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80)화 (80/120)

80화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드래곤의 몸이라고 경계를 약하게 했던 게 실수였다. 황태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드래곤을 만졌다. 죽음을 앞둔 큰 짐승이 겨우 눈을 떴다 감았다.

‘시간이 얼마 없구나.’

아르카이크는 깨달았다.

맹약을 이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 종족을 말살한 게 틀림없어. 나도 너희 인간을 멸종시킬 거야.’

어린 드래곤의 독설에, 피 흘리며 찾아온 어린 황자는 환하게 웃었었다.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

‘그러니까 영혼을 걸고 계약하자.’

어린 황자 아르카이크는 제국이 멸망하기를 바랐다. 이름 없는 어린 드래곤은 인간이 멸종되기를 바랐다.

아르카이크 오켄.

제국의 일황자로 태어났지만, 어린 황자는 드래곤의 알에 피를 공급하는 가축 취급을 받은 지 오래였다.

알에서 드래곤이 깨어나면 실험이 끝날 줄 알았다. 그렇지만 황제와 황실 마법학자들은 황실의 피로 더 많은 실험을 해 보고 싶어 했다.

어린 황자의 마음속에는 증오가 자라났다. 고통과 체념이 그 증오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으려고 했어. 그런데 억울해서 이리로 온 거야.’

어린 황자의 눈이 어린 드래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도 나랑 똑같잖아. 여기 붙잡혀서 계속 피 뽑히고, 실험당하고. 죽을 때까지 갇혀 있을 거야.’

‘……그래서 뭘 어쩌자고?’

‘내 몸을 차지해.’

어린 황자의 검은 눈이 광기로 빛났다.

‘나와 몸을 바꾸고, 네가 제국을 멸망시켜 줘.’

정신 나간 제안이었다. 그렇다면 몸을 바꾼 황자에겐 우리에 갇혀 실험체로 사는 삶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그 생각을 읽은 듯 황자가 비소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아무것도 바뀔 게 없어. 너나 나나 실험체일 뿐이야.’

‘…….’

‘그렇지만, 네가 내 몸을 차지하면 다르잖아. 드래곤의 힘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서 나온다고 들었어. 네가 내가 된다면, 아르카이크 황자가 된다면…… 너는 유능한 황자가 되겠지. 어쩌면 황태자도, 황제도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꿈을 꾸듯 중얼거리던 어린 황자가 미소 지었다.

‘그런데 네가 좋은 황제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넌 인간을 미워하니까.’

‘……넌 황실을 증오하고.’

‘그래. 그러니까 몸을 바꾸며 영혼의 맹세를 하자. 내가 네 대신 갇혀서 이 고통을 혼자 짊어질게. 대신 넌…….’

황자가 작게 말했다.

‘내 피와 고통으로 만든다는 이 빌어먹을 천년 마법제국을 부숴 줘.’

어린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일 때부터 제국에 발견되어, 황족의 피로 강제로 깨어나고 학대받던 드래곤이었다. 늘 자신을 학대한 인간들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다른 드래곤이 멸종한 것도 인간들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황자의 제안은 너무도 달콤했다. 두 계약자의 소망은 서로 닮은 꼴이었으니까.

황자의 말대로였다. 드래곤의 영혼으로 황자의 몸을 차지하자, 모든 일은 너무도 쉬웠다. 이미 영혼의 기에서 눌린 인간들은 그에게 복종했다. 그의 마나로 마법능력자가 된 뱀 기사단은 본능적으로 그의 뜻을 수족처럼 따랐다.

‘빠르게 황태자의 지위까지 차지했으니 조금만 더 하면 맹약을 이룰 수 있었는데…….’

본체인 드래곤 안에서 진짜 아르카이크가 죽어 버리면, 영혼을 건 맹세는 이뤄지지 못하고 드래곤의 영혼을 옥죄며 미치게 만들 터였다.

‘……계획을 앞당겨야 한다.’

황태자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한편 피어트 공작가의 저택.

“쿠왕!”

해츨링 쿠앙이가 연신 레아 주위를 빙빙 돌았다. 레아의 치장을 마무리해 주고 있던 자넷이 까르르 웃었다.

“공녀님, 쿠앙이도 예쁜 건 아나 봐요.”

“쿠앙 쿠앙.”

당연하다는 듯 주둥이를 높게 들며 뻐기던 쿠앙이가 레아를 보고 눈을 빛냈다. 황홀한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자넷은 마지막 리본을 매고 물러나며 뿌듯하게 생각했다.

‘하긴 드래곤도 반하는 게 당연하지.’

오늘의 레아는 눈부셨다.

긴 백금발이 돋보이는 다이아와 백금 티아라, 목에서 새빨갛게 빛나는 루비 목걸이.

검푸른 벨벳 드레스 소매와 밑단에선 보석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로 성장한 레아에게선 고대제국의 여왕 같은 기품이 느껴졌다. 자넷이 손뼉을 쳤다.

“공녀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름답기만 하면 안 되는데.”

레아가 거울 안의 제 모습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물었다.

“자넷, 어때? 까불면 파이어볼 맞을 것처럼 위풍당당해 보여?”

“어…… 파이어볼 맞아도 영광일 것처럼 아름다우신데요?”

“쿠와앙!”

쿠앙이가 적극 동의한다는 듯이 큰 머리를 거세게 끄덕였다.

“……뭐 그거면 됐나?”

중얼거린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결국 헬릭스는 돌아오지 않았어.’

