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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85)화 (85/120)
  • 85화

    레아를 따라다니는 해츨링이 어느새 날아와서 난간에 앉았다.

    “……뭔가.”

    딱딱하게 나간 그의 말투에 해츨링이 귀를 축 늘어트렸다. 헬릭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꾸우웅.”

    “……왜 레아 옆에 있지 않고 여기 있냐는 소리였다.”

    어느새 변명조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요령 없는 말에도 해츨링은 방긋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여기서 이래 봤자 나올 것 없다. 돌아가라.”

    “꾸웅꾸웅.”

    알짱대며 눈치를 보는 해츨링은 귀엽고 안쓰러웠다. 헬릭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드래곤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군.”

    “꾸웅.”

    찡그린 눈썹 아래 회색 눈동자가 해츨링을 잠시 쳐다보았다.

    ‘하긴 새끼가 무슨 죄인가.’

    드래곤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이런 해츨링을 벌써부터 악당인 양 몰아붙여선 안 될 일이었다.

    “쿠아앙.”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레아한테 가라.”

    헬릭스를 떠나며 쿠앙이는 속으로 씩 웃었다.

    ‘또 올 거다, 은색 인간.’

    언젠가는 제 귀여움으로 함락시켜 ‘드래곤…… 귀여운 생물이지’라고 인정하게 해 주겠다. 쿠앙이는 각오를 다지며 파닥파닥 날아갔다.

    ❀ ❀ ❀

    한편 피어트 공작가의 연구소에는 뜻밖의 인물이 돌아왔다. 북부의 마법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주치의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레아는 헬릭스와 함께 피어트 가문의 연구소에 들렀다. 실험대에 코를 박고 있던 주치의가 두 사람을 반겼다.

    “공녀님! 헬릭스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시지요?”

    레아가 타박했다.

    “나야 건강하지. 주치의야말로 왜 이렇게 얼굴이 반쪽이 됐어?”

    “하하…….”

    주치의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심각하게 물었다.

    “진짜 살도 빠진 거 같은데. 돌아온 것도 급하게 돌아왔잖아. 무슨 일이야? 북부 겨울이 추웠어? 마법학교에서 힘든 일 있었어?”

    “아닙니다. 이제 저는 빠져야 할 때인 것 같아서요.”

    주치의가 말을 이었다.

    “공녀님께서 마법사라고 공표하시고 나서 이번에 마법학교도 개방하셨잖습니까. 교사들도 모집하시고요.”

    “그래서 그런 거야? 누가 개국공신을 구박해? 말만 해! 교감 자리 만들어 줄게!”

    “아닙니다!”

    주치의가 펄쩍 뛰었다.

    “그게 말입니다…… 애들 데리고 처음에 마나 연구할 땐 저도 즐거웠는데, 마법사라고 해도 애들은 애들이더라고요. 감당이 안 돼서…….”

    “아, 아아…….”

    어쩐지 이해가 갈 것 같아서 레아는 숙연해졌다.

    “적성에 안 맞는 교사 생활에 진이 다 빠진 거였구나. 하긴, 평생 의술과 약재만 판 주치의에겐 힘든 일이었을 거야.”

    “……크흡.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고생을 공감받은 주치의는 조금 기운을 되찾았다. 그는 왜 피어트 가문의 저택이 아니라 연구소로 돌아왔는지도 설명했다. 교사 생활에 기가 빨린 나머지 사람 없이 자연을 느끼러 루이지의 약초밭에 놀러 다니다가, 약초술에 푹 빠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특히 루이지 씨가 가꾼 약초들로 효능을 조합해 보니까 이게 꽤 재밌지 뭡니까.”

    “호오, 그래? 산삼을 넣은 건가?”

    “예. 이 용액이 산삼 추출물입니다.”

    헬릭스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지금 연구하고 있던 게 뭔가? 내가 느끼기엔 감기약 같은데.”

    “바로 아셨습니까? 어떻게?”

