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81)화 (81/120)

81화

“저거 속임수 아닙니까?”

“아니, 지금 시국이 어느 땐데 저런 저열한 속임수를……!”

특별석의 국왕은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있었다.

오켄 황태자의 사절단으로 인해 민심이 어수선하니, 행사를 보고 있다가 치하의 말이나 한마디 하고 가려고 했는데 엄청난 걸 봐 버린 것이다.

패트릭 왕자도 놀랐다가 깨달았다.

‘피어트 소공작이 언급한 게 이것이었구나!’

그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이번 태양제 축제의 개막 무대는 저희 피어트 가문에서 준비하게 해 주십시오.’

백성들이 기대하는 태양제 축제였다. 그 축제를 국세가 아니라 저희 주머니에서 털어 준비한다는 귀족 가문의 요청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심지어 그 가문은 피어트 공작가였다.

이미 인기가 하늘을 찔러 여기서 더 얻을 민심이 있나 싶은 데다가, 귀족들 중에서도 힘 있는 중립파에, 최근 왕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는 가문이 아닌가!

국왕과 패트릭 왕자는 얼씨구나 그러시오 하고 냉큼 허가해 주었다. 약간의 동지의식도 있었다.

‘오켄 황태자의 구애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건 피어트 가문도 똑같겠지!’

‘이번 행사로 그간의 침묵을 좀 만회하려는 모양이군!’

빠른 일처리에 리케일 피어트 소공작은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은근한 말을 더했다.

‘성의를 다해 준비할 테니, 부디 행사에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마음에 드시면 치하도 해 주시고요.’

‘……그, 그러지.’

그때는 왜 이런 말을 하나 싶었다.

‘그저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지금 눈앞에서 레아 피어트가 숨겨 왔던 마법을 드러내는 광경을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숟가락 얹을 기회를 흘리는 말이었던 것이다.

타닥.

패트릭 왕자는 이 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페이런의 불꽃이여!”

그가 단상 위로 뛰어오르며 외쳤다.

“왕자님!”

“왕자님이시다!”

갑자기 극적으로 등장한 패트릭 왕자의 모습에 백성들은 더욱 흥분했다.

“페이런의 불꽃이여.”

왕자는 그런 백성들의 시선을 똑바로 받으며 레아에게 다가갔다. 그가 또박또박 말했다.

“누가 마나의 신비를 다루는 그대를 페이런의 꽃으로 부를까.”

레아도 침착한 얼굴로, 다가오는 패트릭 왕자를 쳐다보았다.

‘역시 손잡을 상대로 패트릭 왕자를 고른 건 잘한 일이야.’

루얀의 재판 때에도 그렇고, 그에겐 언제 어떻게 나서야 하는지 아는 본능적인 정치 감각이 있었다.

“레아 피어트. 페이런의 불꽃이여.”

왕자가 차분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대는 그대의 힘을, 페이런을 밝히는 데 쓰겠는가?”

묵직한 질문에 레아가 대답했다.

“패트릭 페이런 왕자님, 제 불꽃이 페이런의 미래를 공격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홀연히 나타난 마법사.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불의 마법. 마법사를 알아본 젊은 왕자와의 서약!

생각도 못 했던 꿈같은 이야기들이 몰아치자 연단 밑의 군중들은 흥분했다.

❀ ❀ ❀

레아는 그 흥분에 기름을 부었다.

왕자에게 눈짓하며 재빨리 손을 휘둘렀던 것이다. 패트릭 왕자는 신호를 눈치채고 검을 빼어 높이 들어 올렸다.

화르륵!

왕자의 검 끝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우와아아아!”

군중들이 환호했다.

“페이런의 불꽃!”

“페이런의 마법사다!”

패트릭 왕자의 검 끝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왕자와 레아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아름답고 근엄한 모습이었다. 전설의 마법사를 눈앞에서 봤다는 데 흥분한 군중들이 외쳤다.

“기적! 기적이다!”

“멍청한 놈아, 마법이지!”

누군가 소리쳤다.

“패트릭 왕자님 만세! 페이런의 마법사 만세!”

“만세!”

“페이런의 불꽃이여 영원하라!”

❀ ❀ ❀

구경꾼들 중에는 불편한 얼굴의 사람들도 있었다.

친제국파 귀족들이었다.

“페이릴리가 마법사였다니!”

귀족들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마법이 진짜일까요?”

“그럼 저리 오랫동안 자유자재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불이 가짜겠소?”

의심하던 이들도 곧 포기했다.

문외한인 그들이 보기에도 레아 피어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불꽃은 마법이 맞았던 것이다. 걸리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왕자와 미리 짠 게 아닐까?”

“최소한 왕자는 레아 피어트가 마법사인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아니면 저렇게 빨리 반응할 수가 없어요!”

친제국파 귀족들이 입술을 짓씹었다.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영리한 동맹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 그런 강력하고 희귀한 전력을 누가 원하지 않겠는가.

마법사로 드러난 이상 레아 피어트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 권력자들이 노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왜 왕실 마법사로 임명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그녀를 왕실 마법사로 임명하면 오켄 제국이 가만있겠습니까.”

“그럼 왕자에 비해 레아 피어트는 얻는 게 없지 않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말하는 이가 멀리 동쪽을 턱짓했다. 오켄 제국이 있는 방향이었다.

