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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79)화 (79/120)
  • 79화

    레아는 마스터를 찾아가서 사막 부족에게서 가져온 석판 사본과 고문서를 보여 주었다.

    “고대어로군요. 오랜만에 봅니다.”

    흥미로운 얼굴로 사본을 넘겨 보던 마스터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결국…….”

    그가 레아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결국 당신이 드래곤 성녀였던 겁니까?”

    레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내가 드래곤 성녀라고 짐작하고 있었어?”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수호자님께서 계속 부인하셨지만…….”

    그래서 헬릭스가 그랬던 거구나.

    ‘네가? 결국?’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말을 하던 헬릭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의 성녀가 뭐야? 뭔데 헬릭스가…….”

    “그건 이 문서들을 해독한 내용을 알려 드리면 될 것 같군요.”

    마스터가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아즈라는 멸망의 날 이후 성체 없이 남겨질 알들을 위해 계획을 세워 놓았다.

    북쪽 오염의 땅에서 퍼질 재앙의 파편을 막아 줄 결계. 그것을 위해 오랜 친우였던 수호자 헬릭스를 배신하고 봉인해서 결계의 에너지원으로 착취했다.

    그리고 알들을 깨우고 보살펴 줄 성녀.

    “……이 세계의 지성체와 달리 드래곤에게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 영혼이 필요한데, 구하기 쉽지 않다고 쓰여 있군요.”

    “…….”

    레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서 빙의자인 나를……?’

    마스터가 그런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며 말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

    “사실 이걸 다 알려 드려도 되는 건지도 판단이 잘 안 섭니다. 당신이 드래곤의 성녀라면 수호자님의 원수인 것이니까요.”

    “꼭 원수가 되라는 법은 없잖아.”

    “원수지요. 드래곤은 수호자님의 원수, 당신은 그 드래곤을 보살필 성녀 아닙니까.”

    단호하게 말한 마스터가 칼같이 잘랐다.

    “헛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수호자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복수할 상대가 옆에 있는 게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내가 드래곤의 성녀 노릇을 안 하면? 드래곤들을 안 깨우면? 그래도?”

    레아가 절박하게 말했다. 마스터의 냉정하던 얼굴에 잠시 딱한 표정이 스쳤다.

    “아즈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안배해 놓았을 겁니다. 아즈라가 약초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당신이 수호자님을 깨우도록 인도했다고 하셨지요?”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가 말을 이었다.

    “드래곤로드 아즈라의 의도대로 헬 산맥 아래는 재앙의 피해 없이 무사했습니다. 그런데 왜 드래곤 알들은 몇백 년간 부화하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마나가 없어서입니다. 성체인 드래곤이 없어서, 드래곤 알들이 부화하기엔 마나가 모자랐던 겁니다.”

    마스터가 일어섰다.

    “오염도 거의 사라졌겠다, 수호자님이 결계를 계속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어졌겠지요. 드래곤의 성녀인 당신을 이용해 수호자님을 깨우면 세계에 마나도 좀 더 돌아올 테고요. 그리고 당신이…….”

    레아 앞에 온 그가 허리를 굽혔다. 마스터의 눈이 바로 앞에서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드래곤을 죽이지 못하도록 수호자님을 억눌러 줄 것을 기대했을 겁니다.”

    레아가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제 입에서 나갈 말이 두려웠다.

    ‘그럼 내가 헬릭스를 아즈라의 뜻대로 움직이는 도구란 말이야?’

    그의 족쇄가 되고 싶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그를 묶어 두고, 웃으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애정 어린 목줄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래서 드래곤의 성녀인 당신이 수호자님을 찾는 게 꺼림칙합니다.”

    마스터가 씁쓸하게 말했다.

    “결국 두 분은…… 가장 강력한 드래곤로드가 만든 운명대로 걸어온 것이니까요.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 ❀ ❀

    “잡아라! 습격자다!”

    “드래곤의 습격자다! 놓치지 마라!”

    추격대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헉, 허억.”

    루얀은 황성의 성벽 구석에 몸을 숨기며 밭은 숨을 쉬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까 등을 베인 게…….’

    그가 얇은 가죽갑옷 안을 더듬었다. 축축했다. 출혈이 심해지고 있었다.

    ‘……오켄 놈들이 이럴 줄 알았지. 젠장.’

    오켄의 이황녀 쪽에서는 황태자의 드래곤을 습격하는 데 무척 협조적이었다. 황성의 지도, 지름길, 보초들의 교대시간 등 필요한 정보를 퍼부어 주고 그를 황성에 몰래 잠입시켜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놈들은 루얀이 드래곤을 습격하는 것에는 아낌없이 지원을 쏟았지만, 습격을 마친 뒤 빠져나오는 것은 나 몰라라 했다. 차라리 그가 죽는 게 뒤탈이 적을 거라 여긴 것이다.

    ‘검기만 쓸 수 있었어도.’

    전 대륙을 통틀어 유일한 소드마스터인 루얀이었다. 검기를 썼다간 습격자가 누군지 광고하는 꼴이라, 그는 실력을 숨기며 무수한 경비와 추격대를 헤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수한 상처를 매단 채, 루얀이 간신히 황성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이리로.”

    낮은 목소리가 들리며 키 큰 남자가 그를 잡아끌었다.

    갑자기 나타나 도와준 자의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했다. 루얀이 고개를 들었다.

    “……헬릭스?”

    “…….”

    오켄 사람의 복장을 하고, 모자 속으로 은발까지 감춘 감쪽같은 변장이었다. 루얀이 얼떨떨해하며 다시 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레아는?”

