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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78)화 (78/120)

78화

그녀가 마법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우우웅…….

어지럽고, 울렁거렸다.

밤의 사막이 끝없이 넓게 확장되었다가, 손에 든 지팡이로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레아를 중심으로 세계가 좁아지고 좁아지고 좁아지며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세상에 그녀의 마나 코어와 거대한 마나의 흐름만 남은 듯했다.

레아가 숨을 멈추었다.

몰려드는 힘이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아.”

외마디 신음이 입에서 새어 나갔다.

“아아.”

눈을 크게 홉뜬 레아가 필사적으로 버텼다. 아니, 그저 힘이 들어와 자신을 쓸고 나가는 걸 견뎠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을 깜박이며 마법지팡이를 꽉 잡았다.

드디어 힘이 갈무리된 것을 느낀 순간, 레아가 환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헬릭스, 봤어? 내가 해냈……!”

그녀는 그대로 굳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륵 흘러내렸다.

‘어디 간 거야.’

눈물이 레아의 하얀 뺨을 타고 계속 흘렀다.

‘어디 있는 거야?’

“레아.”

환청 같은 소리에 그녀가 도리질을 했다.

“레아. 왜 울고 있나.”

레아가 휙 돌아보았다.

헬릭스였다. 핼쑥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보는 헬릭스였다.

퍽!

레아가 지팡이로 그를 쳤다.

“왜 울어? 왜 우냐고? 그게 네가 할 말이야?!”

퍽! 퍽!

“갈 거면 말이라도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그녀가 화내면서 헬릭스를 마구 때렸다.

“내가 뭐랬어? 말만 해 주면 된댔잖아! 네가 그러겠다고 했잖아! 근데, 근데……!”

때리던 레아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훔쳤다.

“레아.”

“손대지 마, 나쁜 놈아!”

어허엉. 서럽게 울어 대면서도 그를 막 때리는 그녀의 팔을 헬릭스가 잡았다. 레아는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헬릭스의 가슴팍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쁜 놈! 진짜 내가 얼마나! 걱정은 되는데, 보고 싶고, 근데 없고! 네가 막 오자고 그래 놓고! 혼자서 사라지고! 너는, 너는 진짜……!”

헬릭스가 레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 ❀ ❀

마구 몸부림치는 그녀를 헬릭스의 단단한 팔이 가뒀다.

다리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때리는 차가운 모래. 이 서늘한 밤의 사막과 달리 뜨겁기만 한 품이었다.

너무 울어서 뜨겁고 어질한 이마에 헬릭스의 입술이 와 닿았다.

“미안하다.”

그의 거칠한 입술이 그녀의 열을 다 가져가려는 듯 오래 머물렀다.

“정말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전부 다.”

레아가 꿍얼거렸다.

“그렇게 다 져 주는 듯 말하면서 한 번에 넘어가려고 그러면 넘어가 줄 줄 알아?”

“넘어가 주면 안 되겠나.”

“흥. 이번 한 번만이야.”

그녀가 헬릭스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헬릭스가 바짝 굳었다.

“또 이러면 가만 안 둬.”

“명심하겠다.”

“진짜야. 그땐 안 봐주고 안 기다릴 거야.”

레아가 그의 옷을 쥔 채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붙잡아 와서 목줄을 채워 버릴 거야.”

헬릭스가 그런 그녀를 내려다봤다.

“……채워 다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우는 걸 보는 것보다 목줄을 차는 게 낫겠다.”

모든 의욕을 잃고 알들 옆에서 눈을 떴을 때, 헬릭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복수도 하지 못하고 레아를 위해 어린 드래곤을 죽이지도 못할 거라면, 이대로 사라져야 하는 걸 알았다.

방향타를 잃은 수호자 따위, 레아에게 민폐만 끼칠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한 번만 더 보고 가자고 스스로에게 비겁한 변명을 해 대며 그녀를 찾아와 지켜보았다.

‘네가 나를 찾으며 울지 않았다면, 나는 떠날 수 있었을까?’

그가 자신 없는 질문에 스스로 실소를 흘리며 제 목을 레아에게 들이밀었다. 목줄을 차면 그 핑계로 곁에 계속 머물 수 있겠지.

이기적인 소망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러니까 부디, 채워 다오.”

그의 말에 집중하는 레아의 눈에 다시 눈물이 어렸다. 헬릭스는 누군가 가슴을 쪼는 듯한 심정이었다.

“울지 마라.”

그의 얼굴이 레아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새가 쪼듯 입술을 댔다.

울어서 붉어진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은 뺨에.

그리고 몇 번이고 깨문 듯 상처 난 입술…….

헬릭스가 저도 모르게 행동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레아의 입술을 쓸었다.

“다쳤잖나.”

“누가 걱정시켜서 그렇잖아.”

그가 그녀의 입술을 살살 문질러 치료하면서 말했다.

“누군가. 나쁜 놈이다.”

“어. 진짜 나쁜 놈이야.”

헬릭스가 입술을 치료하면서 슬쩍 제 눈치를 보는 걸 보고, 레아는 샐쭉한 척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레아.”

그 부드러운 부름에, 그녀의 입술에서 웃음이 새었다.

잠깐이었지만.

“성녀님! 해내셨군요!”

뒤에서 촌장의 기쁨에 찬 외침이 들렸다.

“성녀?”

되묻는 헬릭스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레아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응. 저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성녀라고 하는 거 있지.”

그가 굳은 얼굴로 추궁했다.

“무슨 성녀라고 하던가?”

“어? 무슨 아즈라의 성녀? 드래곤의 성녀……? 그런 거라고……!”

그녀의 입술에 닿아 있던 헬릭스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일순간, 그 손이 레아의 목을 꽉 눌렀다.

