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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86)화 (86/120)

86화

약국주인이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어?”

포석 위에 약병이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인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어라? 넌?”

약병들은 무사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제 몸을 던져 약병을 받아 낸 것이다. 비쩍 마른 무릎이며 팔꿈치가 까져 피가 흘렀다.

아이는 아프다는 말도 없이 약국주인에게 약병들을 내밀었다.

“이거 귀한 거잖아요.”

“그, 그래. 잘했다.”

주인이 약을 받아 상자 안에 챙겼다. 아이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졸졸 따라왔다.

‘그러고 보니 아픈 할머니랑 둘이 산다고 들었는데.’

약국주인은 아이의 까지고 쓸린 무릎을 보며 쯧, 혀를 찼다.

“……한 병 가져갈 테냐?”

그가 불쑥 물었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싼값에 얻어 마음이 너그러워진 탓이었다.

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말요?”

“…….”

되묻는 걸 보니 좀 아까워졌다. 그렇지만 말을 물리기에는 아이의 얼굴이 너무 환했다.

쩝. 약국주인이 입을 다셨다.

“……그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몇 번이고 절했다. 받은 약병을 품에 안고 달리는 작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약이 있으면, 할머니 기침을 멈추게 할 수 있어!’

❀ ❀ ❀

다음 날 아침, 약국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는 더럭 겁이 났다.

“할머니?”

할머니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어젯밤 평소보다 더 심하게 기침하던 할머니께 얻어 온 감기약을 드리고, 아이는 가슴이 부풀었었다.

아이도 감기약 한번으로 할머니가 나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오늘 밤은 편히 주무실 거야.’

그렇게 기대하면서, 홧홧하게 쓰라린 제 무릎과 팔꿈치를 문지르며 잠들었는데.

“할머니?”

할머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이는 더럭 무서워졌다. 어린 제 귀에도 들려오던 소문들이 생각났다.

‘이번 겨울이 그렇게 춥다며? 감기 한번 돌면 이 동네 노인들 싹 다 실려 나갈걸.’

‘감기가 독감 되고, 독감이 폐렴 되고 그러는 거지. 원래 노인들이 막판엔 폐렴으로 가잖아.’

가슴이 조여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까? 정말?

아이의 조그만 머리통이 달아올랐다.

‘약을 드셨는데 왜?’

아이는 빈 약병을 들고 약국으로 달려갔다.

“도와주세요! 할머니가 약 드시고 안 일어나세요!”

약국주인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고작해야 감기약이었다. 먹고 못 일어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거 잘못 산 거 아니야?’

찜찜해진 그가 버럭했다.

“이놈이 어리다고 봐주니까! 불쌍해 보여서 공짜로 약을 줘도 난리냐?”

“아니에요! 할머니를, 할머니를!”

걸리는 게 있는 주인이 더 큰 소리를 내며 아이를 쫓아냈다.

“얼쩡대지 말고 썩 꺼져!”

아이는 감기약 병을 든 채로 울며 걸었다.

“어떡하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계속 울어 짓무른 눈에 비친 세상은 어둡고 어지럽기만 했다. 할머니가 없는 혼자만의 세상은 이런 색일까.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아이의 걸음이 비틀비틀, 도로 한복판으로 향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마차가 급히 속도를 줄였다.

히이잉!

말 울음소리가 귀를 때렸을 때, 아이의 몸은 허공에 붕 떠 있었다.

마차 문이 급하게 열리며 은발의 남자가 비호처럼 뛰어내려 낚아챘던 것이다. 남자가 아이를 흔들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죽고 싶나!”

“어…… 어어…….”

“헬릭스, 그만해. 어린애잖아.”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더니, 멈춘 마차에서 생전 처음 보는 예쁜 여자가 내렸다. 아이가 입을 딱 벌렸다.

“괜찮니? 놀랐어?”

여신님 같은 여자가 상냥하게 말해 주자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도 모르게 서러워져서 울음이 터졌다.

“어헝, 죄송해요. 어허엉.”

아이가 꼭 쥐고 있던 약병을 더 꽉 껴안으며 울었다.

“할머니가 감기약을 드셨는데 안 깨어나셔서…… 어허엉.”

“울지 말고. 그게 그 약병이야? 줘 볼래?”

달래는 듯 단호한 말에 아이는 홀린 것처럼 약병을 내밀었다. 약병을 살핀 예쁜 여자의 얼굴이 싹 굳었다.

“이거 우리 감기약이잖아?”

❀ ❀ ❀

레아는 빠르게 움직였다.

자넷이 우는 아이를 달래 집 주소와 할머니 상태와 일의 전말을 알게 되는 동안, 그녀는 연구소로 달려가 주치의를 불러내고 피어트 공작저에도 연락했다.

“이거 우리가 지금까지 팔던 감기약 맞지?”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라온 고참 연구원이 어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니 이건 우리 약 중에서도 요즘 재고 없는 빨간 감기약이 아닙니까?”

“재고도 없을 정도라고?”

레아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 기세에 눌린 연구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예. 요즘 소공작님용으로 만들던 감기약을 개량해서 준비하는 중입니다만…… 그건 파란색 병이거든요. 아직 출시도 안 되었고요.”

듣고 있던 주치의가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요즘 추워진 데다 다른 상단 물건에 대한 불신도 커져서, 기존의 빨간 감기약이 동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레아가 아이에게서 받아 온 빨간 감기약 병을 지그시 노려봤다. 헬릭스가 옆에서 말했다.

