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89)화 (89/120)

89화

“이 정도 무리는 해도 괜찮아. 생각보다 진척이 더뎌서 큰일이군.”

두 형제는 가짜 약 유통책을 추적하고 있었다. 리케일이 모아 건넨 정보를 바탕으로, 루얀이 기사들을 이끌고 앞장서는 방식이었다.

상당한 팀워크에 무시무시한 추적속도였지만 상대도 꽤나 절박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루얀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심증으론 트로우 백작가를 백번 쳐들어가고 남았는데, 이 자식들이 꼬리가 안 밟힌단 말이야.”

“가짜 약병을 만들던 유리공방 습격은 어떻게 됐지?”

“그거 어젯밤에 쳐들어가 보니 다 죽어 있었어.”

“으음…….”

리케일이 길게 신음했다.

“뒤에 있는 놈들이 잔인하고 물불 안 가리는 놈들이군.”

“보니까 유리공방 놈들도 야반도주하려고 했던 것 같더라고. 직전에 처리당한 모양이던데.”

루얀이 답답하다는 듯이 제 금발을 흩트렸다.

“누구한테 사주받았는지 계약서며 돈이며 증거도 하나 안 남아 있고…… 부하 놈들도 기운 빠져 하더라.”

“콜록. 증거가 될 만한 건 이미 치웠겠지. 조금만 일찍 발견했으면 좋았을 뻔했구나.”

“그래서 성질난 김에 공방을 다 때려 부쉈어.”

“쿨럭!”

리케일이 놀라 크게 기침했다.

“뭐, 뭘 하고 다니는 거냐?”

“형 너무 놀랄 거 없어.”

때려 부쉈다는 말을 한 주제에 루얀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지난번 재판을 겪고 보니, 이런 거 수습하러 다니면서 조용히 해 봤자 아무 소용 없더라고.”

“…….”

“어차피 난 소드마스터잖아. 뭘 해도 티 나. 차라리 ‘내가 여기서 설치고 있다’, ‘어떤 놈이 날 빡치게 했다’ 보여 줘야 다들 ‘아, 무슨 일이 있구나’ 한다니까.”

“콜록.”

듣고 있던 리케일이 조용히 말했다.

“……사람은 다치게 하지 마라.”

“형은 내가 망나니인 줄 알아?”

“아니지. 아니긴 한데.”

리케일은 잠시 망설였다.

“아닌 거 맞나?”

“형!”

❀ ❀ ❀

피어트 상단의 연구소도 바빴다. 레아는 남부사막에 다녀온 뒤 계속 수도에 머물고 있는 카라이를 호출했다.

“카라이, 지금은 나보다 이 연구소를 지켜 줘야겠어.”

“주인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레아의 말에 카라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들시들한 표정을 보고 레아가 슬쩍 달랬다.

“자부심을 가져. 네 마법 방어막으로 수도의 건강을 지키는 거야.”

“예? 제 마법 방어막으로 수도의 건강을 지킨다고요?”

“그럼.”

레아가 설명했다.

“여기가 어디야? 우리 피어트 가문의 약품 연구소잖아. 지금 가짜 약에 당한 환자들이랑, 그 사람들 구하려는 의사들도 많이 있고.”

“그, 그렇지요.”

“당분간 가짜 약에 당하는 사람도 많을 거고, 약을 못 믿어서 혼자 끙끙거리다 병을 키우는 사람도 많을 거야. 우리 연구원들이 그런 일들을 최대한 막으려고, 연구하고 약을 만들고 있다고.”

레아가 카라이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런 사람들을 지키는 게 수도의 건강을 지키는 거지 뭐겠어?”

카라이의 눈동자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그런 생각까지 다 하시다니, 역시 주인님은 정말 멋진 분입니다.”

아니 또 어디서 꽂힌 거야. 이제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도 그녀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카라이가 말했다.

“어떤 귀족이 이렇게 가난한 자나 평민들 병까지 신경 쓰겠습니까? 적어도 저는 본 적 없습니다. 주인님은 정말 담대하고 마음 넓으실 뿐 아니라 자비로운 분입니다!”

“그, 그만. 좀 조용히 해 줄래.”

“아닙니다! 제가 북부에서 애들 구해 내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다들 주인님이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분이신 걸 알아야 합니다!”

“물론 눈이 있으면 알게 될 것이다.”

헬릭스까지 가세했다.

“……헬릭스 너까지 왜 이래?”

“사실이지 않나.”

시침 뚝 뗀 헬릭스가 모르는 척했다. 레아는 이상해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깐 저기서 약재사들이랑 얘기하고 있었잖아? 언제 여기까지 왔어?”

물론 레아가 카라이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는 걸 보고 날 듯이 달려왔다. 일 때문인 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으니까.

‘레아 손이 얼마나 보드랍고 말랑말랑한가.’

그런 예쁜 손으로 남자들 어깨를 막 만지고 그러면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주인님!”

“아가씨!”

“공녀님!”

다들 레아를 부르면서 한마디 말이라도 섞고 싶어 달려드는 폼들이 아아주 거슬렸다.

그렇지만 그는 일단 다르게 둘러댔다.

“레아 네가 보이니 자연스럽게 와 본 거다.”

“……어쩐지 수상한데.”

레아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더 추궁하진 않았다.

그 뒤로도 헬릭스는 연구소에서, 빈민가에서, 약국들에서 그녀를 열심히 눈으로 쫓았다. 주위 남자들이 레아를 쳐다보는 시선이 저와 비슷하다는 걸 느꼈던 것이다.

