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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93)화 (93/120)
  • 93화

    페이런의 수도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거 사람 수십이 쓰러졌다는 얘기 말이야.”

    “아, 그 술집에서 사람들 죽어 나간 거?”

    “아직 죽진 않았다던데…… 아주 난리라며? 고열에, 정신도 놓고…… 그거 전염병 아닌가 몰라.”

    “여름도 아니고, 이 겨울에 무슨 다른 전염병이 돌겠어? 독감이라면 모를까. 난 기침 소리 안 끊기는 게 더 무섭구먼. 약도 못 구하는데, 이놈의 독감은 언제 잡힐지.”

    다른 치가 끼어들었다.

    “그게 그렇게만 볼 일이 아니래요. 항구 술집 말고도 요즘 여기저기서 그렇게 쓰러진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던데.”

    “허어?”

    “무슨 자작가에서도 자작부인부터 하인까지 다들 그러는 모양이고요, 저기 다리 옆에 광장 근처 술집에서도 그렇다고 하고요. 요즘 아주 쑥대밭이에요, 쑥대밭.”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상하다고 느꼈다.

    한순간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쓰러져 똑같은 증상에 시달리다니. 하다못해 같은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도 그 자리에서 다들 쓰러지진 않을 텐데.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거 병이 아니라 다른 거 아닌가?”

    “다른 거 뭐?”

    “독이라든지…….”

    그럴 법했다.

    그러잖아도 요즘 가짜 빨간 감기약에 독을 넣어서 파는 통에, 약들이 판매 중지되었으니까.

    누군가 소심하게 반박했다.

    “에이, 독이야 귀족 나리들한테나 쓰는 거지…… 우리한테 그거까지 쓸 일이 뭐가 있다고?”

    “나쁜 놈들이 하는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맞아요. 빨간 감기약을 귀족만 사 먹었던 것도 아닌데 그랬잖아요?”

    사람들은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이딴 짓을 벌이는 걸까?

    역시 모두가 짐작하는 대로 트로우 백작가인 걸까? 그렇다면 왜 아직 범인을 못 잡는 걸까?

    ❀ ❀ ❀

    레아도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그녀가 부르짖었다.

    “이 트로우 잡놈들을 잡을 수 있는 건데!”

    약 판매를 멈췄으니, 일을 꾸민 트로우 놈들도 흔적을 지우고 숨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속은 쓰렸지만 계속 헛발질하는 것보단 나으리라 여겼는데 놈들은 반대로 나왔다. 아예 대놓고 독을 뿌려 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독을 가짜 약에 숨기지도 않잖아? 이놈들이 진짜 미쳤나?”

    루얀이 물었다.

    “이렇게 대놓고 하면 차라리 추적하긴 쉽잖냐?”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치의가 퀭해진 얼굴로 설명했다.

    “이번 독에 당한 이들에게 공통적인 증상이 있습니다. 고열에 의식불명, 그리고 온몸의 맥이 날뛰는…….”

    듣고 있던 루얀과 리케일의 얼굴이 굳었다.

    “그거, 우리 레아가 지난번에 겪었던 그 증상 아니냐.”

    “그렇습니다. 볼수록 증상이 똑같아요.”

    주치의가 말했다.

    “놈들이 비약을 사람들한테 먹인 게 분명합니다.”

    트로우 백작 쪽에서 일을 꾸몄을 거란 확신이 사실로 땅땅, 못 박히는 순간이었다.

    “이것들이 진짜 미쳤나…….”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그렇게 중얼거리는 루얀이었다. 목소리에 담긴 위협적인 기세는 레아보다 훨씬 흉흉했지만.

    카라이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백 명 넘게 쓰러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우리 연구소에 딸린 병실에서도 서른 명쯤 받았는데, 더는 수용할 수가 없어.”

    “저, 제가 보기엔 말입니다.”

    카라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트로우 백작도 평소에 이 정도로 많은 비약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놈도 제국에서 받아서 일하는 거라서요.”

