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레아가 빙긋 웃으며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난 또 잘 알아서 가만히 있나 했지. 가짜 약이 유통되고 있는데 말이야.”
“…….”
너도 트로우 쪽이랑 손잡아서 가짜 약이 유통되는데 가만있었던 게 아니냐. 떠보는 속뜻을 읽어 낸 길드장의 겨드랑이며 등이 축축하게 젖어 왔다.
“아……닙니다. 너무 놀라고 경황이 없어 제가 성의를 보여 드리지 못했습니다.”
길드장 오르쿨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피어트 공작가뿐만이 아니라, 저희 약재사 길드의 명예가 걸려 있는 일 아닙니까? 이리 알려 주셨으니 재빨리 최선을 다해 조치하겠습니다.”
“어머, 믿음직해라.”
레아는 갑자기 귀족 아가씨 말투로 호호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 길드장이 흠칫 몸을 굳혔다.
눈이 웃지 않는 데다가 조금 전까지의 말투와 달라서 오히려 무서웠다.
“그럼 믿어 볼게. 우리도 약재사 길드랑 잘 지내고 싶은데, 실망시키지 않을 거지?”
길드장의 귀에 레아의 진심이 통역되어 들렸다.
‘대답 똑바로 잘하고, 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확 트로우 쪽하고 같이 치워 버린다?’
길드장 오르쿨은 깨달았다. 레아가 말로만 협박하는 게 아니란 것을!
그가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약재사 길드장은 과연 허투루 그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니었다. 레아의 경고를 바로 알아듣고 재깍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피어트 공작가에서 고용한 화가가 몽타주를 완성하자마자, 약재사 길드에선 수도의 약국마다 몽타주를 돌리며 현상금을 크게 걸었다.
“이자에게서 수상쩍은 떨이 물건을 산 약재사가 있다면 속히 알리시오. 지금 알리면 처벌하지 않겠소!”
“알리지 않았다가 밝혀지면 길드에서 추방하겠다! 길드에서 추방당하면 이 업계에 다신 발 못 디미는 거 알지?”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해도 말 안 듣는 놈들은 꼭 나왔다.
피어트 상단의 감기약 먹고 죽을 뻔했다는 이들이 자꾸 나타났던 것이다.
“누구냐! 누가 몰래 사들여서 팔고 있는 거냐!”
헬릭스와 레아는 몸소 나섰다.
애쓰는 데도 길드원들이 말을 안 들어 약이 바짝 오르고 불안해진 약재사 길드 쪽도 함께였다.
“도대체 말들을 들어 처먹지를 않습니다!”
“아니 분명히 길드에서 계속 가짜 약 유통된다고 사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그 약들이 가짜인 거 빤히 다 알 거 아닙니까? 가짜 약들에 독을 넣는 경우도 많다고 알렸건만!”
“제 가족들 먹일 거라면 팔았겠습니까? 약재사로서 최소한의 직업윤리도 없는 놈들입니다!”
그들은 함께 약국마다 돌아다니며 가짜 감기약을 찾아내 폐기하기 시작했다. 헬릭스의 마나 감별 능력이 빛을 발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가짜다.”
한번 척 보고 공기만 맡아도 거리낌 없이 선반 위의 가짜를 찾아내는 능력!
“이건 독이 들어 있군.”
“……무슨 독입니까?”
“말초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이다. 루팝나무 뿌리와 제네비 꽃을 조합한 모양이군.”
❀ ❀ ❀
처음엔 그의 말을 의심하던 약재사 길드 쪽 사람들은 며칠 지나고 나자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기사들이 루얀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숭배와 존경의 시선!
“오오, 약품의 신이시여…….”
헬릭스가 고지식하게 정정했다.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수호자다.”
“그렇군요! 약품의 수호자시여……!”
“이 사람 통이 이렇게 작아서야. 내 생각엔 건강의 수호자실 것 같네!”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마나의 수호자다.”
헬릭스의 말에 서로 쳐다보던 약재사 길드 사람들이 말했다.
“아하! 레아 피어트 공녀님이 마법사시니까 그러시는 겁니까?”
“크, 멋집니다. ‘내 여자의 수호자라고 왜 말을 못 해!’ 이거군요!”
“…….”
헬릭스는 내심 갈등했다.
‘……그렇다고 해 버릴까.’
어차피 마나의 수호자가 뭔지 모르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 약재사들의 오해 아닌 오해를 부추기면, 이참에 레아의 남자로 은근슬쩍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이다.
수호자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던 과거의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던 변화였지만, 본인도 레아도 아직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특히 레아가 모르고 전전긍긍했다.
‘헬릭스가 말이 없는데…….’
그녀는 생각했다.
‘마나의 수호자로서 인정받지 못해서 울적해진 걸까?’
워낙에 수호자로서 긍지가 높은 헬릭스니 그럴 법도 했다. 레아가 나섰다.
“자자,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일들 하세요. 다음 약국이 어디죠?”
목소리를 높인 레아의 말에 헬릭스를 둘러싸고 있던 약재사들이 흩어졌다. 헬릭스의 이마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미안, 헬릭스. 좀 부담스러웠지?”
“……아니다.”
“다음부터 너무 그러면 주의 줘. 나는 괜찮으니까.”
내가 안 괜찮다.
차마 속마음을 말하지 못한 헬릭스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역시 기분이 많이 상했나 봐.’
