나는 널 못 놓는다.”

    그를 잡은 레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놓지 마.”

    “네가 날 가지게 하고 싶었다. 내가 아니라, 레아 네가. 그러면 네가 날 좋아하게 되고 결국엔 싫증 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헬릭스가 그녀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았다.

    “그렇지만 이제 못 놓는다.”

    “늦어.”

    레아가 타박했다.

    “어쩔 수 없는 게 어딨어? 왜 보낼 생각부터 해?”

    “난 수호자고, 넌 드래곤의 성녀가 아닌가.”

    “난 레아 피어트고, 넌 헬릭스잖아.”

    레아가 헬릭스에게 몸을 밀착했다. 가두듯 양팔을 벌려 그를 잡은 그녀가 말했다.

    “늦었으니까 지금부터 못 나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감옥이었다.

    행복한 죄수가 된 헬릭스가 레아와 눈을 마주친 채 천천히 입술을 붙였다.

    “계속 네 것인가.”

    그리고 너 또한 나의 것인가.

    이 체온도.

    이 떨리는 몸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이 시선도.

    “응. 놓지 마.”

    그런 그녀를 꽉 끌어안는 순간, 헬릭스는 전신이 터져 나갈 것 같은 충만함을 처음 느꼈다.

    그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딱지들, 메마르고 얼어붙은 줄 알았던 감정들.

    그 모든 마음속 균열들에 레아가 들어찼다.

    그때였다.

    [네가.]

    머리가 핑 돌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조금 전까지 느끼던 벅찬 심장박동과는 다른, 뭔가 터진 느낌.

    [드디어.]

    익숙한.

    익숙한 목소리.

    “……아즈라?”

    ❀ ❀ ❀

    아르카이크는 이황녀를 추적하던 부하에게서 뜻밖의 보고를 들었다.

    “남부사막에 드래곤을 섬기는 마을이 있다고?”

    “예. 드래곤에 대한 전설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부하가 가져온 자료를 읽어 보며 속으로 전율했다. 인간에 의해 멸종당했을 거라 여긴 선조들의 유산이 남아 있다니.

    ‘……이건?’

    그런데 그 전설들의 내용은 아르카이크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인간들에게 습격당했다, 배신당했다,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인간들을 배신한 이야기들이 더 많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자료를 헤집던 그의 손가락이 한 대목에서 멈췄다.

    <……그리하여 드래곤로드와 마탑주가 합의하여 엘프 중에 수호자를 세웠으니. 이 수호자는 마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드래곤과 마법사들에게서 마나를 압수할 권능을 가진다.>

    마나를 압수한다니.

    갑자기 레아를 납치하려 했을 때 헬릭스가 보였던 능력이 생각났다.

    아르카이크는 집중해서 수호자에 대한 내용들을 훑었다. 눈치를 보고 있던 부하가 말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 전설들이 단순히 전설이 아니라고 자부하더군요. 실제로 드래곤의 성녀도 나타났다고 합…….”

    “드래곤의 성녀?”

    생각지 못했던 단어에 아르카이크가 반응했다.

    “예. 그게 얼마 전에 그 마을에 나타났답니다!”

    부하가 빠르게 설명했다. 촌장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였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성녀가 나타나리란 계시를 받아서 기다렸는데 진짜로 사막에서부터 귀해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백금발에 푸른 눈의 엄청난 미인이었는데, 대대로 내려온 드래곤로드의 지팡이를 받고, 지팡이에게서 성녀로 인정받았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아르카이크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백금발에 푸른 눈의 엄청난 미인이라면 생각나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레아 피어트……?!’

    그의 표정을 잘못 해석한 부하가 얼른 덧붙였다.

    “진짜랍니다. 성녀가 드래곤로드의 지팡이를 받아 힘을 쓰니 오아시스가 다시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촌장이 이상한 말도 했습니다.”

    이어진 말에 아르카이크는 얼굴을 굳혔다.

    “성녀가 드래곤 알들을 가져갔다고…….”

    ❀ ❀ ❀

    헬릭스가 약 창고에서 ‘아즈라’라고 내뱉은 뒤 레아는 한동안 저기압이었다.

    둘이 좀 더 깊이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로 꽉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다른 이름을 불러 댔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가 미간을 콱 찌푸리며 이름을 말하기도 했고, ‘갑자기 아즈라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고 한 걸 보면 봉인이나 그런 것 때문인 듯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야.’

    그녀는 속으로 헬릭스의 타이밍 센스를 욕하며 비약 환자들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병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타다다닥.

    급한 발소리가 들리며 간호하러 파견된 하녀들이 병실에서 뛰어나왔다. 그녀들은 얼마나 급한지, 레아에게도 경황없이 고개만 숙이고는 내달렸다.