    트로우 백작 쪽에서만 이렇게 준비하고 일을 벌일 순 없다는 소리였다. 카라이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생각에 잠겼다.

    리케일이 말했다.

    “하긴, 트로우 가문의 힘만으론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 비약을 뿌릴 수는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오켄 황태자가?”

    “아마도 그렇겠지.”

    레아는 분노했다.

    “이 도마뱀 새끼가 진짜!”

    헬릭스는 그런 레아를 걱정스레 내려다봤다.

    최강의 힘과 지혜를 지닌 드래곤.

    그렇지만 어린 드래곤은 그리 현명한 존재가 아니었다. 최강의 생명체답게 욕망과 힘이 넘쳐나는데 제어할 줄 몰랐으니까.

    특히 어린 드래곤들의 제 마나, 제 마법, 제 마법사에 대한 소유욕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르카이크 오켄…… 다른 인간들 앞에선 의젓하고 냉혹한 황태자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레아에겐 자기를 거부하는 게 납득이 안 간다는 식으로 행동했으리라.

    ‘그놈이 이번에 네게 어떤 식으로 나올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레아와 아르카이크는 드래곤의 마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헬릭스가 애를 써서 마나의 농도를 낮춰 놔도, 아주 끊어지진 않았던 것이다.

    ‘당분간 내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게 좋겠다.’

    ❀ ❀ ❀

    그렇지만 헬릭스가 레아를 계속 지켜보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미 병상을 꽉 채운 수십 명의 환자들과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 시약들.

    연구소에서 레아 옆에만 붙어 있기엔 그가 너무 유능했던 것이다.

    “헬릭스 님, 이 약물 배합이……!”

    연구원 하나가 귀신같이 알고 쫓아왔다.

    병실 쪽에 잠깐 레아 얼굴이라도 보러 왔던 헬릭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레아가 그의 팔을 두드리며 다독였다.

    “가 봐야겠다.”

    헬릭스가 약하게 한숨을 쉬며 레아의 손을 꼭 잡았다.

    포포퐁.

    뜨거운 손끝에서 마나가 많이 건너왔다. 손바닥이 간질거리고, 그와 이어진 곳부터 몽실거리는 기분에 레아가 배시시 웃었다.

    “…….”

    헬릭스는 손을 잡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발이 안 떨어졌다.

    포퐁.

    헬릭스가 괜히 마나를 또 건네며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이따 또 오겠다.”

    자기가 훨씬 더 무리하고 있으면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멀어지는 그였다.

    ‘귀여워…….’

    다른 이들 머리 위로 올라오는 큰 키와 체격으로 이쪽을 자꾸 돌아보며 가는 모습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네? 귀엽다고요? 저 얼음 엘프왕 같은 외모 어디가요?’라고 했겠지만, 레아의 눈에는 자신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게 귀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돌아보는 얼굴도 너무 잘생겼어.’

    레아가 잡고 있던 양손을 저도 모르게 비틀었다. 이러고 있지 않으면 옆에 있는 아무라도 붙잡고 우리 헬릭스 잘생기지 않았냐고 주접을 떨 것 같았다.

    슬그머니 레아 옆으로 다가온 자넷이 말했다.

    “어후, 저 눈빛 좀 보세요. 공녀님 보는 시선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요.”

    “그치? 우리 헬릭스 너무 근사하게 생겼지? 이건 반칙이야. 어떻게 저 얼굴에서 저렇게 녹는 눈빛이 나오지?”

    자넷의 표정이 썩었다.

    “공녀님…… 지금까지 자랑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으셨대요?”

    “내가 그래도 사회적 예의가 있는 사람이야. 지금 여기서 애인 자랑하고 있을 순 없잖아.”

    애인. 제가 말해 놓고도 간지럽고 뿌듯해서 레아의 뺨이 달아올랐다.

    “이미 충분히 자랑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아니거든? 엄청 자제하고 있는 거거든?”

