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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94)화 (94/120)
  • 94화

    “하지만 그때는 헬릭스가 나 한 명한테 삼 일이나 집중해서 살려 냈다며. 그 방법으로 이 많은 환자들이 감당되겠어?”

    그가 생각에 잠겨 날렵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동안 수호자의 능력을 많이 되찾아서, 한 번에 몇 명 정도는 치료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그렇다. 적당한 약초를 쓴다면 더 도움이 되겠는데.”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바로 행동으로 나섰다.

    “그럼 바로 약 창고에 가 보자.”

    ❀ ❀ ❀

    약 창고는 햇빛이 들지 않는 서늘하고 어두운 방이었다. 말이 방이지 거의 서민들의 집 한 채만 한 크기에 헬릭스는 놀란 눈치였다.

    “취급하는 약이 많아질수록 재료도 많이 필요해서.”

    “그래도 이렇게 구하고 잘 유지하는 게 놀랍군.”

    감탄하던 그가 얼른 레아의 손을 잡았다.

    “어두우니 조심해라.”

    퐁.

    손바닥을 간질이는 감촉에 그녀가 풋 웃었다.

    “어두운 걸 조심하라면서 마나는 왜 넣어 주는 거야?”

    “레아 네 마나가 많아져야 빨리 대마법사가 되지 않겠나.”

    “날 그렇게 빨리 대마법사 만들고 싶어? 그래서 나한테서 계약자 졸업하려고?”

    놀리는 듯한 레아의 말에 헬릭스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대마법사가 되어야 네가 더 건강하고 안전해지니까.”

    그가 그녀에게 또 마나를 넣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나 총량을 늘려서 희석시키면 아르카이크의 마나도 옅어질 게 아닌가. 그러면 연결도 약해질 거다.”

    “그래서 요즘 나한테 마나를 자주, 많이 주는 거였어? 아르카이크한테서 나 지키려고?”

    헬릭스가 시선을 피했다.

    “……쿠앙이가 어려서 아직 마나를 받을 수 없지 않나.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가 중얼거리듯 이실직고했다.

    “네가 그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싫다.”

    정직한 말에 뺨이 달아올랐다.

    이 어둠 속에서 헬릭스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당장 확인하고 싶은 기분을 누르며, 레아는 부러 가볍게 되물었다.

    “드래곤이라서?”

    “…….”

    “헬릭스 너 드래곤 싫어하잖아.”

    헬릭스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게 아닌 거 알잖나.”

    그의 손가락이 레아의 손목을 얽듯이 감쌌다. 단단한 손길이 느껴졌지만 레아가 시큰둥한 척 말했다.

    “모르겠는데.”

    “…….”

    “드래곤이 싫다고 처음에 나도 막 경계하고, 의심도 하고 그랬던 거 같은데.”

    “……경계를 하려고 했었지.”

    헬릭스가 한숨처럼 말했다.

    “레아 네 앞에선 모두 부질없었지만.”

    “…….”

    이번엔 레아가 말을 잃고 헬릭스를 쳐다봤다.

    “레아 너는…… 나를 무장 해제되게 만든다. 내가 오랜 세월 입고 있던 것들, 가치들, 전통의 갑옷들. 네 앞에선 모두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게 만든다.”

    퐁.

    그의 느릿한 손길을 따라 마나가 흘러들어 왔다.

    “내 욕심인가.”

    “…….”

    “레아, 마법사로서 네 몸을 채우는 마나가 필요하다면.”

    그가 속삭였다.

    “내가 널 채웠으면 좋겠다.”

    꼴깍. 레아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차마 하지 못하고 삼킨 말들이, 손의 열기를 타고 들리는 듯했다.

    네가 날 변하게 했다고. 네가 날 채웠다고.

    그러니 너 또한 나로 채워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녀가 홀린 듯이 입술을 떼었다.

    “……네 얘기를 해 줘.”

    레아가 소곤댔다.

    “네가 오랜 세월 입고 있었던 것들, 네가 중요시하던 전통들, 네가 지키려던 가치들.”

    그녀가 헬릭스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뺨을 만졌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지만 부드러움보다는 남자다움이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이제 부질없는 것들이다.”

    “아니야. 왜 부질없어. 그게 다 넌데.”

    레아의 말에 헬릭스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뺨 위로 내려온 그의 긴 은발을 넘기며, 레아가 속삭였다.

    “멋진 수호자님이잖아.”

    헬릭스는 피식 웃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예전에 얘기했던 게 다다. 미친 마법사들과 드래곤들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수호자는 애초부터 엘프에게 어울리는 직책이었던 것 같다. 인간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음…… 엘프가 기준이라면 헬릭스도 충분히 엘프랑 비슷한데.”

    “어디가 말인가?”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 아니잖아. 난 처음 봤을 때 엘프인 줄 알았어.”

    “아니다. 난 인간 출신이다.”

    단칼에 대답한 헬릭스가 미심쩍어하는 레아의 뺨을 만지작댔다.

    “레아 너도 인간이지만 이렇게 예쁘지 않나.”

    ❀ ❀ ❀

    그렇게 말하며 웃는 헬릭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눈부셨다. 레아는 애매한 기분이 되었다.

    탈인간급 엘프급 미모의 남자친구가 저더러 예쁘대요.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거 맞지?’

    생각해 보니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레아는 헬릭스의 마음의 눈을 믿어 보기로 했다.

    ‘뭐, 헬릭스 눈에는 내가 제일 예쁜가 보지!’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뿜뿜 솟아났다.

    “내가 좀 예뻐.”

    “좀 예쁘다니.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헤헤.”

