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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87)화 (87/120)
  • 87화

    어린 여자애라고 얕본 게 하필 레아 피어트라니! 주인이 급히 태도를 바꿨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도 속아서 산 겁니다!”

    그가 부지런히 자초지종을 고했다.

    요즘 피어트 상단의 약이 인기 있어서 물량 확보도 어려운데, 지나가던 상인이 팔기에 산 거다. 가짜 약인 줄 알면 안 샀을 거다.

    “이만한 약국을 지금까지 운영했으면서, 지나가던 상인이 파는 걸 덥석 샀다고? 뭘 믿고?”

    “그게, 싼 가격에 넘긴다고 해서…….”

    레아가 지그시 쳐다보자 약국주인이 웅얼대며 덧붙였다.

    “그, 창고지기가 몰래 꿍쳐 놓은 물건이라…… 공작가 서슬이 퍼레서, 걸리기 전에 싸게 파는 거라고…….”

    레아가 혀를 찼다.

    그럴 리가 없었다. 피어트 상단의 약들은 연구소에서 직접 관리하며, 약재사들과 기사들이 순번제로 돌아가며 창고를 지켰으니까.

    그녀가 약국주인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한마디로 욕심에 눈이 멀었군.”

    “레아, 내 생각엔 욕심에 눈이 먼 게 아니라 일부러 눈을 안 뜬 것 같다.”

    헬릭스의 확인사살에 주치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얘길 대놓고 하다니…… 어쩌면 헬릭스 님이 더 무서운 분일지도.’

    그렇지만 레아는 니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 네 말이 맞아. 문제 있을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우리 물건인 척 팔았다 이거지.”

    레아의 차가운 말에 주인이 어깨를 움츠렸다.

    “알고 한 짓이 아닙니다. 부디 너그럽게 선처해 주시면…….”

    “됐고.”

    레아가 말을 끊었다.

    “누구한테 얼마나 팔았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주치의가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공녀님,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그야 이놈한테서 약 산 놈들 알아내서 가짜 약을 회수해야지.”

    “예? 약을 회수해요? 어째서 말입니까?”

    주치의가 되물었다.

    “약재사 길드에 신고하면 알아서 할 텐데요?”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동감하는 얼굴이었다. 레아는 퍼뜩 깨달았다.

    ‘가짜 약이 돌면 해당 기업에서 회수에 들어가는 건 너무 현대 자본주의 방식이구나!’

    페이런 왕국에서는 이런 일엔 길드의 권력이 앞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생의 한국처럼 시스템이 물샐 틈 없이 짜인 것도 아니고, CCTV도, 휴대폰도, 계좌추적도 없는 세계였으니까.

    ‘확실히 가짜 약을 회수하는 일은 힘들겠어.’

    레아가 끙 소리를 내며 고민하다 슬쩍 물었다.

    “그럼, 가짜 약을 가져오면 포상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주치의가 갸웃했다.

    “어…… 다들 약국을 털어서 진짜고 가짜고 가리지 않고 약들을 훔쳐 오지 않을까요?”

    “헉.”

    이건 무슨 약탈경제도 아니고.

    레아의 얼굴이 질렸다. 가짜 약 회수하려다 대혼란만 부추기는 꼴이 되면 곤란했다.

    ‘이 방법은 안 되겠어.’

    레아는 무리라고 생각하자 빠르게 포기했다. 그녀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러면 지금 해야 할 행동은 뭐지?’

    어떻게 해야 피해를 최소화하고, 저지른 놈들을 색출하고, 일을 꾸민 놈들을 응징할 수 있을까?

    레아가 잠시 머리를 싸쥐었다.

    ‘나 멀티태스킹 안 되는데!’

    헬릭스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퐁.

    따뜻한 마나가 손을 통해 흘러들어 왔다.

    그 감각에 순간 가슴이 말랑해져서 헬릭스를 올려다보니,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레아, 내가 옆에 있다. 혼자 고민하지 마라.”

    “헬릭스…… 넌 천사야?”

    레아의 눈이 울망울망해졌다. 눈빛에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어디서 이렇게 얼굴도 마음도 착한 남자가 나타났죠?’

    헬릭스도 따스한 눈빛으로 화답했다.

    ‘네 눈에 내가 그리 보이는 거다.’

    레아를 보는 그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크흠흠.”

    옆에 있던 주치의가 어색하게 기침했다.

    “그, 그래서 아가씨, 어떻게 할까요?”

    ❀ ❀ ❀

    둘만의 세계에서 끌려 나온 레아가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우선은 독약 든 가짜 감기약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해.’

    약국주인의 말을 들어 보니, 가짜 약을 판 상인이 작정하고 벌이는 짓이 분명했다. 놔두면 계속 독이 든 가짜 감기약이 퍼져 나가고 피해가 커질 터. 그놈부터 잡아야 할 듯했다.

    판단을 마친 그녀가 약국주인에게 말했다.

    “선택지를 주겠다.”

    “무, 무엇입니까?”

    “이대로 피어트 공작가로 끌려가겠느냐, 약재사 길드에 가서 사실대로 고하겠느냐?”

    어느 쪽을 선택하든 망하는 길이었다.

    약국주인은 속으로 울먹이며 덜 맞을 것 같은 쪽을 선택했다.

    “약재사 길드로 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가서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불어라.”

    “레아,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불게 만드는 건 피어트 기사들이 더 잘하지 않는가?”

    헬릭스의 말에 약국주인의 자세가 저도 모르게 빠릿빠릿해졌다.

    “아닙니다! 제가 약재사 길드에서 정말 잘 불겠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본다. 알아서 잘해라.”

    “예!”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약국주인을 끌어내 마차에 실었다. 레아가 명령했다.