    주치의가 놀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헬릭스는 들어와서 실험대를 한번 쳐다보기만 했던 것이다.

    “약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니 쓰인 약재 종류를 알겠더군. 그 약재들을 조합하는 거라면 감기약일 것 같았네.”

    “허어.”

    주치의는 혀를 내둘렀다.

    “헬릭스 님이 범상치 않은 능력자라는 건 알았지만, 정말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감기약은 원래 파는 거 있지 않아? 재출시하려고?”

    레아가 물었다. 주치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는 품질 좋은 감기약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리케일 소공작님이 몸살을 앓고 계시잖습니까? 며칠 쉬셨는데도 낫지 않으시는 걸 보니 독감 기운이 아닌가 싶어서.”

    “독감이라.”

    “예. 이번 겨울이 좀 일러서인지 벌써 독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치의의 말에 레아가 헬릭스를 쳐다봤다.

    “헬릭스, 저거 만드는 데 협조해 줄 수 있어?”

    “그야 어렵지 않다만. 무슨 생각인가?”

    그녀가 눈을 빛냈다.

    “약을 많이 비축해 놓으려고.”

    ❀ ❀ ❀

    레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 큰오빠를 위해 만들던 약이면 효과는 확실하겠지.”

    “그야, 약효는 자신합니다.”

    주치의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폈다.

    “저와 다른 연구원들이 열심히 만든 약입니다. 농도 조절하는 법만 보강하면 완성입니다.”

    “잘했네. 이걸 시장에 상품으로도 내 보자.”

    오랫동안 아프다 보니, 그녀는 독감이나 병의 유행에 민감했다. 이 세계는 아직 약 종류가 너무 적었다. 약을 구하기도 힘든 편이었고. 그러니 그녀 하나 살려 보겠다고 피어트 공작가에서 제약사업을 벌이지 않았겠는가.

    레아가 말했다.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되기 전에 시장에 감기약 종류를 더 풀어 두면,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줄 거야.”

    “역시 레아 너는…….”

    헬릭스가 막 감동에 휩싸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음흉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새 싼 감기약으로 명성과 민심을 얻은 뒤에, 고급 버전을 출시하는 거지. 후후후…… 산삼이랑 꿀을 왕창 넣은 특급 감기약을!”

    주치의가 감탄했다.

    “오오, 그거 잘 팔리겠군요!”

    “그럼! 일명 프리미엄 감기약! 귀족들한테 비싸게 팔아먹을 거야!”

    헬릭스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레아 너는 가끔 사기를 치는 건지 좋은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돈과 민심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해 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헬릭스가 말했다.

    “싼 감기약 쪽이라면 나도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더 값싼 재료로 비슷한 효과를 내면 더 많은 양을 만들 수 있겠지.”

    레아가 방긋 웃었다.

    “좋아! 원가 절감은 언제나 환영이야.”

    ❀ ❀ ❀

    트로우 백작과 얀 트로우 경. 두 부자는 오랜만에 다시 의기투합했다.

    울며 겨자 먹기 상황에다 악에 받치기까지 한 그들은 망설일 게 없었다. 둘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황태자의 명령을 이행하면서 자신들은 빠져나갈 수 있을까?’

    백작이 먼저 수를 내놓았다.

    “레아 피어트와 붙어 다니는 그 은발 놈을 공격하는 게 어떻겠느냐? 샤리트 대공이라니, 어느 망해 자빠진 소국의 작위인지는 몰라도 대공까지 달고 나타나다니, 고깝게 여기는 치들이 많을 거다. 귀족을 사칭하는 사기꾼이라고 몰아가면 어떻겠느냐?”

    트로우 경은 자신 없어 했다.

    “지금 그랬다간 광장에서 돌팔매질 당할 분위기인데요.”

    “그래도 그 반반한 은발 놈을 엮어서 추문을 내면 먹히지 않을까?”

    “레아 피어트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수도 사람들이라면, 그년이 우리 저택에 불꽃 비를 내린다고 해도 박수할걸요.”

