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82)화 (82/120)
  • 82화

    그녀의 머리칼에 코를 묻고, 향기를 들이마셨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레아.”

    그녀의 향기를 맡고,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레아.”

    그가 조급하게 부르며 몸을 떼고 레아를 황홀하게 쳐다봤다.

    어둠 속. 지상에서 올라오는 빛도, 붉은 어둠에 묻힌 별빛도 약한 밤. 그의 눈앞에 있는 레아의 얼굴과 백금발만이 찬란했다.

    “너는 어떻게 이렇게 예쁜 건가.”

    레아가 웃었다.

    “내가 예쁜 거 나도 알아.”

    “아니다. 너는 모른다.”

    헬릭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었다.

    “내 눈에 네가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빛나는지.”

    헬릭스가 뜨거운 숨을 뱉으며 속삭였다.

    “너를 볼 때 세상이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그 순간 반짝이는 것이 둘 사이로 떨어졌다.

    첫눈이었다.

    깃털처럼 날아다니던 눈송이가 헬릭스의 눈썹에 내려앉았다. 레아가 그의 반짝이는 눈썹을 쓸었다.

    “너도 반짝거리잖아.”

    레아의 손이 눈썹을 닦는 사이, 눈송이는 헬릭스의 코에 붙었다. 뺨에도 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

    눈 오는 밤 특유의 부연 어둠.

    물속처럼 무거워진 하늘에 오로지 그들만이 떠 있었다. 싸라기눈이 바람에 너울너울 흩날리면서, 베일처럼 그들의 세상을 감쌌다.

    모든 게 꿈결 같은 순간, 헬릭스의 커다란 손이 레아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깨질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에 레아의 입술에서 웃음이 새었다. 그 숨을 머금으며 헬릭스가 키스했다.

    ‘뜨거워…….’

    레아가 몽롱하게 생각했다.

    뺨과 손에 느껴지는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

    얼어붙은 입술.

    헬릭스가 잡은 목덜미와, 입술 안의 숨만이 뜨거웠다.

    뜨거운 숨에 할딱이던 레아가 헬릭스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본능적으로 그에게 매달리는 모습에 헬릭스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레아.’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며, 작은 동물처럼 숨을 몰아쉬는 레아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생리적인 눈물이 맺힌 눈가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헬릭스가 그 눈송이를 입술로 훔쳤다.

    “하으…….”

    간지러움을 참는 앓는 소리에, 헬릭스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레아는 비행마법을 포기하고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헬릭스의 체온만이 생생했고.

    눈을 뜨면 밤을 등진 헬릭스만이 보였다.

    이 어둠과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남자가 레아를 보고 있었다. 그녀만이 세상 전부라는 듯이.

    레아는 헬릭스를 꽉 껴안았다.

    ‘다시는 잃지 않을 거야.’

    ❀ ❀ ❀

    오켄 제국의 사교계는 황태자의 청혼 실패 이후 술렁이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이황녀를 지지하던 귀족들이었다. 기반 없는 아르카이크 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오른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던 그들에게 이번 일은 좋은 안줏거리였다.

    “왜 페이런 같은 소국의 공녀에게 청혼하나 했더니, 마법사였다면서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페이런의 공녀가 오켄의 황태자비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후궁으로 들여도 말이 나올 판인데…… 어째 이상하다 했습니다.”

    “아르카이크 황태자님은 보기보다 음험한 분이시네요. 마법사인 것을 혼자만 알고 청혼이란 수를 쓰시다니.”

    누군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수만 쓰면 뭐 합니까? 그런 귀한 마법사를 결국 사로잡지도 못하고 돌아왔잖습니까.”

    “맞는 말씀이에요. 원한만 만든 셈 아닌가요?”

    어리석은 술수였다, 역시 폭군의 자질이 있다, 드래곤의 잔혹함이 어디 가느냐. 수군대는 말들은 끊이지가 않았다.

    ‘……날파리 같은 것들이.’

    아르카이크 황태자가 이마를 짚었다.