“레아, 이 약병 안에서 독 성분이 느껴진다.”

“……어떤 망할 놈이.”

레아가 저도 모르게 이를 까드득 물었다. 주치의도 고참 연구원도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우리 약을 가지고 장난을 쳐? 그것도 초겨울에 감기약으로 이딴 짓을 한다 이거지?”

“이, 일단 독 성분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참 연구원의 말에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겠지만 수고 좀 해 줘. 비상상황이니까.”

“예!”

“공녀님!”

피어트 가문의 기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자넷이 아까 애한테서 집과 약국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역시 우리 자넷이야.”

잠시 흐뭇하게 웃은 레아가 명령했다.

“기사 여러 명이랑 의사 데리고 그 집으로 가서, 할머니를 여기로 모셔 오도록 해.”

기사가 잠시 주춤했다.

‘빈민가의 평민 노인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신분제 사회인 페이런 왕국에서 기사 정도면 꽤 상위 그룹이었기에, 한참 낮은 위치의 가난한 할머니를 위해 기사들이 몇이나 움직여야 한다는 것에 반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명령을 내린 사람은 레아 피어트 공녀님. 모시는 공작가의 고명딸이라는 지위만으로도 하늘 같은 분이었다.

‘상관이 까라면 까는 게 기사의 도리!’

게다가 레아가 요즘 피어트 가문을 위해 벌인 활약에, 기사단장 루얀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레아가 시키면 잔말 말고 해라. 머릿속까지 근육인 너희들보다 훨씬 똑똑한 애니까!’

‘같은 처지에 너무하십니다, 단장님!’

‘뭐래냐? 내가 너희처럼 머리까지 근육인 줄 아냐? 내 머리엔 검기가 들어 있거든?’

멋지지만 재수 없는 자신들의 상관을 생각하던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께서 큰 뜻이 있으시겠지!’

그가 외쳤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래.”

레아가 주치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연구소에 딸린 병상, 아직 여유 있지?”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헬릭스, 가자.”

레아가 발딱 일어났다. 헬릭스가 당연하다는 듯 일어서서 그런 레아의 어깨에 망토를 걸쳐 주었다.

“밖이 춥다.”

옆에 있던 주치의가 엉거주춤 엉덩이를 떼었다.

“저도 갑니까?”

“응. 의사 자격증 있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지.”

“어…… 어디 가시려고요?”

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약 가지고 장난친 놈한테.”

❀ ❀ ❀

레아는 헬릭스와 주치의를 끌고 약국에 쳐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귀한 분들이 약국을 점거하자 주인은 혼이 빠졌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망토의 후드를 눌러쓴 레아가 되물었다.

“그러게. 어떻게 왔을까?”

저도 모르게 뒷덜미가 섬찟해진 약국주인이 반보 물러섰다.

그러잖아도 찔리는 데가 있는데, 딱 보기에도 옷차림이며 태도가 귀족인 사람들이 저렇게 나오다니. 그가 침을 삼켰다.

‘괜찮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

아무리 귀족이래도, 턱선이며 손을 보니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이지 않은가?

‘잠깐. 옆에 있는 미남도 귀족인가?’

얼굴만으론 황족이래도 믿겠지만 묘하게 옆의 여자를 챙기는 손이 살뜰했다. 그가 알기로는 귀족은 제 여자라고 저렇게 챙기는 놈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여자가 데리고 다니는 미남 시종이나 애인이라는 뜻. 약국주인이 자신감을 찾았다.

‘기사도 아니고 잘생긴 애인이나 끼고 다니는 귀족 영애라면 뭣도 모르는 년이겠지. 치안대며 집안 명예 들먹이면서 겁 좀 주면 도망칠 거야.’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용무인지 몰라도 이렇게…….”

그의 말을 자르며 헬릭스가 말했다.

“오면서 붉은 감기약의 성분을 분석해 봤다.”

딸꾹.

약국주인이 입을 다물었다. 헬릭스가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감기약은 가짜더군.”

“아하.”

레아가 차갑게 말했다.

“독을 넣은 것만이 아니라 가짜 약까지 유통시켰다?”

“그런 듯하다.”

헬릭스가 긴 팔을 들어 약국의 선반 높은 곳을 가리켰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가짜다.”

“…….”

정확하게 어제 장물로 산 약들이었다. 약국주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헬릭스의 손이 다시 몇 개를 짚어 가리켰다.

“이것들에는 독이 들어 있군.”

주치의가 작게 히익, 소리를 냈다.

“허어?”

레아가 잠시 뒷목을 짚으며 숨을 골랐다. 약국주인이 부리나케 나섰다.

“말도 안 되는……! 남의 가게에서 무슨 행패입니까! 계속 이러면 치안대를 부르겠소. 그리고 영애의 가문에도……!”

“가문? 그래, 말 잘했다.”

그녀가 휙 돌아서며 주인을 노려보았다.

“우리 가문의 상품을 가짜로 만들고, 독까지 넣어?”

쾅.

레아가 계산대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말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자그맣고 하얀 손이었다.

그렇지만 그 손이 짚었던 계산대에는 그 작은 손 모양대로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약국주인의 얼굴이 이번엔 파랗게 질렸다.

‘화염마법!’

그도 세간의 소문을 들은 바가 있었다.

‘레아 피어트 공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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