    “쉿.”

    헬릭스가 작게 말했다.

    “아직 황성이 가깝다. 걸을 수 있겠나?”

    “당연히 걸을 수 있지.”

    “그럼 따라와라.”

    헬릭스는 어두운 골목을 헤집어 낡은 여관으로 루얀을 데려갔다. 삐걱대는 의자에 그를 앉히고, 별다른 말도 없이 바로 치유를 시작했다.

    “해독은 필요 없겠군. 다행히 내상도 거의 없다.”

    마나가 루얀의 몸속을 돌자 다친 부분이 아물기 시작했다. 루얀은 처음 보는 헬릭스의 능력에 입을 뻐끔댔다.

    “이야! 레아가 만날 능력 있다고 자랑하더니.”

    “…….”

    “근데 진짜 왜 여기에 있어? 레아는 어쩌고?”

    “……치료는 끝났다. 십 분만 쉬면 바로 움직일 수 있을 거다.”

    헬릭스의 손가락이 그의 혈을 짚었다.

    “어? 이거 뭐야. 십 분간 나 꼼짝도 못 하게 하려고?”

    “…….”

    “야, 헬릭스! 야?”

    그는 루얀이 자신을 부르는 걸 못 들은 척하며 돌아섰다.

    ‘이제 끝났다.’

    알고 있으니 도왔을 뿐이었다. 헬릭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이제 그 여자와의 인연을 되새길 필요가 없다고. 그 여자는 드래곤의 성녀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멀리서 루얀이 무사히 나아 골목을 빠져나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그냥 걱정돼서 하는 일일 뿐이었다. 절대 그가 레아의 백금발을 연상시켜서가 아니었다.

    ‘드래곤의 성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일 거라고.

    그렇지만 드래곤의 알들도 못 죽인 자신이 드래곤의 성녀만 죽이는 것도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못 죽인 것뿐이다. 나와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야.’

    헬릭스는 달렸다. 오켄의 황도를 벗어나고, 오켄의 국경을 벗어나고, 페이런의 땅 중에서도 칼바람이 부는 북부에 닿을 때까지 달렸다.

    ‘드래곤로드 아즈라.’

    놈이 제게 했던 짓을 되새기기 위해 레어로 가서 봉인 흔적을 노려보았다. 필사적으로 마지막 배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너는 실패한 수호자다, 헬릭스.’

    ‘너는 진정 지키려는 마음을 모른다.’

    짧았다.

    너무도 짧고 흐릿한 기억들이었다.

    그에 비해 봉인진을 둘러볼 때마다 떠오르는 다른 기억들은 얼마나 생생한지.

    ‘헬릭스 너 하나 갈아 넣어서 해결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저를 구해 내던 레아의 확신에 찬 푸른 눈동자.

    ‘……됐지? 된 거지? 그럼 헬릭스 너 저기 안 들어가는 거지?’

    자기 일처럼 긴장하며 떨던 모습.

    칭찬타임이니 칭찬하겠다고 우기던 입매는 또 얼마나 장난스럽고 고집스럽던가.

    ‘잘생겼으니까 잘생겼다고 하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칭찬을 쏟아붓는 척하지만 가끔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모습은 또 얼마나 사랑스럽던가.

    헬릭스는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아즈라가 그에게 줬던 치 떨리는 배신의 기억은 아스라하기만 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레아가 온 사방에 있었다.

    진짜 환장할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원수들의 성녀다.”

    그가 중얼거렸다.

    “아즈라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다. 처음 만남부터 모든 게, 아즈라가 제 알들을 위해 안배해 놓은 속임수였다…….”

    그렇게 되뇌며 이를 꽉 악물었지만, 인간의 것과 달리 평온해야 할 수호자의 심장은 옥죄는 것처럼 아팠다.

    ‘……걱정하고 있을 거다.’

    마지막으로 봤던 레아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울고 있을까.

    레아가 후두둑 눈물을 떨구던 모습을 떠올리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저벅.

    눈가가 발갛게 부어올라 자신의 멱살을 잡던 레아.

    저벅.

    목줄을 채울 거라고 으르렁대면서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던 레아.

    저벅.

    상처 난 입술을 벌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던 레아.

    저벅, 저벅, 저벅.

    헬릭스가 인공동굴 안을 빙빙 돌다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한번 떠오르자 머릿속에 온통 레아의 모습뿐이었다.

    “레아 너는 왜…….”

    그가 깊이 탄식했다.

    “왜 네가 드래곤의 성녀란 말인가?”

    ❀ ❀ ❀

    “아르카이크가 크게 다쳤다고?”

    놀라 외친 황태자의 말에 파이퍼스 자작이 순간 눈을 끔벅였다.

    “예? 전하, 방금 뭐라고?”

    “……드래곤이 크게 다쳤단 말인가?”

    맹약자끼리는 이런 것인가? 파이퍼스 자작은 의아해하면서도 좋을 대로 납득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예. 경비가 한적해진 틈을 타 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황성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분명 이황녀가 개입된 게 틀림없었다. 황태자는 입술을 짓씹었다.

    “급히 제국으로 귀환한다. 사절단은 놔두고, 소수 인원만 움직이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급히 제국으로 귀환한 황태자는 드래곤이 갇혀 있는 폐궁 지하실로 달려갔다.

    그러잖아도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던 그의 맹약자는 몸통을 가로지르는 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아르카이크가 분노를 토해 냈다.

    “누가 감히 드래곤의 육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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