    귀족들이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은 했었다. 그렇지만 나쁜 일이 겹치자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마법사에게 한 청혼 실패, 맹약자로 알려진 드래곤 본체의 큰 부상. 두 가지 사건은 마법능력과 드래곤 친화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황태자의 입지를 흔들고 있었다.

    역시 인간은 드래곤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도 없었다.

    ‘드래곤 본체에서 아르카이크의 영혼이 얼마나 버텨 줄지 모른다.’

    제국의 멸망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악착같이 견디고 있는 황자의 영혼이었다.

    “트로우.”

    “예.”

    호명하자 그림자처럼 나타난 뱀 기사단원이 대답했다. 황태자가 물었다.

    “준비는 잘 되고 있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페이런의 트로우 백작은? 놈이 잘 따를 것 같은가?”

    “황태자님의 은혜로 가문을 겨우 구한 놈이 아닙니까? 저희가 놈이 잘 따르도록 만들겠습니다.”

    충성스러운 대답을 들으면서 황태자는 서쪽의 작은 왕국을 떠올렸다.

    “페이런부터 멸망시키는 게 좋겠어.”

    건방진 놈들이 잔뜩 있는 나라였다. 감히 제 사절단을 향해 돌을 던지던 어린애, 눈과 입으로 모두 욕하던 평민들, 그리고 그의 마법사.

    “……너만은 살려 둬도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늦었다. 이미 계획은 시작되었고, 인간은 끝나야 했다.

    ❀ ❀ ❀

    마법사 공표 후, 피어트 가문의 인기는 치솟았다.

    마침 오켄의 사절단이 돌아간 것도 인기가 올라가는 데 한몫했다.

    “마법사를 강탈하려다 들통나니 도망친 게지!”

    “썩을 제국 놈들!”

    사실은 제국 내부사정이 더 급해서 돌아갔지만, 시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니 사람들은 좋을 대로 해석했다.

    물론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아니, 마법사였으면 왜 지금껏 숨기고 가만있었던 거래?”

    “루얀 피어트가 소드마스터인 것도 그렇고, 영 의심스럽단 말이야. 꼭 몰릴 때에만 하나씩 까 보이는 게 영…….”

    그렇지만 페이런의 여론은 이미 흥분상태였다.

    전 대륙에 전설로만 떠돌던 검기와 마법. 그런 힘을 소유한 소드마스터와 마법사가 페이런 왕국에서 나왔지 않은가!

    거대한 강대국 오켄 제국도, 엄청난 부를 쌓은 도시연합도 가지지 못한 힘이었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섣불리 알리지 못하고 숨기셨던 거겠지!”

    “맞아! 아주 헐뜯는 폼이 트로우 백작가 같은 놈들이라니까!”

    “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의심하던 사람이 벌컥 화를 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피어트 공작가를 헐뜯으니 그게 트로우 백작가 같은 놈이지 뭐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트로우 백작 취급하다니……!”

    그런데 이번 인기는 좀 특이했다.

    사교계 초대장만 빗발치는 게 아니라, 상단의 물건들도 더욱더 잘 팔렸던 것이다.

    요즘 피어트 상단의 주력상품은 화장품과 약들.

    레아가 공개적으로 마법사인 걸 밝히고 나자, 불똥은 예상 못 한 방향으로 튀었다.

    “아니, 마법사가 있는 상단에서 만든 약이잖아? 당연히 좋겠지!”

    “어쩐지 피어트 상단의 약들이 품질이 좋더라니. 마법의 힘이었나?”

    아니었다.

    품질은 잘 만들고 열심히 연구해서 높여 놓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기회를 놓칠 리케일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법 같은 품질의 피어트 상단입니다. 어떤 물건을 거래하시겠습니까?”

    몰려드는 거래 요청에 야근을 하면서도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리케일이었다.

    ❀ ❀ ❀

    페이런에서 인기는 치솟고 있었지만 정작 레아 본인은 답답했다.

    “헤유.”

