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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84)화 (84/120)

84화

황태자 본인은 그렇다 쳐도 평민인 게 빤한 그 부하 놈들까지 귀족인 자신을 무시하고 반말을 찍찍 해 대다니. 그런데 그걸 참고 견뎌야 하다니. 혈압이 올라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뱀 기사단원이 그런 그의 주름진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대가리를 굴려 봐, 백작. 네가 그나마 잘하는 게 그거라며?”

❀ ❀ ❀

콩콩.

“쿠앙아, 또 왔어?”

레아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면서도 테라스 문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버릇을 잘못 들이면 안 되는데…….”

“쿠앙.”

“넌 똑똑하고 깜찍하니까 알아서 버릇 있게 행동할 거라고?”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쿠앙이의 주둥이를 살짝 꼬집었다.

“말은 아주 청산유수야. 누굴 닮아서 이러니?”

“쿠옹.”

레아 닮았지. 쿠앙이는 뿌듯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저는 레아를 닮아 깜찍하고 귀엽고 똑똑한 해츨링이었다.

“쿠왕쿠왕.”

쿠앙이는 신나서 꼬리를 흔들며 레아의 침대로 달려가 폴짝 뛰어올랐다. 레아가 웃는 얼굴로 그 옆에 앉아 쿠앙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은 부드럽고, 레아의 한숨은 옅어져 있었다.

‘쿠쿠쿠.’

쿠앙이는 저 스스로가 대견했다.

지난번에 일부러 난리를 피워 레아와 헬릭스를 밖으로 내쫓았던 보람이 있었다. 나갔다 온 이후에 둘은 괜히 서로 쭈뼛거리는 것도 줄고, 레아의 얼굴빛도 한층 밝아졌으니까.

뿌듯해하며 레아의 손길을 즐기는데,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쿠앙아. 드래곤의 성녀는 반납 안 되겠지?”

쿠앙이는 정말 놀라서 화들짝, 발톱으로 시트를 긁을 뻔했다.

“쿠왕?!”

“아니, 쿠앙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쿠앙이는 정말 귀엽지. 근데 헬릭스가 말이야…….”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쿠앙이는 떨리는 앞발로 레아를 쿡쿡 찔렀다. 얼른 더 얘기해 보란 신호였다.

“헬릭스는 사실 드래곤을 엄청 미워하거든.”

“쿠우……?”

쿠앙이는 의문에 빠졌다. 미워하면서 안 죽이다니, 그 은색 인간은 그렇게 약해 보이지 않던데?

레아의 말이 이어졌다.

헬릭스가 오래전에 나쁜 드래곤한테 크게 배신당하고 이용당했다는 것, 그래서 드래곤에게 복수하려고 했다는 것. 그렇지만 쿠앙이와 다른 알들을 보자 죄 없는 알들에게 복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돌아서고 말았다는 것.

쿠앙이의 의문이 풀렸다. 은색 인간, 미련한 인간이었구나.

하지만 좀 고맙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드래곤의 성녀라고 하니까 거리감이 느껴지나 봐. 아무래도 좀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쿠왕. 쿠오앙.”

“드래곤들은 내 편이라고? 그건 고맙네.”

“쿠와앙.”

“진짜라고? 진짜진짜 변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하하, 알았어.”

레아가 웃어넘기는 걸 보며 쿠앙이는 속으로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이 성녀는 자신과 드래곤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드래곤에게, 세상은 세 가지 생물로 나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보다 약한 놈들, 더 강한 드래곤들, 좀 특이한 놈들. 약한 놈들은 지루하고 강한 드래곤들은 눈치를 봐야 했으며 특이한 놈들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성녀는 달랐다.

약하고 특이한데 강했다. 그리고 드래곤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들의 감정을 알아주었다.

“쿠옹.”

정말 좋아서, 쿠앙이는 레아의 손에 제 머리를 비비며 걱정했다.

이런 성녀가 성녀 노릇을 안 하겠다고 하거나 드래곤을 진짜 싫어하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은색 인간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쿠앙이는 고민했다.

드래곤은 성녀를 매우, 엄청 좋아한다. 성녀는 은색 인간을 좋아한다. 은색 인간은 성녀를 무지무지 좋아하지만 드래곤을 싫어한다.

결론은 하나였다.

‘은색 인간이 드래곤을 싫어하지 않게 만들어야 돼!’

쿠앙이가 보기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어쨌거나 알들을 깨트리지 않았으니까!

“쿠앙.”

쿠앙이는 결심하며 작게 울었다.

❀ ❀ ❀

한편 트로우 백작가의 수모는 끊이지 않았다. 백작이 황태자가 남겨놓고 간 뱀 기사단원들에게 쪼이는 동안, 장남 얀 트로우도 단골 비밀클럽의 입구에서 제지당했던 것이다.

“죄송하지만 저희 업장에는 출입금지십니다.”

트로우 경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경비원을 쳐다봤다. 그가 제 호위에게 고개를 까딱하자 호위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검을 꺼내기도 전에 덩치 큰 클럽 경비원들이 그와 호위를 막아섰다.

“뭐야?”

트로우 경이 울컥했다.

“감히 귀족을 막아? 내가 누군 줄 알고…… 마담 나오라고 해!”

“돌아가시지요.”

“이 배은망덕한 것들, 내가 팔아 준 게 얼만데! 막아 준 사고는 몇 개고! 내가 입을 열면 이깟 클럽은 그냥……!”

