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쿠앙이가 파닥거리며 내려와 레아의 어깨에 앉았다.
“쿠앙. 쿠오앙.”
“산책을? 너도?”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쿠앙이는 안 돼. 위험하니까.”
“쿠왕!”
“나갔다가 나쁜 사람들이 잡아가면 큰일 나. 그럼 나도 다시 못 봐.”
“쿠오왕!”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
따라가겠다는 쿠앙이와 실랑이하는 레아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릭스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다 알아듣는 건가?”
“응? 그냥 느껴지던데?”
“…….”
아차. 지금 너무 드래곤의 성녀 같았나. 눈을 굴리는 그녀에게 헬릭스가 말했다.
“크흠. 그 해츨링은 마차에 타는 걸 싫어하더군. 그러니…….”
그가 제안했다.
“산책이 아니라 아예 마차를 타고 나갔다 오면 어떻겠나?”
❀ ❀ ❀
오랜만에 나간 수도의 시내는 붐볐다.
태양제가 시작되고 연말연시 기분이 최고조에 올라, 상점 진열대엔 반짝이는 선물들이 쌓여 있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들떠 보였다.
“와아, 이런 분위기 오랜만이네! 크리스마스 같다.”
“……크리스마스? 태양제를 말하는 건가?”
“응? 으응. 태양제 때는 이렇게 분위기가 들뜨잖아. 근데 작년까진 이때쯤에 꼭 독감으로 앓고 있어서 거리에 나와 본 적이 없었거든.”
헬릭스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레아를 쳐다보았다.
“이런 분위기, 레아 너와 잘 어울리는데 말이다.”
“그치? 제가 태양제 개막공연도 했던 몸입니다. 에헴.”
“그 공연은 나도 봤다.”
그의 말에 그녀의 눈이 잠깐 커졌다.
“……안 봤다고 하면 좀 서운하려고 했는데.”
“봤으니까 마법까지 쓴 거 아닌가.”
레아는 무덤덤하게 말하는 헬릭스를 흘깃 올려다봤다.
‘내가 그렇게 신경 쓰였어? 내가 황태자랑 결혼하는 게 그만큼 싫었어? 그래서 지켜보다 사절단 천막에 벼락까지 쏜 거야?’
묻고 싶어서 목 안이 간질간질했다.
그 안개 같은 구름 안에서, 자신이 날아오는 걸 보며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너를 붙잡은 게 정말 괜찮았냐고, 지금 내 옆에 있어서 좋은 거냐고 확인받고 싶었다.
“레아, 왜 그러나?”
그녀가 침을 꼴딱 삼켰다.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나 공연비 줘.”
“공연비?”
“응. 구경 잘했지? 그러니까 나 저거 사 줘.”
레아가 눈앞의 가판대를 가리켰다. 헬릭스가 피식 웃었다.
“와플 하나로 되겠나?”
“생크림이랑 초코 휘핑도 얹어 먹을 건데.”
“과일도 먹게 딸기도 넣어라.”
“헬릭스도 먹어.”
둘은 사이좋게 와플을 들고 먹으며 거리를 걸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약간 소란스러운 거리의 소음들, 거리를 채운 가판대에서 풍기는 달콤한 간식거리의 냄새. 기분이 들떠서 레아는 많이 웃었다.
자잘한 장신구를 파는 가판대 앞에서 그녀가 파란 귀걸이를 들어 올렸다.
“헬릭스, 이거 나랑 어울릴 거 같지 않아?”
“아이고 아가씨, 보는 눈이 있으시네. 이 디자인이 요즘 유행이랍니다. 아주 예쁘죠? 원석이라 가격도 싸요.”
“음…….”
헬릭스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레아 네가 원래 예뻐서 잘 모르겠다. 뭐든 잘 어울리지 않나.”
“호호호! 남자친구분이 아주 얼굴만큼 말씀도 잘하시네!”
남자친구라는 말에 굳어 버린 헬릭스가 뻣뻣하게 말했다.
“진실이다.”
“그럼요, 그럼요. 제가 진짜 싸게 드릴게! 두 분이 잘 어울리니까!”
마지막 말에 그만 헬릭스의 지갑이 무방비하게 열렸다. 그가 이걸 사 줄 줄 몰랐던 레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진짜?”
“받아라.”
“우와.”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 지금 헬릭스랑 데이트하다 선물도 받은 거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레아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예뻐.”
“……늘 말하지만 네가 훨씬 더 예쁘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헬릭스가 서툴게 말했다. 그게 어쩐지 더 좋아서 그녀가 꽃처럼 미소 지었다. 그가 움찔했다.
“…….”
헬릭스는 눈부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레아.”
“어머, 마법사님!”
옆 가판대에 있던 소녀들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차려입은 드레스와 멀리서 기사들이 대기하는 걸 보니 귀족 영애들 같았다.
“여기서 이렇게 우연히 뵙다니! 역시 운명이야!”
“꺅! 저희 불꽃의 마법사 팬클럽인데! 한 번만 손잡아 주세요!”
뭔가 사교계에서와 다른 열렬한 반응이었다.
“네? 어? 네?”
레아는 휘말려서 어어 하는 사이에 양손을 하나씩 영애들한테 잡혔다.
‘그런데 이 영애들 옷이……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녀가 얼떨결에 두 소녀의 손을 잡고 흔들며 그들의 드레스를 쳐다보았다. 소녀들이 수줍게 웃었다.
“마법사님이 태양제 축제 때 입으셨던 드레스랑 비슷하죠?”
“요즘 유행이에요. 저희도 예약 진짜 빨리했는데, 어제 찾았어요!”
그랬다.
레아가 마법사라고 공표하던 때 입었던 드레스와 거의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피어트 공작가만큼 돈을 바르진 못했지만 디자인이라도 흉내 내려고 애쓴 게 티가 났다.