그때 사막에서 헤어진 후 그는 레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켄의 사절단이 청혼을 무르지 않고 초겨울 내내 페이런의 수도에서 버텼는데도. 페이런 사람들이 페이릴리는 결국 아르카이크 황태자에게 시집가나 보다 체념하고 있는데도.

‘이제 조금 있으면 새해란 말이야.’

새해가 되면 이 청혼에 답을 해야 할 거라는 걸 알 텐데도, 그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남자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레아는 속을 끓이며 계약자의 마나석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헬릭스, 무사하긴 한 거지?’

❀ ❀ ❀

수도 강 근처에 있는 광장과 다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오늘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축제, 태양제의 시작일. 축제를 시작하는 축포와 축제의 개막공연을 구경하기에는 이곳이 명당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들었어? 올해는 피어트 공작가에서 뭔가 준비했다던데?”

“진짜? 허어…… 그럴 정신이 없을 텐데?”

“그러게. 가을엔 재판에, 겨우내 오켄 황태자 청혼에…… 페이릴리는 중간에 앓아누워서 사교계에 안 나오기까지 했잖아?”

이야기하면서도 사람들은 기대했다.

“그래도 그 피어트 공작가에서 준비한 거라면 볼 만하겠지?”

“이럴 때 돈 아끼는 가문은 아니잖아.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페이릴리가 어차피 오켄으로 갈 거니까, 민심이라도 잡아 두자는 건가?”

수군대는 사이에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터질 시간이었다. 이제껏 신나게 떠들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반짝이는 눈으로 신호를 기다렸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가 정점에 올랐을 때였다.

펑!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는 것도 잊고 하늘을 쳐다봤다.

밤하늘에 태양처럼 빛나는 거대한 불꽃이 떠올랐던 것이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밝은 불꽃이었다.

“……헉!”

놀란 청중이 숨을 멈췄다. 아기를 안고 나온 젊은 부부가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움이 두려움으로 바뀌려는 찰나.

퍼엉!

하늘에서 불꽃이 변했다.

“드, 드래곤!”

오켄 제국의 상징인 드래곤 모양의 불꽃이었다.

지금 수도에서 시위하듯 버티는 제국 사절단의 깃발에서 펄럭이는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펑!

다음 불꽃이 발사되었다.

밤하늘에 제 모양을 펼친 불꽃은 페이런 왕국의 상징인 불사조였다.

“페이런의 불사조다!”

“불사조, 드래곤을 혼쭐내 줘!”

구경꾼들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렇지만 상황은 반대로 흘러갔다. 드래곤은 불사조를 마구 쪼고 괴롭히고 공격해 댔다.

“드래곤 저 나쁜 놈! 오켄 제국 같은 놈!”

“불사조! 힘내!”

애타는 응원과 외침에도 불구하고 불사조는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아……!”

구경하던 이들이 탄식할 때였다.

떨어지던 불사조가 뭔가 물고 날아올랐다. 사람들이 눈을 좁히며 불사조가 부리에 뭘 물었는지 보려고 애썼다.

“꽃?”

“백합 아니야?”

그 순간 백합이 커다란 화염구로 변하더니 드래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구경꾼들이 함성을 질렀다.

불사조의 입에서, 날개에서, 드래곤에게로 화염구가 사정없이 쏘아졌다. 한 번 맞을 때마다 드래곤 불꽃이 실감 나게 꿈틀거렸다. 흥분한 사람들이 외쳤다.

“뜨거운 맛을 보여 주라고!”

“드래곤 저놈, 힘자랑하더니 쌤통이다!”

그러잖아도 옆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페이런 왕국 사람들이었다. 청혼이랍시고 수도에서 버티는 오켄 제국의 사절단은 수도 시민들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계속 때려!”

“불덩이 잘한다! 드래곤을 조져 버려!”

신나서 불사조와 화염구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조금씩 의아해졌다. 화염구는 눈앞에서 계속 펼쳐지던 불꽃쇼와 달랐다.

마치 진짜 불덩이처럼 보였다.

“저거 진짜 불 아니야?”

“불이 계속 하늘로 솟아오르잖아?”

사람들은 화염구의 출처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축제의 공연이 펼쳐질 단상에 아름다운 마법사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하얀 팔을 하늘을 향해 뻗고, 그 손끝에서 강력한 화염구를 쏘아 올리는 모습.

레아 피어트였다.

❀ ❀ ❀

사람들은 얼이 나가서 단상 위를 올려다봤다.

개중 일찍 정신을 차린 이가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불을!”

그가 저도 모르게 단상 위의 레아를 삿대질했다.

“저 불을 페이릴리가!”

레아가 화염구를 손끝에 매단 채 청중을 내려다봤다.

초겨울 밤의 달빛 아래,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이 손에 든 불꽃의 빛으로 더욱 도드라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고고한 시선. 치켜든 손에서 일렁이는 불꽃.

예상치 못했던 레아의 등장과 위압감에 청중들은 혼이 빠졌다.

“진짜 불이야…….”

누군가 중얼거렸다.

“마법이다! 마법사다!”

중얼거림은 곧 수런거림으로 번졌다.

“페이릴리가 마법사였다!”

“세상에, 마법사님!”

뒤집어진 건 단상 아래 구경꾼들만이 아니었다. 행사를 보러 나왔던 왕실 쪽 사람들도 놀라 벌떡 일어섰다.

“저, 저거!”

칼로시 대공이 말을 잇지 못하고 뻐끔대자 옆에서 아들들이 짹짹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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