    레아가 헬릭스의 큰 손에 뺨을 비볐다.

    헬릭스가 멈칫하다가 그녀를 끌어안으려 하는데, 레아가 발딱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헬릭스 넌 엘프가 아닌데 수호자가 된 거지? 어떻게 됐던 거야?”

    “……엘프들이 다른 대륙으로 떠나기로 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었다.”

    다음 대의 수호자 자질을 지닌 인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이다.

    “그게 헬릭스 너였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리 났겠네? 고향에서 막 잔치하고 그러지 않았어?”

    “아니다.”

    헬릭스가 쓰게 웃었다.

    어린 그에게 어느 날 찾아온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엘프들.

    그들은 수호자의 일이 얼마나 세상을 위한 일인지,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적인 직책인지 말했다.

    “마나의 능력 때문에, 나는 내가 대마법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엘프들의 말에 그들을 따라나섰지.”

    “그 엘프들 나쁜 놈들이네.”

    레아가 중얼거렸다.

    “애한테 영웅심리 자극해서 꼬드기다니. 분명 열정페이 강요하는 놈들일 거야.”

    “열정페이?”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좋은 일인데 어쩌고 하면서, 월급도 제대로 안 주고 열정만 강요하는 놈들 말이야.”

    “하하.”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헬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는 엘프 스승님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가 과거를 떠올렸다.

    드래곤과 대마법사들에게서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어린 헬릭스는 꿈을 품었다.

    그렇게 강한 이들에게서 약자를 보호하고 좀 더 평화롭고 공평한 세상에 이바지할 꿈이었다.

    “세상에. 무슨 어린애가 그렇게 착해? 역시 헬릭스는 어릴 때부터 도덕책이었구나?”

    “그 시대엔 워낙 힘센 이들이 힘없는 이들을 막 대했다. 지나가던 동네 아이가 술 마신 기사한테 머리채 잡히고 그대로 맞고 쓰러져 죽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었지.”

    그런 시절에 눈에 띄게 아름답고 힘 있는 아이였던 헬릭스. 그는 제 힘을 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수호자’라는 이상적인 직책이 주어진 것이다.

    ‘누군가를 지키고 돕는 일도 신중히 해야 합니다. 도울 힘이 있다는 건 막중한 책임 또한 따르는 일입니다.’

    어린 헬릭스는 그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매번 혼났다.”

    “왜?”

    “토끼가 늑대에게서 도망치게 도와줬으니까.”

    “그게 혼날 일이야?”

    “그렇게 하면 자연의 균형이 깨진다고 했다. 수호자의 사명은 균형을 지키는 방향으로, 세상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그가 씁쓸히 덧붙였다.

    “스승님들은 역시 인간이라 진정한 공정함을 모른다고 하셨지.”

    “뭐?”

    레아는 분개했다.

    “이 귀 긴 놈들이 왜 애를 데려다 놓고 가스라이팅질이야?”

    “가, 가스라이팅……?”

    “그런 게 있어! 후려치고 돌려 치고 깎아내리고 기죽이는 거!”

    “그런 거라면 엘프들만 했던 것도 아니다.”

    수호자가 된 후에도 드래곤들은 툭하면 ‘뭐? 인간 수호자?’ 하고 무시하고 거부했다. 마법사의 탑에서도 인간 마법사들은 그에게 비딱한 시선을 보냈다.

    ‘인간인 너는 우리의 편의를 더 봐줘야 하지 않겠냐?’

    ‘지가 우리와 뭐가 다르다고 고고한 척 위선 떨고 있어?’

    헬릭스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세상에 썩을 놈들. 아, 이미 썩었겠구나.’

    레아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를 꼭 안아 주었다.

    떠올려 보면 헬릭스의 자기절제에는 좀 과한 구석이 있었더랬다.

    ‘게다가 가끔 말하는 거 들으면, 배신도 여러 번 당한 눈치였어.’

    모두 자신을 못마땅해하고 트집 잡는 와중에 꿋꿋이 커서, 배신까지 여러 번 당했다면, 지나치게 경직된 바른생활맨이 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트집 잡히지 않으려고.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서 얼마나 애를 써 왔을까.’

    게다가 그런 과거를 가졌으면서 헬릭스는 여전히 약자를 배려하는 인성을 잃지 않았다.

    ‘진짜 강하고 멋진 사람이야.’

    레아가 새삼 반해서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내게 실망했나.”

    “네?”

    “레아 네게 늘 수호자라고 말해 놓고, 이렇게 허점투성이인 반쪽 수호자라니.”

    “아니, 누가 반쪽이야? 누가 그래?”

    레아가 저도 모르게 왈칵 성을 냈다.

    “엘프 놈들이 그랬어? 그 귀만 긴 공감능력 제로 놈들은 신경 쓰지 마! 아니면 드래곤이 그랬어? 그놈들은 쿠앙이 빼고 원래 도마뱀들인 거 너도 알잖아!”

    “도, 도마뱀…….”

    생각지 못한 표현에 헬릭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깨물었다.

    “그리고 뭐, 허점 좀 있으면 어때? 허점을 보완하려고 하는 자세가 멋진 거지.”

    “그런가.”

    “응. 너무 완벽하려고 할 필요 없어.”

    그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너를 취급 안 하는 놈들을 위해서는 더더욱. 뭐 하러 그런 놈들 기준까지 맞춰 줘?”

    레아는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헬릭스를 마주 봤다가, 갑자기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그녀가 그의 팔에 얹힌 손을 꼼질대며 말했다.

    “내 눈에는 이미 완벽하지만.”

    쿵.

    헬릭스의 심장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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