‘짜, 짝퉁?’
당황한 그녀가 물었다.
“어, 어디서 샀나요?”
“바로 옆 골목 양장점이요!”
“저는 대광장 쪽 리셔스 드레스샵에서 샀어요!”
그녀가 말을 걸어 준 게 좋았는지 소녀들이 발간 뺨으로 얼른 대답했다. 소녀들과 헤어진 레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확인하고 싶긴 한데…… 뭔가 무서운 걸 보게 될 거 같은데…….”
“괜찮다, 레아. 내가 같이 가 주겠다.”
그녀는 긴장해서 헬릭스와 함께 옆 골목으로 가 보았다.
드레스샵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의 유리창마다, 레아가 마법사라고 공표하던 때 입었던 드레스며 장신구들을 흉내 낸 물건들이 전시 중이었다.
이름도 붙어 있었다.
‘마법사의 검은 드레스’, ‘붉은 화염의 로브’, ‘불꽃 액세서리 세트’…….
“으아아!”
레아는 경악했다.
“이게 뭐야!”
한결같이 오그라드는 이름들이 꼭 전생 게임 아이템 같았다.
“뭐가 문제인가? 레아 너와 잘 어울리지 않나.”
“……진심이야?”
레아가 헬릭스의 유리알 같은 회색 눈동자를 쳐다봤다.
“당연히 진심이다.”
헬릭스의 수려한 얼굴에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신뢰 가득한 그 얼굴로 무서운 발언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역시 정신 차리고 널 대마법사로 수련시켜야겠다.”
“……잠깐,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데?”
❀ ❀ ❀
오켄의 사절단은 신년이 되자 페이런의 수도에서 떠나갔다. 페이런 사람들은 수군댔다.
“레아 피어트가 마법사인 게 밝혀지니 포기하고 떠난 건가?”
“오켄 놈들이면 마법사인 줄 알고 더 손에 넣으려고 들 줄 알았더니,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지?”
아니었다.
진상을 아는 트로우 백작은 푹, 한숨을 쉬었다.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는 양심 같은 걸 키우는 놈도 아니었고 마법사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떠나기 전 트로우 백작가에 소수 병력을 남기며, 황태자는 트로우 백작을 압박했다.
‘일단 본국의 상황을 보러 돌아가지만.’
그가 서늘한 시선으로 백작을 뚫을 듯이 보며 말했었다.
‘진전이 없을 시에는 나머지도 철수시키겠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트로우 백작이 손을 떨었다.
황태자의 병력이 빠지면 그다음에 들이닥치는 건 누구겠는가?
세이건 공녀와 더포드 남작 사건 때 칼로시 대공에게 멸문당할 뻔하다, 때마침 오켄 황태자의 손을 잡아 기사회생했던 트로우 백작가였다.
‘칼로시 대공이 우리 가문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황태자가 심어 둔 뱀 기사단이 사라지는 날 칼로시 대공이 움직이리란 건 불을 보듯 빤했다. 왕실도 세이건 공작가도 피어트 공작가도 침묵으로 지지하리라.
그러니 막아 줄 황태자한테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는데, 황태자는 나날이 얼토당토않은 요구만 하고 있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레아 피어트를 데려와라.’
‘실험을 크게 확대해라. 희생자가 얼마가 나와도 상관없다.’
백작은 가슴을 쳤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위험했는데, 여기서 더 하라니!’
그러잖아도 과거의 여러 업보로 눈총받고 있는 트로우 백작가였다. 감시하는 눈길들도 예전보다 훨씬 많이 느껴져서 제대로 운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쪽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일을 벌이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트로우 백작은 후회했다.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 냉혹한 자가 유독 레아 피어트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싸고돌더라니. 남녀 간의 연정인 줄만 알고 황태자가 시키는 대로 페이릴리 정보도 계속 갖다 바치고, 납치도 도우며 애썼다.
그런데 황태자는 자신을 부리기만 할 뿐, 레아 피어트가 마법사가 되었다는 핵심정보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후우.”
하나 이 수밖에 없는 트로우 백작이었다. 오켄 황태자의 줄이라도 없으면 적이 가득한 페이런에서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백작은 정신 승리하려 애썼다.
‘살아날 줄이 끊어지지 않은 게 어딘가. 앞으로 어떻게든 만회하면……!’
쾅.
그의 다짐을 박살 내듯이 거칠게 문이 열리더니,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황태자가 남기고 간 뱀 기사단원들이었다.
“백작, 아주 신수가 훤해?”
뱀 기사단원 하나가 시비를 걸듯 껄렁거리며 가까이 왔다. 우르르 몰려온 다른 이들도 책상을 둘러쌌다.
놈이 진흙이 묻은 부츠를 집무실 카펫에 문대며 백작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전하께서 귀환하셨다고 빠져 가지고. 제대로 일하라고.”
“하, 하고 있다.”
뱀 기사단원이 코웃음을 쳤다.
“하긴 뭘 해? 빨리 마법사를 데려올 계획을 짜야 할 판에, 어떻게 전하 눈을 피할까 전전긍긍하기나 하면서.”
트로우 백작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냥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도 그의 속마음을 잘 읽었던 것이다.
다른 뱀 기사단원이 끼어들었다.
“귀족 놈들은 이게 문제야. 책상 앞에 앉아서 헛생각이나 하고, 버터 처바른 쿠키나 처먹고 있으니 턱살이 저렇게 늘어지지.”
“콩알만 한 나라 놈들이 말이야, 빠릿빠릿하게 제대로 일하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말이야.”
“그런 놈들이 우리 위대한 제국에게 빌붙으려 하겠어?”
조롱하는 말에 트로우 백작이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