“트로우 경.”

경비원 중 나이가 있는 자가 웃는 얼굴로 나섰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당신 때문에 손해가 얼만지 아십니까?”

“아니, 그깟 뒤채 좀 태웠다고…….”

“마담이 아주 골치 아파하십니다. 그 불과 재판 때문에 우리 클럽이 더 이상 비밀클럽이 아니게 되었잖습니까?”

얼굴은 웃고 있지만 목소리는 잔뜩 낮춘 채 이를 갈고 있었다.

“손님들이 오질 않는단 말입니다. 여자들 사이에도 소문나서 일하겠다고 오는 애들이 없고요. 그러니 트로우 경을 모실 여력도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지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눈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힘없는 여자들을 농락하다 죽이는 것밖에 없는 찌질한 귀족 도련님을 보는 눈이었다.

“이, 이놈이…… 감히 귀족에게!”

기세에 눌린 트로우 경이 씩씩댔다. 이대로 나가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쳐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였다.

“이게 누구야? 트로우 경 아니야?”

더포드 남작이었다.

그사이 살이 더 찌고 얼굴이 훤해진 그가, 여자와 팔짱을 낀 채 트로우 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직 수도에 있었네? 결투하고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군?”

“어머나, 남작님!”

트로우 경은 상대도 안 하던 마담이 드레스 자락을 들고 쫓아 나왔다.

“어머, 오셨으면 얼른 들어오시지 않고! 너무 오랜만이세요!”

“하하, 우리 아기가 마담이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호호호. 아이참, 언제 봐도 보기 좋으세요. 안나는 점점 더 예뻐지네?”

더포드 남작은 마담과 하하호호 떠들었다. 트로우 경이 얼빠진 얼굴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저 인간이 저런 인간이었나?’

그러고 보니 옆에 낀 여자도 남작이 평소 쫓아다니던 절세미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범한 외모에 나이도 좀 있어 보이는데?’

그런 여자를 향해 더포드 남작이 눈을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우리 아기, 오래 서 있으니 다리 아프지?”

느끼함이 줄줄 흐르는 목소리에 여자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더포드 남작의 팔을 껴안았다.

“남작님 옆에 있으면 하나도 안 힘들어요.”

“오늘 여기 온 김에 꼭 찾아봐야겠어.”

“뭘요?”

“우리 아기 날개. 여기서 날개를 잃어버리고 내게 와 준 게 분명해.”

“아이참, 남작님도. 그런 건 찾지 말아요. 우린 이미 운명인걸요?”

“우리 애긴 어떻게 이렇게 이쁜 말만 하지? 맞아, 우린 운명이지.”

트로우 경은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남의 오글거리는 애정행각이라니. 게다가 느끼한 말을 해 대는 남자는 그가 싫어하고 무시하던 더포드 남작이라니.

눈살을 찌푸리는 트로우 경을 클럽의 경비원들이 막아섰다.

“귀한 분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시지요.”

“이, 이익……!”

트로우 경이 부들댔다.

‘저 반푼이 남작 놈은 귀한 분이고, 난 쫓아낸다 이거냐?’

그런 그에게 더포드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꺼지면 보복은 하지 않겠네.”

“…….”

“자네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 하나 있으니 참아 주는 거야. 자네가 날 납치해서 여기 뒤채에 가둬 둔 덕분에, 우리 아기가 날 발견하고 극진히 돌봐 주었지. 덕분에 사랑의 힘으로 살아나 여기 있을 수 있게 된 거고.”

더포드 남작의 둥근 얼굴에 우월감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네놈은 이런 진짜 사랑을 모르겠지.”

뒤채의 별 볼 일 없는 매춘부였을 여자가 그 팔에 매달려 딱하다는 눈빛으로 트로우 경을 쳐다봤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트로우 경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저 연놈들이 날 비웃어?’

차라리 자기를 가두고 죽이려 했다고 멱살잡이라도 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그런데 비웃다니.

‘루얀 피어트도 아니고,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도 아니고!’

속으로 모자란 놈 취급하던 더포드 남작. 원래대로라면 그와 눈도 못 마주칠 천한 여자. 그들이 저를 향해 저런 눈빛을 쏴 대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혈압이 오른 그는 유흥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재빨리 백작가로 향했다.

쾅!

그리고 곧바로 트로우 백작의 집무실로 쳐들어가 외쳤다.

“아버지, 우리가 이대로 당할 순 없습니다!”

❀ ❀ ❀

피어트 공작가 저택의 한 발코니.

헬릭스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레아의 방에 불이 꺼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사히 잠들러 가는 것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이 정도인 줄 몰랐다.

그녀가 드래곤의 성녀여도 옆에 있어야 할 정도로 좋아하게 될 줄은. 못 보면 미칠 것 같아서 결국 돌아오게 될 줄은 정말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즈라…….’

결국 이런 거였던가. 그녀를 드래곤의 성녀로 정해 놓고, 나를 깨우고 엮이게 만들어서 내가 드래곤을 해치지 못하게 할 셈이었나.

‘아즈라 네가 나타난다면 죗값은 네놈이 받으면 될 것인데.’

아즈라가 없다면 놈이 지키려던 드래곤이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알들이 복수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부당했다.

‘그렇지만 알들을 지키기 위해 아즈라는 나와 마법사들을 배신했고, 알들이 깨어나면 역시 위험한 드래곤들이 될 게 아닌가?’

헬릭스가 고민할 때였다.

“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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