“레아 피어트 쪽에서도 페이런의 마법사라고 발표해 두면 이번 청혼 같은 귀찮은 일에 휘말릴 확률이 적어지겠지요. 전력 유출이라 안 된다는 명분이 있잖습니까?”

“그런 의도가!”

한마디로 레아 피어트와 패트릭 왕자 양쪽 다 서로 윈윈하는 동맹이었다. 귀족파 귀족 하나가 허예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패트릭 왕자는…… 소드마스터와 마법사의 지지를 얻은 셈이 아닙니까?”

칼로시 대공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뿌득.

그의 입술 사이로 이가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노회한 정치인답게 감정표현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대공이었기에, 옆에 있던 아들 손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대공이 중얼거렸다.

“어린놈이 약아빠져서…….”

누굴 말하는지 명백했다. 칼로시 대공의 눈이 아들 손자들에게로 향했다.

‘너희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눈빛으로 질책당한 핏줄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레아 피어트에게 접근했던 셋째 아들 윌터와 첫째 손자 필립은 더 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찡그리던 레아 피어트의 얼굴을 떠올리자 간담이 서늘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불에 맞았을지도…….’

화르륵!

“오오!”

패트릭 왕자의 검 끝에 매달렸던 불꽃은 레아의 손짓에 거대한 유성처럼 강으로 날아갔다.

얼마나 큰 불덩이였는지 강물과 다리가 순간적으로 환해졌다.

입을 떡 벌렸던 윌터 칼로시와 필립 칼로시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통구이가 될 뻔했구나!’

‘당분간 레아 피어트 눈에 띄지 말자!’

❀ ❀ ❀

환호와 걱정과 질투로 들끓는 축제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레아는 마지막 불꽃을 쏜 뒤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내려야 하는 줄 알면서도 하얀 손이 멈칫거리며 허공을 더듬었다.

불꽃을 하나하나 쏘아 올릴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 실패할까 봐, 마법을 인정받지 못할까 봐.

그래서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의 청혼을 거절하지 못할까 봐 마음 졸이는 게 아니었다.

‘헬릭스. 정말 이럴 거야?’

그녀가 손을 거둬들이며 원망스레 하늘을 쳐다봤다.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할지도 모르는데도 안 오는 거야? 진짜?’

레아의 속도 모르고 청중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우와아! 페이런의 불꽃!”

“페이런 만세! 페이런의 마법사 만세!”

그 순간이었다.

번쩍!

예고도 없이 하늘을 가르며 낙뢰가 내리꽂혔다.

“마, 마른하늘에 웬 벼락이?!”

“오켄 사절단의 천막이다! 벼락이 오켄 황태자의 깃발에 꽂혔다!”

성질 급한 사람들이 외쳤다.

“이 결혼은 하늘이 반대하신다! 페이런의 불꽃은 페이런의 보물이다!”

“와아아!”

레아는 눈을 크게 뜨고 낙뢰가 시작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몸 주위로 바람이 불었다. 몸이 서서히 뜨고, 발이 허공으로 솟았다.

“마법사가 날고 있다!”

“세상에! 진짜 하늘로 올라가고 있어!”

아래쪽은 점점 더 경악으로 소란스러워졌지만 레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축제 현장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포도주 빛 하늘 아래, 도시의 지붕들과 불빛들이 발밑으로 작게 보였다.

무서움도, 시선도, 다 멀게만 느껴졌다. 더 올라가고만 싶었다. 하늘로 높이, 또 높이 올라서…….

와락.

차가운 구름 속에서 뜨거운 손이 튀어나와 레아를 끌어안았다.

“헬릭스?”

물어보면서도 그녀는 확신했다.

끌어안긴 순간 너무도 화가 나고, 너무도 기뻤으니까.

“진짜 헬릭스야?”

그래도 물었다. 정말 네가 맞냐고, 재차 물었다.

죽을 것처럼 레아를 끌어안은 남자는 답이 없었다. 그녀가 몸을 떼었다. 남자의 멱살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저 번개 네가 한 거잖아! 내가 황태자랑 결혼하는 거 너도 싫잖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헬릭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바르르 떨리며, 고소공포증과 추위로 파랗게 질린 레아의 얼굴을 감쌌다.

헬릭스가 애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레아가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파란 눈이 헬릭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알려 줄게.”

차가운 입술이 거칠어진 입술 위에 쪼듯이 부딪쳤다.

“내 옆에 있어.”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레아의 허리를 감싸며 속삭였다.

“다시 말해 주면 안 되겠나.”

“내 옆에 있어.”

“한 번 더 말해 다오.”

“내 옆에 있어. 떨어지지 마.”

이게 이렇게 달콤한 말이었나.

예전에 마법사와 왕들이 했을 때는 한 번도 이렇게 가슴 뛴 적이 없었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널 망치더라도?”

“그런 일은 없어. 네가 날 살렸는걸.”

레아의 차가운 손가락이 헬릭스의 얼굴을 더듬었다.

“죽지 마.”

소중하고 그리운 것을 확인하듯 떨리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말없이 희생하지도 마. 다치지도 마. 내 옆에 있어.”

“…….”

“그러면, 네가 그러면 난 드래곤의 성녀 같은 거 안 해도 돼. 네가 이렇게 내 옆에 있으면……!”

헬릭스가 급하게 레아를 제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