“쿠앙. 쿠왕쿠왕.”

매일 밤마다 찾아와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서 울어대는 해츨링도 한몫했다. 점점 들을수록 그도 해츨링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레아 좋아. 예쁘고 상냥하고 재밌어. 은색 인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 내용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막 알에서 깨어난 해츨링까지도 레아를 좋아하다니…… 어느 날 밤, 헬릭스는 툭 물어보았다.

“해츨링. 너는 레아가 드래곤의 성녀라서 좋아하는 건가.”

“쿠오아앙.”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드래곤도 눈이 있다. 드래곤의 성녀라도 싫으면 싫은 거다.

“그래……. 알았다.”

“쿠옹. 쿠아옹.”

은색 인간. 미련하다. 좋으면 좋다고 해라.

“……가서 자라.”

❀ ❀ ❀

그렇게 점점 레아를 쳐다보며 눈빛을 활활 불태우는 헬릭스.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도 어떻게 말 한번 걸어 볼까 알짱대는 여자들이 많다는 걸. 그걸 멀리서 레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저 여자는 왜 사흘째 헬릭스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건데!’

레아는 헬릭스가 약국을 돌아보러 나갈 때마다 나타나는 여자를 알아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심지어 여자의 손엔 작은 바구니까지 들려 있었다. 레아는 귀신같이 그 물건을 알아보았다.

‘저건 이 근처에서 제일가는 과자집인 폴리 베이커리의 쿠키 세트!’

레아는 인정했다. 사흘째 헬릭스 주변에 출근하는 저 여자는 안목이 높았다.

‘그렇지만 그 안목으로 헬릭스를 찍는 건 싫어. 헬릭스한테 쿠키 세트를 주는 건 더 싫어!’

그렇지만 지켜보는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줄도 모르고, 여자는 웃으면서 헬릭스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헬릭스가 약간 놀란 기색으로 여자와 바구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순간 속이 확 상했다.

레아가 헬릭스한테 처음 줬던 것도 쿠키가 든 봉지였다. 그 기억을 떠올린 그녀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받지 마!’

레아의 염원이 무색하게도, 헬릭스의 커다란 손이 쿠키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야!’

저걸 받다니. 레아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눈물까지 찔끔 났다.

‘나, 난 속상한 거 아니야. 속상하지 않다고.’

그녀가 속으로 꿍얼거렸다.

‘배신감 느낀 것도 아니야. 그, 그럼. 그깟 쿠키가 뭐라고. 받을 수도 있지. 소소한 먹을거리니까.’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왜 머리도 아프고 기운이 빠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자기최면을 포기한 레아가 후, 한숨을 쉬었다.

“연구소 안에 남는 침상 있지? 잠깐 들어가서 쉴래.”

“주인님, 피곤하십니까?”

“공녀님, 몸이 안 좋으세요? 제가 자리 봐 드릴 테니 한잠 주무세요.”

자넷의 말에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페이런 왕국에서 온 보고서를 읽었다.

긴 보고서에는 트로우 백작이 요즘 벌이는 가짜 약 사건과, 무서운 속도로 이를 추적해 오는 피어트 공작가의 위협이 쓰여 있었다.

“트로우 백작이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지…….”

“무슨 일을 벌인 것입니까, 전하?”

“읽어 봐라.”

황태자가 건넨 보고서를 읽은 파이퍼스 자작과 보좌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무 막 나가는 것 아닐까요.”

“이자를 쳐 내셔야 합니다. 지금 제국 내에서도 반발이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황녀와 교단 측이 엘름 후작가의 몰살이 정당하지 않다면서, 그들의 반역 증거를 내놓으라고…….”

보좌관의 말에 아르카이크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낮게 물었다.

“교단도 그쪽으로 붙었나?”

“테미라 여신의 교단은 전통적으로 드래곤을 배척하지 않습니까. 드래곤의 계약자라는 이유로 전하께서 황태자로 책봉되신 게 못마땅한 모양입니다.”

“제국의 제일 종교로 떵떵거리는 주제에, 우스운 놈들이다.”

정말 배척하면 드래곤의 혈통이라 주장하는 황실부터 배척할 일이었다.

단것은 삼키고, 아르카이크가 드래곤의 계약자라는 것만 트집 잡는 것을 보니 황후와 귀족파에서 돈을 쓴 것이리라.

“그렇지만 교단의 영향력은 우습지 않습니다, 전하. 무슨 이유인지 저들의 수장인 대신관이 설교 때마다 전하를 맹비난한다고…….”

“뭐라고 비난한다던가?”

보좌관이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르카이크가 계속 눈빛으로 압박하자 그가 할 수 없이 입을 떼었다.

“전하께서 황족의 껍데기를 쓴 악마이며,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가실 분이라고…….”

“…….”

드물게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보좌관이 얼른 말을 보탰다.

“늙은 대신관이 망령 들어 하는 헛소리일 뿐, 귀담아들으실 것 없는 말입니다.”

“아니다. 귀담아들어 두어야지.”

황태자의 입술에 느슨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야 악마가 어떤 보복을 하는지 본보기를 보일 게 아닌가.”

“저, 전하.”

아르카이크 황태자가 손을 저었다.

“그냥 하는 말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손을 봐야겠군.”

파이퍼스 자작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제국의 정세를 위해 변방 트로우 백작 건부터 정리하심이…….”

아르카이크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이번 일로 피어트 공작가가 곤란할까?”

“아무래도 애먹고 있지 않겠습니까?”

보좌관의 대답에 황태자 아르카이크는 생각에 잠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