    “둘은 이 약국 문을 닫고 지키고, 너는 공작저에 가서 초상화 잘 그리고 손 빠른 화가를 구하라고 해.”

    “초상화를 빨리, 잘 그리는 화가 말입니까?”

    “그래. 몽타주를 그려야 하니까.”

    헬릭스가 물었다.

    “그 상인한테 현상금을 걸려고 그러나?”

    “물론 현상금도 걸어야지.”

    레아가 씩 웃었다.

    “그런데 거는 건 우리가 아닐 거야.”

    ❀ ❀ ❀

    레아는 약국주인을 끌고 약재사 길드로 쳐들어갔다.

    “예? 누가 가짜 약을 유통시키고 있단 말씀입니까?”

    약재사 길드장 오르쿨이 뜨악해했다.

    “누가, 어떤 약을…… 왜 말입니까?”

    “그걸 알아내는 게 길드에서 할 일이라던데.”

    레아가 말하며 묶여서 끌려온 약국주인을 가리켰다.

    약국주인은 이제 넋이 나간 모습이 되어 웅얼웅얼 자초지종을 고했다.

    낯모르는 상인이 약국에 들어와 싼 가격으로 피어트 상단의 약을 구할 수 있다고 꼬신 일. 홀랑 넘어가서 대량 구매한 일.

    그 뒤는 주치의가 설명했다. 그렇게 구매한 수상한 약을 먹은 환자를 우연찮게 발견하고, 약 성분조사를 했더니 가짜 약인 데다 독까지 섞여 있었다고 말이다.

    들을수록 정황이 분명한 일이라 길드장은 파랗게 질렸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짜 약을 유통시켰군요.”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하려면, 이 일을 벌인 놈들을 잡아야 해. 이런 헛짓거리를 더 하기 전에.”

    길드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앞에 앉은 레아를 쳐다보았다.

    ‘어쩌다 마법을 하게 된 어린 귀족 영애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가 충격에서 벗어나 상황을 재기 시작했다.

    피어트 공작가는 생산 면에서나 자금 면에서나 여러모로 제약업계의 큰손이었다.

    ‘그런데 그 피어트 공작가의 약을 가짜로 유통시켰다…….’

    일단 제약업계의 일이니 대표 격인 약재사 길드에게 알리고 공을 넘긴 것이었다. 제대로 조치하지 않으면 피어트 공작가가 나설 게 분명했다.

    솔직히 열받은 피어트 공작가가 길드고 뭐고 다 쓸어버리고, 실직한 약재사들을 연구소로 받아들여서 독점해도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레아 피어트를 보낸 걸 보니, 그런 극단적인 방법까지는 쓰지 않겠다는 뜻 아닐까?’

    그는 레아가 나서서 이 일을 캐내고 처리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 하고, 공작 가문에서 보내서 왔으리라 여긴 것이다.

    어쨌거나 젊다 못해 어린 여자에다, 좋은 것만 보고 자란 귀족 영애 아닌가? 사교계의 꽃이기도 했다.

    ‘제 나이보다야 똑똑하게 구는 것 같지만…… 그래 봤자야. 잘 달래면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겠지.’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자세가 풀어지는 오르쿨 길드장이었다.

    “영애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자, 이제 이 일은 저희 길드 쪽에 맡기고 돌아가시지요.”

    대놓고 물정 모르는 어린애 달래듯 하는 모습에 주치의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헬릭스도 미간을 찌푸리며 길드장의 방만해진 자세를 바라보았다.

    “…….”

    레아는 길드장을 지그시 쳐다봤다.

    ‘이 자식이고 저 자식이고 진짜.’

    일단 어린 여자면 우습게 보고 시작하는 모습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헬릭스를 쿡 찔렀다.

    “그러고 보니 그 가짜 약 말이야, 우리 약이랑 얼마나 비슷했어?”

    “상당히 비슷했다.”

    헬릭스가 말했다.

    “처음 병을 개봉했을 때의 향은 물론이고, 첫맛과 뒤끝까지 거의 똑같았다. 중간에 미끄러운 이물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뒷맛과 그 여운이 비슷하게 강렬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문제는 향과 맛만 흉내 냈을 뿐 약재의 약효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가짜 약이잖아.”

    “그렇다. 그렇지만 이렇게 맛과 향에만 집중하고 약효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면, 노렸다는 게 아닌가.”

    “그렇지. 시장에서 우리 약을 흉내 내 팔아서 이득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타격을 줄 의도뿐이라는 거니까.”

    레아의 말에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흉내 내려면 약품 제조에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할 텐데.”

    주치의가 끼어들었다.

    “약품 지식도 그렇고, 우리와 병을 비슷하게 만드는 것도 돈이 많이 드는 일 아닙니까? 유리병이 싼 물건도 아닌데요. 다른 이익도 없이, 오로지 피어트 공작가에게 타격을 입히려고 이만한 일을 벌일 만한 곳은…….”

    레아가 빙긋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던 길드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역시 트로우겠지?”

    ❀ ❀ ❀

    레아의 미소가 진해졌다.

    “길드장은 트로우 상단 쪽이 어쩌고 있는지 알고 있나?”

    길드장 오르쿨이 저도 모르게 자세를 빳빳하게 바로 했다.

    경고. 이건 경고였다.

    ‘네가 이 사태를 스리슬쩍 해결하려는 걸 보니 우리 피어트 공작가가 안 무서운 모양이구나? 썩어빠진 트로우 백작가 줄이라도 잡으려나 보지?’

    레아의 말뜻을 알아들은 길드장의 입이 한순간에 바짝 말랐다.

    “제……가 트로우 상단 쪽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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