    그녀는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다 좋아 보였다. 걱정하던 청혼도 해결되고, 헬릭스도 돌아왔으니까.

    ‘마음도 통하고 첫 키스도 했지만…….’

    눈 내리는 창공에서의 키스를 떠올리던 레아의 눈이 몽롱해졌다. 그녀가 얼른 제 뺨을 가볍게 탁탁 때렸다.

    ‘그치만 중요한 게 해결되지 않았잖아.’

    키스 이후로 서로 의식하는 것도 있었지만, 둘은 요즘 마주쳐도 좀 어색하게 내외하고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내가 드래곤의 성녀니까.’

    드래곤의 성녀라는 거대 지뢰. 레아와 헬릭스 둘 다 모르는 척 그 지뢰 위를 까치발을 들고 걸어 다니며 눈치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놀라서, 내 드래곤 마나를 다른 드래곤 걸로 바꾸는 얘기도 쏙 들어갔지.’

    하긴 다 알들이고, 제일 일찍 깨어난 쿠앙이도 저렇게 어리니 드래곤 마나를 얻어 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난 드래곤 성녀고, 헬릭스는 그걸 모르는 척하고,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날 여전히 위협할 수 있다는 거잖아?’

    생각할수록 더 답답해진 레아가 중얼거렸다.

    “뭐가 이래?”

    콩.

    “응?”

    콩콩.

    그녀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라스 문에 쿠앙이가 매달려서 앞발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열어 달라고?”

    “쿠왕.”

    어릴 때부터 분리 교육시켜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레아가 문을 열었다.

    “에잇. 오늘만이야.”

    “쿠앙쿠앙.”

    쿠앙이가 기뻐하며 도도도, 구르듯 들어왔다.

    그녀의 침대 한편에 덥석 올라앉은 쿠앙이가 꼬리로 침대를 탁탁 쳤다. 얼른 와서 자라는 듯한 동작에 레아는 피시시 웃었다.

    “내가 못 살아, 진짜.”

    “쿠옹.”

    “그래, 그래. 잠 안 오니까 안아 줄게.”

    그녀는 쿠앙이를 쓰다듬으며 누웠다. 작은 몸을 끌어안고 서늘하고 부드러운 비늘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소로록 잠이 왔다.

    “…….”

    어느새 잠든 레아의 품에서 빠져나와, 쿠앙이는 그녀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쁜 미간이 찌푸려지고 끙끙대더니 입술이 열렸다.

    “헬릭스…….”

    쿠앙이는 레아가 잠꼬대하는 걸 보면서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잠시 침울해 있던 쿠앙이가 앞발로 그녀를 두드렸다.

    투덕투덕.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한 동작이었다. 뭔가 다짐하듯 주억거리던 쿠앙이의 고개가 톡 떨어졌다.

    “쿠우…….”

    아무리 열심히 다짐을 해 봐도 졸음을 이기긴 힘든 어린 해츨링이었다.

    ❀ ❀ ❀

    “쿠왕!”

    다음 날 아침.

    “쿠앙아! 내려와!”

    “쿠왕!”

    레아는 제 응접실에서 오늘따라 더 힘차게 날아다니는 쿠앙이를 잡으려다 헥헥댔다. 난리통에 들어와 지켜보던 헬릭스가 물었다.

    “레아, 체력이 더 떨어진 것 같은데…… 혹시 수련 안 했나?”

    그녀가 발끈해서 눈꼬리를 올리며 돌아보았다.

    “수련을 어떻게 해? 네가 없는데 수련할 마음이 나겠어?”

    “그래도 수련을 쉬면…… 아니다.”

    헬릭스가 얼른 말을 바꿨다.

    “그래서야 다시 마법훈련을 하기도 힘들지 않겠나.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

    “…….”

    “……산책하다 힘들면 말해라. 내가 마나를 넣어 주겠다.”

    함께 산책하자는 얘기를 빙빙 돌려서 하고 있는 헬릭스였다. 천장에 매달려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쿠앙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울었다.

    “쿠우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