“드래곤의…… 성녀라고?”

꽉 악물린 잇새에서 흐느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결국?”

“헤, 헬릭……!”

마음먹고 누르면 한 번에 꺾일 가느다란 목이었다. 그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

차마 더 힘을 주지 못한 커다란 손이 떨어져 나갔다.

“콜록! 헬릭, 스……!”

헬릭스는 그대로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망치는 것처럼. 떠나야만 하는 것처럼.

“헬릭스!”

❀ ❀ ❀

레아는 충격에 빠졌다.

먹지도 않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자넷과 카라이와 촌장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를 일으킨 건 뜻밖의 생명체였다.

“쿠와앙!”

크게 울며 레아의 거처까지 날아든 녀석이 그녀의 머리 위를 신나게 날며 깨웠다.

“……너는?”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고 있는, 어린 해츨링이었다.

❀ ❀ ❀

“쿠와앙!”

해츨링이 울부짖었다.

“쿠왕! 쿠앙! 쿠와아앙!”

“오오, 드래곤님이…… 오오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바닥에 닿게 절하며 감격스러워했다. 그렇지만 레아에겐 해츨링의 무서운(?) 포효가 깜찍하기만 했다.

‘파충류라서 징그럽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해츨링은 크고 노란 눈동자가 반딱반딱하고, 윤기 흐르는 검은 몸은 작은 아기 호랑이처럼 작고 오동통했다.

긴 꼬리는 균형을 잡으려고 연신 움찔움찔, 가만히 못 놔두고 있었다. 박쥐 날개 비슷한 날개는 저 날개로 어떻게 날지 할 정도로 얇고 작았다.

“귀여워!”

레아가 저도 모르게 답삭 해츨링을 끌어안았다가 얼른 놓았다.

“아, 너 드래곤이지. 미안.”

해츨링은 깜짝 놀란 눈을 했다가 도로록 다가와 그녀의 팔에 뺨을 문질렀다. 아직 어린 비늘은 서늘하고 부드러웠다.

레아는 짐짓 엄하게 말하며 해츨링을 떼어 놓았다.

“너 지나치게 귀엽구나. 이러지 마. 난 너랑 사이가 안 좋을 예정이야.”

“쿠왕!”

“볼을 부풀려도 소용없어. 넌 드래곤 아기인 해츨링이고, 난 드래곤이랑 사이 안 좋으니까.”

“쿠앙? 쿠왕?”

“몸에 드래곤 마나가 흐르는데 무슨 소리냐고? 그게 다 사연이 있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게다가 이 화염마나 주인인 드래곤이 날 얼마나 괴롭히는지 아니?”

“쿠와앙!”

“그런 못된 드래곤은 네가 혼내 주겠다고? 말만이라도 고마워.”

해츨링은 답답한 듯이 레아 주위를 돌며 파닥거렸다.

“쿠왕! 쿠와앙!”

“응? 정말이라고? 혼자는 힘들어도 여럿이면 될 거라고?”

해츨링이 까만 머리통을 세차게 흔들었다.

“쿠앙. 쿠오와앙.”

“……여기서 가까운 곳에 다른 알들이 아직 잠들어 있다고? 내가 깨워 달라고?”

레아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그녀가 해츨링을 붙잡고 물었다.

“너는 어떻게 일어난 거야? 여긴 어떻게 왔어?”

“쿠오오옹. 쿠와앙. 쿠앙쿠앙.”

레아가 입을 벌렸다.

“은발 인간이…… 와서 막 건물 부수면서…… 마나를 쓰고 갔다고? 그 마나 때문에 깨어났다고?”

헬릭스?

❀ ❀ ❀

레아는 알들을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깨어난 해츨링을 안고, 지팡이까지 야무지게 챙겨 들고 페이런의 수도로 귀환했다.

“쿠와앙.”

큰 상자 안에서 답답해하던 해츨링은 피어트 공작 저택의 유리온실에 풀어놓자 기뻐하며 한 바퀴 빙 날았다.

“쿠앙아, 좋아?”

“쿠앙?”

“나도 여기서 자냐고? 아니. 내 방은 따로 있어.”

쿠앙이가 냉큼 레아의 앞에 내려앉았다. 녀석은 앞발로 탁탁 바닥을 치며 심기 불편한 티를 냈다.

“그렇게 봐도 내 방에서 자는 건 안 돼.”

“쿠옹.”

“안 돼.”

딱 자른 그녀가 쿠앙이를 껴안았다. 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은 반항도 않고 레아에게 주둥이를 비볐다.

“쿠앙아. 헬릭스는 어딨는 걸까?”

“쿠아옹…….”

쿠앙이는 헬릭스가 결국 알들을 하나도 안 깨고 드래곤 둥지를 떠났다고 했다. 떠날 때 마나의 기운이 참 슬퍼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드래곤의 성녀라고 하니까…….”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을까.

침울해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억울했다.

“아니, 난 몰랐는데. 내가 알면 그랬겠냐고.”

“쿠앙.”

“그치? 난 몰랐으니까. 난 잘못 없는데…….”

레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잘못이 있든 없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헬릭스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드래곤 해츨링은 나를 좋아하고, 나는 드래곤 성녀라고 하고…….’

몇백 년간 드래곤 알 때문에 드래곤에게 갇혀 있던 남자가, 결국은 천성을 이기지 못하고 드래곤 알들도 못 깨고 말았다. 복수심도 그의 정의로움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남자에게 드래곤 성녀 옆에 있으라는 건 너무 가혹한 짓이 아닐까?

“……마스터한테 가 봐야겠어.”

레아가 입술을 깨물며 결심했다. 헬릭스와 오래 알고 지낸 마스터라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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