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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90)화 (90/120)
  • 90화

    레아는 연구소의 빈 병실을 차지하고, 구석의 침대에서 눈을 붙였다. 마음이 수런수런해서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으응…….”

    최근의 강행군에 은근히 지쳐 있었는지, 그녀는 앓는 소리까지 내며 선잠에 빠지고 말았다.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 낯선 창문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빛. 물 먹은 것처럼 축축 처지는 몸.

    그 작은 틈새들을 헤집고, 익숙한 듯 낯선 존재가 그녀의 꿈에 스며들었다.

    “……되는군.”

    낮은 목소리가 만족스러운 듯 목을 울리며 웃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뺨을 쓸었다.

    “오랜만이야.”

    오싹한 감각. 활활 타오르는 대지와 하늘.

    ‘꿈이구나.’

    레아는 깨달았다.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 드래곤이 내 꿈에 또 왔어.’

    그녀가 꿈에서 정신을 차린 것을 알아챈 아르카이크가 손톱으로 레아의 뺨을 긁어내렸다. 방울진 피에 혀를 가져다 댄 그가 미간을 좁혔다.

    레아의 피에서 자신의 마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깨어나면 너는 이 상처도 없이, 내 마나도 희미해지며 살아가겠지.”

    아르카이크의 목소리가 광기로 물들었다.

    “너를 내 마나로 가득 채우고 싶다.”

    레아가 질색하며 몸을 떨자, 아르카이크는 그녀의 눈꺼풀에 이를 세웠다. 강제적으로 다른 쪽 눈을 뜬 레아가 그를 노려보았다.

    아르카이크가 그녀의 피로 번들대는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눈부터 씹어 먹고 싶군.”

    “…….”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물어 상처를 내면, 내 것이라 티가 나겠지?”

    “……아예 다 씹어 삼킨다고 하지 그래?”

    “못할 거 같나?”

    레아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트로우 백작한테, 그쪽이 시켰어?”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는 줄은 몰랐군.”

    아르카이크의 반응에 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가짜 약 일은 트로우 백작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란 건가……?’

    하지만 아르카이크의 말을 다 믿을 순 없었다. 잘근 더 깨무는 그녀의 입술을 아르카이크의 차가운 손가락이 눌러 벌렸다.

    “너는 나 말고도 중요한 게 많지.”

    어두운 눈빛이었다. 레아가 단박에 응수했다.

    “넌 안 중요해.”

    “중요해질 거다.”

    아르카이크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내가 네 가족과 가문을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안다면.”

    협박이었지만 또한 애원이었다.

    그녀가 ‘넌 안 중요해’라고 하는 순간 아르카이크의 검은 눈에 확 타오르던 금빛 불길은 명백한 분노였지만, 눈빛은 상처받은 걸 감추지 못했으니까.

    하나 곧 그 기색을 지워 낸 아르카이크가 낮게 말했다.

    “곧 너는 내 손을 아쉬워하게 될 거다.”

    “…….”

    “세상이 이 꿈속처럼 불타오를 때…… 그제야 널 살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를 놓쳤다는 걸 알게 될 테지.”

    “……무슨 짓을 벌이는 건데?”

    “멸망.”

    놈이 그 단어를 뱉자마자 갑자기 앞이 깜깜해졌다.

    “……레아!”

    애타는 부름과 함께 레아는 현실로 확 끌려 나왔다.

    헬릭스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아, 괜찮나? 드래곤은?”

    “……헬릭스?”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병실을 보고, 침대와 창밖을 보고, 제 앞의 헬릭스를 쳐다봤다.

    “네가 날 깨웠어?”

    “드래곤의 마나가 느껴져서.”

    짧게 대꾸하는 헬릭스의 턱으로 땀이 떨어졌다.

    레아가 몸을 일으켜 앉아, 멍하니 그런 헬릭스를 쳐다봤다.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고 보니 헬릭스 손에 쿠키 바구니가 없네.’

    잠들기 전 봤던 광경이 머리를 스쳤다.

    여자가 내밀던 쿠키 바구니와 그걸 받아 들던 헬릭스. 레아의 입이 툭 벌어졌다.

    “쿠키는?”

    헬릭스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쿠키 말인가…… 아?”

    헬릭스의 눈이 커지며 레아의 눈을 마주 봤다.

    “보고 있었나?”

    “안 봤을 줄 알았어?”

    저도 모르게 앙칼지게 말한 레아가 헬릭스의 손을 톡 때렸다.

    “있잖아, 헬릭스.”

    톡. 톡.

    그의 손을 때리며 그녀가 말했다.

    “나 너한테 미안했어.”

    “…….”

    “내가 드래곤의 성녀라서. 그런데 너 붙잡아서. 널 괴롭히는 거 같았어.”

    “아니다, 레아. 내가…….”

    “응. 생각해 보니까 아닌 거 같아.”

    헬릭스의 말을 끊으며 레아가 그의 땀을 닦아 냈다.

    “내가 드래곤의 성녀 되고 싶어서 된 거 아니잖아. 그치?”

    “그렇다.”

    “내가 헬릭스 괴롭힌 거 아니잖아. 그치?”

    “물론이다. 날 괴롭힌 건 그렇게 만든 아즈라가 아닌가. 레아 너는 하나도 잘못이 없다.”

    “그치. 내 잘못은 하나도 없잖아. 나는 그냥.”

    그녀가 작게, 그렇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헬릭스가 좋은 것뿐인데.”

    꿀꺽. 헬릭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레아가 그런 그의 눈썹을 가지런히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을래. 나 질투할 거야. 다른 여자들 말고 나랑만 놀자고 할 거야.”

    “…….”

    “나랑 해.”

    그녀가 말했다.

    “쿠키도 나랑 먹고. 케이크도 나랑 먹고.”