    “왜 저러지?”

    병실에서 다른 하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바싹 마른 물수건을 잔뜩 손에 쥔 채였다.

    “자넷, 좀 도와줘!”

    “응!”

    자넷을 부르는 목소리도 급했다. 레아는 병실로 다가갔다.

    안에 있던 하녀들이 레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 죄송합니다. 지금 급해서요.”

    “무슨 일인데?”

    하녀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환자들이 단체로 열이 오르고 있어요.”

    레아도 얼른 병실로 들어섰다. 병상 가득한 환자들이 하나같이 열에 끓는 얼굴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왜 갑자기들 이러지? 의사는?”

    “방금 부르러 갔습니다. 저희도 원인을 모르겠어요.”

    다들 열이 펄펄 끓는데 물수건을 얹어도 그때뿐이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공녀님!”

    하녀가 모시고 온 의사는 마침 레아의 주치의였다. 그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보고 레아도 빠르게 물었다.

    “주치의, 내가 이런 증상일 때 어떻게 했어?”

    “그야 일단 열부터 내렸지요. 고열이 너무 오래 계속되면 큰일 납니다. 저랑 자넷이랑 다른 하녀들도 달라붙어서 아가씨를 수시로 얼음물에 적신 무명으로 닦았습니다. 그러다 너무 체온이 떨어지실까 봐, 얼음물로 닦고 나선 꼭 보드라운 린넨으로 물기를 말렸고요.”

    “찬물이나 얼음으로 체온을 내려야 한다는 거네.”

    레아가 입술을 씹었다.

    그녀 한 사람에게 몇 명이 매달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방법이었다. 지금은 환자가 훨씬 많고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바람은?”

    “예? 바람이요?”

    “지금 겨울이니까 창문을 열면 바로 실내온도가 내려갈 거 아니야.”

    “공녀님, 사람 몸이라는 게 생각보다 예민합니다.”

    주치의가 손을 저었다.

    “겨울바람이 얼마나 매서운데요. 열 좀 내리려다가 오히려 감기 걸리게 하고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으음…….”

    레아가 골똘히 생각했다. 열을 내리는 것도 주의해서 적당히 해야 한다는 건가.

    “그럼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적당한 바람이면 되는 거지?”

    “예? 예, 그야…… 괜찮지 않을까요?”

    “자넷.”

    레아가 명령했다.

    “몇 명이 같이 가서 찬물을 많이 가져와.”

    자넷과 하녀들이 찬물을 날라 오자, 레아는 침대 시트를 잔뜩 꺼내 물을 적셨다. 그리고 젖은 시트를 환자들에게 덮었다.

    “아, 아가씨. 뭘 하시려고요?”

    “보면 알아.”

    그녀가 손을 뻗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지팡이 가져올걸.’

    연구소와 병실에서 마법 쓸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다음부턴 늘 가지고 다녀야겠어.’

    언제나 준비된 마법사가 되어야지. 훗날을 다짐하며, 레아는 정신을 집중했다.

    ‘일단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녀의 손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초가을 저녁에 부는 것처럼 시원하고 마른 바람이었다.

    바람은 젖은 시트에서 습기를 빨아들이며 병실 안을 휘돌았다. 물이 마르면서 자연스레 열기를 빼앗긴 환자들의 피부가 서늘해졌다.

    “열이…… 내렸어요!”

    “살았다!”

    하녀들이 환자들의 체온을 재며 놀라워했다. 레아가 그들을 지휘했다.

    “또 열이 오를지 모르니까 얼른 시트를 수거해 놔. 얼음물도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공녀님!”

    레아가 시키니 따르긴 하지만, 내심 무얼 알까 회의적이던 하녀들이었다. 공녀님으로 존경스러운 것과 실무를 제대로 알고 지시하는 건 다른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마법으로 환자들의 열을 내릴 줄이야. 과감하면서도 실용적인 발상에, 하녀들의 눈에 확신이 어렸다.

    ‘공녀님은 역시 믿고 따를 만한 분이시구나!’

    ‘자넷이 만날 우리 공녀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어!’

    하녀들이 공통된 생각을 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주치의도 열심히 환자들을 살폈다.

    “공녀님, 이쪽 환자는 너무 체온이 떨어진 거 같습니다!”

    주치의의 말에 레아는 급히 환자의 병상으로 다가갔다.

    어린 소녀 환자가 입술이 파래져서 떨고 있었다. 레아가 얼른 작은 불꽃과 바람을 동시에 일으켰다.

    “세상에!”

    이쪽을 보고 있던 하녀들이 저도 모르게 놀라 감탄했다.

    화염마법사이신 줄만 알았는데 바람까지 쓰시더니, 아예 두 마법을 동시에 하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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