    게다가 레아 본인도 가문 사업 때문에 참여하는 것뿐이지, 사교계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교계에 추문을 퍼트린다면? 옳다구나, 이때다 하고 ‘더러워서 페이런 사교계 못 해 먹겠네요!’ 하고 발표하리라.

    “그럼 사람들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페이런에서 마법사가 나왔다고 축제 분위긴데.”

    “……스캔들 낸 자들을 죽이려고 하겠지.”

    백작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 은근히 영악한 년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러 도시연합에 머물다 오겠어요!’라고 휙 요양이니 휴가니 떠나면, 수도 사람들이 다 들썩들썩할 거다.”

    “다들 횃불을 들고 우리 저택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릅니다.”

    왜 레아 피어트가 마법까지 할 수 있게 되어서 이 사달인지. 트로우 경이 입술을 깨물 때였다.

    “그럼 피어트 공작가를 흠집 내는 건 어떻겠느냐?”

    귀가 번쩍 뜨였다. 역시 제 아비는 이런 모략 쪽에선 머리회전이 남달랐다.

    레아 피어트 개인을 상대할 수 없으면 뒷배이자 몸체인 피어트 공작가를 공격하잔 이야기 아닌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사람들이 다들 열광하고 있는데요.”

    “리케일 피어트가 있지 않느냐.”

    트로우 백작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맺혔다.

    “소공작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려던 트로우 경이 입을 다물었다. 리케일 피어트 소공작이 만만치 않고, 젊은 나이에 수완가이긴 했다. 그렇지만 루얀 피어트는 소드마스터고, 레아 피어트는 화염마법사.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어.’

    그에 비해 리케일 피어트가 이끄는 건 피어트 가문 소속의 상단 몇 개였다. 그나마 무력에 비해 수작이라도 걸어 볼 만한 게 상단 싸움이었던 것이다.

    “좋은 계획이 있으십니까?”

    “겨울이니 감기나 폐렴에 좋은 약들이 제법 팔리겠지.”

    트로우 백작이 말했다.

    “우리가 피어트 상단의 약을 베껴서 팔아 보자꾸나.”

    ❀ ❀ ❀

    며칠 후 수도 어느 골목에 위치한 작은 약국.

    “정말 이 가격에 이 약들을 주신다고요?”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약국주인은 값을 치르면서도 자꾸만 수레와 상자들을 흘깃댔다.

    요즘 인기 좋아서 웃돈까지 얹어 줘야 하는 피어트 상단의 약 상자들이었다.

    “아니, 제값을 받을 물건을 헐값에 넘긴다니까 그러지요.”

    갑자기 나타난 상인은 이 약들을 깜짝 놀랄 만큼 싼 가격에 팔겠다고 했다.

    약국주인의 의심에 상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재수 좋은 줄 알아. 이게 원래 이 가격에 나갈 물건이 아닌데, 공작가가 요새 서슬이 퍼러니까 빨리 치우는 거야.”

    “그 말씀은?”

    “빼돌린 물건이라 이거지. 창고지기도 가끔 술값이라도 벌어야 하지 않겠어?”

    “아아, 그래서…….”

    어느새 같이 목소리를 낮추는 약국주인이었다. 장물을 사는 셈이었으나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런 물건이면 이 가격에 넘길 만하지.’

    얻어걸린 횡재에 약국주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재빨리 상인에게서 약 상자들을 받아 값을 치렀다.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상인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럼 난 가 보겠네. 누가 묻거든 내 얘긴 입 다무는 거야. 알지?”

    “예, 예. 그럼요!”

    상인의 수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약국주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상자를 끌어안았다.

    “어이차! 이걸 다 제값 받고 팔면 얼마야? 허허 참 재수가 좋으려니…… 어이쿠.”

    가득 찬 약 상자엔 물약이 많았는지, 생각보다 무거웠다. 비틀대는 그의 동작에 상자에서 병 몇 개가 미끄러졌다.

    “어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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