    “예, 예.”

    자넷이 영혼 없이 대꾸했다. 실눈을 뜨고 봐도 레아는 티 나게 분홍색 기류를 뿜고 있었으니까. 흐물거리는 표정에 이미 다 쓰여 있었다.

    ‘우리 헬릭스는 왜 멋지기만 하죠. 왜 모자란 데가 없죠? 왜 귀엽고 잘생기고 다정하고 다하죠?’

    자넷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설레어서 발그레해진 뺨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절세미인이라니, 반칙이었다.

    ‘헬릭스 님이 진짜 괜찮은 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녀님이 더 아까웠다. 자넷이 저도 모르게 불퉁하게 말했다.

    “그래도 헬릭스 님은 제 취향은 아니에요.”

    “그, 그래? 왜?”

    “너무 점잖으시잖아요. 저는 좀 짐승처럼 저돌적인 남자가 좋은데.”

    “아니거든? 헬릭스도 가끔 완전 으른스럽게 박력 넘치거든?”

    자넷의 얼굴에 못 믿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손도 아껴 잡는 게 티 나는 헬릭스 님이 박력?

    ‘역시 아가씨도 콩깍지가 단단히 쓰이셨다니까.’

    자넷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아가씨 눈에 헬릭스 님은 완벽하시겠지요. 그럼요.”

    레아는 어쩐지 좀 억울했다.

    ‘아니, 진짠데!’

    필립 칼로시 같은 애들이 덤비는 커튼 찢기 같은 게 아니라, 은근슬쩍 긴장이 풀어진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훅 들어오는 게 얼마나 살 떨리게 자극적인데.

    ‘우리 헬릭스가 그쪽으로 얼마나 심장에 해로운데!’

    헬릭스의 갈라진 낮은 목소리. 델 것 같은 큰 손. 감겨 오는 긴 손가락. 뜨거운 숨.

    부드럽게 삼켰다가 어느 순간 정신 차리면 몰아치고 있는…….

    ‘으악! 그만! 그만!’

    레아가 제 뺨을 타다닥 때렸다.

    ‘지금 독 환자에 비약 환자까지 들어와서 병상이 모자랄 판인데! 환자들을 치료할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해야지……?’

    그녀는 뺨을 잡은 채 눈을 깜박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비약 환자들은 전에도 치료한 적이 있잖아?’

    ❀ ❀ ❀

    레아는 헬릭스가 한숨 돌리는 틈을 타서 그를 불러냈다.

    “헬릭스, 북부 노예상한테서 애들 구해 냈을 때 기억나?”

    그는 바로 레아의 뜻을 알아챘다.

    “그때처럼 비약 환자들을 치료하잔 얘긴가?”

    “응. 그때 치료한 경험자가 주치의니까, 여기서 해 보기도 쉬울 테고.”

    잠시 생각해 보던 헬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치료는 희석된 드래곤의 피로 비약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게 핵심이었잖나.”

    “그러니까 쿠앙이나 카라이의 피를 희석해서 쓰면…….”

    “쿠앙이는 어려서 안 된다.”

    수호자답게 어린 생물의 안위에는 민감한 헬릭스였다. 레아도 말은 꺼냈지만 꺼려졌던 일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라이의 피를 또 쓸 순 없을 거다. 그땐 아이들 열댓 명이었지만 지금 밀려드는 환자들은 단위가 다르지 않나. 계속 더 올 거고.”

    “음…… 하긴 그때마다 피를 뽑았다간 카라이가 먼저 죽을지도 몰라. 안 되겠다.”

    “그렇다. 그리고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처음에 치료했던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그의 피를 노리는 사람도 생길 거다.”

    “그러네.”

    레아가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그 방법은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게 안전하겠다. 그럼 어떡하지?”

    고민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헬릭스가 말했다.

    “마법학교 애들만이 아니라 레아 너도 비약의 생존자 아닌가. 그때 방식으로 해 보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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