그 표정에 레아는 뭐라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럴 만도 해.’
처음 만났을 때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이름도 안 밝히고 대뜸 ‘수호자다’라고 말했던 헬릭스가 아닌가.
이해하면서도 어쩐지 조금, 조금 섭섭한 마음에 레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자박자박.
“레…….”
헬릭스는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레아는 생각보다 빨리 멀어져 갔다. 그는 앞서가는 레아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레아는 나와 공식적인 사이가 되는 게 부담스러운 건가.’
과거에 공주들에게서도 수시로 구혼받았던 헬릭스였지만, 지금 그는 지위도 가문도 신분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그에 비하면 레아는 이 왕국에서 가장 신분 높은 미혼 여성. 게다가 얼마 전 오켄 제국의 아르카이크 황태자도 떠들썩하게 청혼했지 않은가.
“…….”
헬릭스가 내밀던 손을 거둬들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기류에, 뒤따르던 약재사들이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저 커플 아직 먼 것 같습니다.”
“아니, 초미남 초미녀가 왜 저렇게 숙맥들이랍니까? 둘 다 연애 처음 해 보는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진실을 말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 ❀ ❀
한편 오켄 제국의 황성.
황태자 아르카이크는 수상한 보고에 이마를 짚고 있었다.
“황실 마법학자 한 명의 행적이 묘연하다고?”
마법학자.
마법이란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마법학자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신화와 전설 속의 마법에 홀려, 그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학자들이었다.
한마디로 고향에서 그들의 평판은 한결같이 이랬다.
‘공부만 파더니 반쯤 돈 그 작자요?’
‘반만 돌았게? 완전 미쳤던데? 고대엔 사람이 불을 쐈다던데?’
그 미치광이들을 받아들여 황실 소속의 기밀부서를 만든 것이 선대 황제.
선대 황제는 마법학자들에게 드래곤과 마법을 연구할 기회를 주는 대신, 그들의 소속을 황실로 못 박고 자유를 빼앗았다.
때문에 파이퍼스 자작부터 새파란 신입까지, 마법학자는 모두 황성 내 정해진 곳에서 살며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황실 마법학자가 사라진단 말인가.
“예. 출근을 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실험실에도 거처에도 머물렀던 흔적이 없습니다.”
마법학자들을 감시하는 기사가 대답했다. 황태자는 옆에서 초조해하는 파이퍼스 자작에게 물었다.
“그자의 가족은?”
“들어올 때부터 고아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도에 지인은 없나? 고향에는?”
“고향은 어릴 때 떠났고, 황실에 들어온 뒤 바깥출입도 안 하던 녀석이라…….”
들을수록 이렇게 사라질 위인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누군가?”
“마법학자 리드입니다.”
아르카이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기억하는 마법학자였다.
‘화, 황자님…… 죄, 죄송합니다. 어흐, 어흐흑…….’
처음 아르카이크 황자가 피를 뽑힐 때 제가 당하는 양 울던 놈이었다.
그 일 이후 십여 년이 지났으니 더 이상 말단도 아니건만, 아직도 드래곤을 실험할 때마다 덜덜 떨던 자.
“그 겁 많은 놈이 황실을 배반한다고?”
“아마, 성격이 유약하다 보니 다른 마법학자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해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황태자 아르카이크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똑똑 두드렸다.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자를 감시했던 기사가 누구지?”
“아누이 경입니다.”
황태자는 파이퍼스 자작과 기사를 물리고 보좌관을 불렀다.
“아누이 경을 조사해라.”
그가 말했다.
“최근 행적과, 가문의 파벌과 경제상황에 대해 샅샅이 알아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아르카이크 황태자가 물었다.
“이황녀는 뭘 하고 있지?”
“이황녀의 행적 말씀입니까.”
이황녀 아르지나 오켄.
그녀는 일황자 아르카이크와 동갑이고, 대귀족 출신인 황후 소생이었다. 지지 세력도 머리도 외모도 빼어나 어릴 때부터 차기 황제감으로 주목받았던 황녀. 때문에 아르카이크가 황태자로 책봉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보좌관이 보고했다.
“명하신 대로 쫓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자유도시연합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먼 친척을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런데?”
“지켜보던 뱀 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황녀는 자유도시연합에 도착하자마자 여독을 핑계로 칩거 중이랍니다. 비슷한 시기에 자유도시 티고네에서 남부사막 쪽으로 출발한 수상한 일행이 있다고 하고요.”
아르카이크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남부사막?”
“예.”
유목민과 오아시스 근처의 몇몇 부족밖에 없는 그 황량한 땅에 무슨 용무로 간단 말인가?
황태자는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라진 마법학자와 뜻밖의 행보를 보이는 이황녀. 수상한 조합이었다.
아르카이크 황태자가 명령했다.
“이황녀의 행적을 더 캐라. 눈을 떼지 말고, 특히 자유도시 티고네와 남부사막 쪽을 더 조사해 봐라.”
❀ ❀ ❀
페이런 왕국의 수도에선 여전히 레아와 헬릭스가 서로 쌍방 삽질하며 가짜 약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동안 다른 이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콜록.”
감기를 아직 달고 있는 리케일이 집무실에 나와 직접 정보를 점검했다. 루얀이 걱정스레 물었다.
“형, 무리하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