    자다 깨어나, 저를 걱정하며 달려온 헬릭스를 보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들. 그렇지만 모두 진심이었다.

    레아가 헬릭스의 얼굴을 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손잡는 것도, 멋진 곳을 산책하는 것도.”

    “…….”

    “좋은 건 다 나랑만 해.”

    순간 헬릭스가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에 제 뜨거운 입술을 붙였다 뗀 그가 마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것도.”

    헬릭스의 뜨거운 손이 레아의 뺨과 귓바퀴를 쓸었다. 열기와 초조함. 갈급한 독점욕이 담긴 손길이었다.

    그 손길에 귀 안과 뒤쪽의 여린 부분에 소름이 돋으면서, 레아의 목과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 헬릭스의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내렸다.

    “으……!”

    낯선 감각에 그녀가 놀라 파드득 떨었다. 헬릭스는 그런 레아를 꽉 안으며 귀를 살짝 깨물었다. 그가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나랑만 하자.”

    꽉. 레아는 대답 대신 헬릭스를 껴안았다.

    “……쿠키 같은 거 또 받지 마.”

    헬릭스가 껴안긴 채로 낮게 웃었다.

    “안 먹었다.”

    “진짜지?”

    “진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나눠 먹으라기에,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줬다.”

    돌려 말한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게 참 헬릭스다웠다.

    새삼 안심이 되면서 웃음이 나왔지만, 레아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론 받지도 마.”

    “알겠다.”

    선뜻 대답한 헬릭스가 잠시 망설였다.

    그가 레아의 어깨에 턱을 얹고 숨을 들이켜더니 몸을 떼었다. 헬릭스의 큰 손이 레아의 손을 잡아 왔다.

    “……너도 남자들 잡지 마라.”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안 잡았는데? 손도 너랑만 잡았는데?”

    “그건 알지만…….”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누르며, 헬릭스가 말을 이었다.

    “카라이의 어깨를 쳐 주는 걸 보고 다른 기사들도 자꾸 너한테 칭찬받으려고 과잉 보고하잖나.”

    “그, 그래?”

    전혀 짐작도 못 했던 사실에 그녀가 입을 뻐끔댔다.

    ❀ ❀ ❀

    헬릭스는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 저도 모르게 입술에 쪽, 뽀뽀했다. 그가 레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가 할 일이 많고, 부릴 사람도 많고, 치하도 많이 해 주는 성격이란 걸 안다.”

    “…….”

    “그렇지만 카라이는 너한테 칭찬 한번 받으려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삼십 분에 한 번씩 네 상태를 묻지 않나.”

    좀 자주 확인한다 싶었지만 그 정도였나.

    “기사들도 네가 잘했다고 해 주면 꼬리가 생긴 것처럼 신나서 일하러 나가지. 웃는 얼굴 한번 본 놈은 며칠째 너 있는 방향만 봐도 얼굴 표정이 풀어지더군. 약재사 놈들 중에 몇몇 놈도 너 훔쳐보다가 병을 깨고…….”

    그걸 언제 다 보고 있었어?

    레아는 놀랐다. 하긴 헬릭스 주위에 맴도는 여자들을 다 외운 그녀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으으.”

    톡. 레아가 헬릭스의 팔에 이마를 대고 꿍얼댔다.

    “……내가 이렇게 질투 많은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

    헬릭스가 그런 그녀의 이마를 슬쩍 제 가슴 쪽으로 밀며 어깨를 껴안았다.

    순식간에 그에게 폭 안긴 레아의 머리에 뺨을 비비며, 헬릭스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일 시키고 치하도 해야 하니까, 어깨 쳐 주는 것까지는 할게.”

    “알겠다. 허리나 엉덩이는 안 된다.”

    “당연하지!”

    “하하.”

    소리 내 웃은 헬릭스가 조심스레 보탰다.

    “남자와 둘만 있을 땐 웃어 주는 것도 안 하면 좋겠다. 네가 너무 예쁘니까.”

    “응응. 헬릭스도 얼굴천재니까 여자랑 둘만 있을 땐 웃어 주면 안 돼.”

    헬릭스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서 닿은 정수리가 간지러웠다. 레아는 그의 품에서 조금 몸을 빼서 턱에 뽀뽀했다.

    “약속.”

    “이게 약속인가.”

    헬릭스가 웃었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약속 백 번만 더 하자.”

    “꺅?”

    ❀ ❀ ❀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는 혼란스러웠다.

    ‘그 힘은 분명 헬릭스란 놈의 마나였다.’

    드래곤의 마나로 연결된 레아 피어트와 자신. 그러니 자신이 그녀의 꿈에 침투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헬릭스 그놈이 레아에게 마나를 불어넣고, 정체불명의 다른 마나까지 섞이면서, 레아의 육체에서 자신의 마나가 조금씩 밀려났다.

    세 가지 마나가 서로 얽혀들면서 레아 피어트만의 마나로 거듭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내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연결이 약해지는가.

    자신이 왜 레아 피어트의 꿈도 멋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되었는가.

    게다가 이번에 레아를 깨워서 데려가 버린 헬릭스의 마나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내 것이다.’

    속이 들끓었다. 동시에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도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이러는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레아를 보지 않을 때는 독점욕과 괘씸죄에 당장 그 가느다란 목을 꺾고 싶은 마음뿐인데, 막상 마주치면 온 신경이 사로잡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앙칼진 말만 내뱉는 분홍색 입술. 제 앞에서 기죽지 않고 똑바로 노려보는 푸른 눈동자. 마나를 풀어 제압하면, 움찔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는 하얗고 가느다란 여체.

    그 모든 것을 제 마나로 채우고, 할퀴어 피를 내고, 씹어 삼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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