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아직 덜 자란 해츨링이라고 해도 성공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레아가 걱정이었다.
‘만일 드래곤을 다 죽인다면…… 세상의 마나도 늘어나지 않을 테니, 레아의 마법도 대마법사까지 가기 힘들 것이다.’
더블코어를 가진 레아라면 더 힘들 터였다.
‘……드래곤에게서 마나를 못 빼앗고 다 죽인다면, 레아는 대마법사가 되는 길도, 다른 마나를 갖는 길도 다 막힐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녀는 다른 대안 없이 황태자 아르카이크에게 종속될 터.
‘레아에게 그런 위험을 감수하라고 할 순 없다.’
그러나 드래곤들은 죽어야 했다.
갈등이 깊어지면서 헬릭스는 점점 더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됐다.
그렇게 사막 한가운데로 전진하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야영지를 정리하던 카라이가 혼비백산해서 달려왔다.
“주인님, 헬릭스가 사라졌습니다!”
❀ ❀ ❀
헬릭스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럴 리 없어. 나만 놔두고 갈 사람이 아니야.”
레아는 애써 웃으며 대꾸했지만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제 말을 저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직감이 말했다.
헬릭스는 네 계약자이기 전에 수호자라고.
드래곤의 배신에 수백 년간 시달려 온 사람이라고.
그간 사막을 건너며 과묵하던 그 모습을 잊었느냐고.
‘……그래도!’
레아는 패닉에 빠졌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이렇게 갈 수는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공기가 그녀의 감정에 반응했다. 레아 주위의 마나가 너울거리다 불꽃이 되어 마구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으악! 주인님!”
“공녀님, 정신 차리세요! 낙타들 다 도망가요!”
카라이와 자넷이 그녀 옆에서 꽥꽥 소리쳤지만 지금 레아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영영 가 버린 건 아니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여들었다.
쿵. 쿵.
제가 기대면 북처럼 울리던 헬릭스의 심장 소리처럼, 그녀의 심장도 미친 듯이 뛰었다. 불꽃이 너울너울, 민들레 씨앗처럼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녔다.
“아 쫌! 공녀님! 제발!”
자넷이 이제는 레아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아가씨, 정신 차리시라니까요? 헬릭스 님 못 믿으세요? 금방 오시겠죠!”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 그렇겠지?”
“그럼요!”
자넷이 급히 다다다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걱정되고 보고 싶어서 금방 오실 거예요. 말도 없이 가실 분이 아니라니까요.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렇습니다, 주인님!”
천막에 붙은 불꽃을 때려서 끄고 있던 카라이가 얼른 말을 보탰다.
“제가 주인님 앞에서 헬릭스 님 편을 들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그분이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실 분은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주인님 옆에서 떠날 거면 북부에서도, 수도에서도 할 수 있잖습니까? 뭐 하러 이런 오지까지 와서 튑니까? 이유가 있겠죠!”
“그래요. 진정하세요!”
자넷의 말에 레아는 헬릭스를 떠올렸다.
‘진정해라, 레아.’
저를 말리던 헬릭스의 목소리가 생각나 목이 꽉 막혔다.
‘그래, 진정하자. 헬릭스는 금방 돌아올 거야.’
레아가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두두…….
멀리 모래언덕에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응? 뭐지?’
레아가 슬쩍 바람을 흘려보냈다. 먼지구름이 훅 걷히며, 다가오는 이들이 보였다.
낙타를 탄 수십 명의 복면 쓴 남자들이었다.
“도, 도적?”
새파랗게 질린 카라이가 천막을 내팽개치고 레아 앞에 와 섰다. 레아가 얼른 자넷의 팔을 끌어당겼다.
“카라이, 마법 방어막을 준비해!”
“예!”
레아는 긴장해서 앞을 쳐다봤다. 이렇게 정면에서 달려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
‘겁줘서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처음엔 가볍게 파이어볼로…….’
레아가 손을 움찔움찔하면서 노려보는 사이, 복면을 쓴 이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 중 대장인 듯한 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낙타에서 뛰어내렸다.
‘뭐 하는 거지?’
대장이 풀썩, 레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외쳤다.
“드디어 오셨군요, 성녀님!”
레아가 오른손에 일으키던 불꽃을 멈춘 채 정지했다.
네?
❀ ❀ ❀
그 시각. 헬릭스는 동굴 안에서 드래곤의 알들을 발견했다.
“…….”
밤새 이런저런 갈등과 옛 기억으로 괴로워하다가 혼자 새벽산책을 나왔던 참이었다. 사방이 메마른 모래사막 속에서 마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강렬하고 조심스러운 마나는 그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린 드래곤의 마나.
헬릭스는 마나의 흐름을 따라 걸었다.
모래언덕 밑, 숨겨진 사막 동굴, 그 안에 세월을 비켜 간 채 남아 있는 옛 유적.
그리고 무방비하게 놓여 있는 수십 개의 드래곤 알들 앞에 다다를 때까지.
저벅.
그가 유적에 발을 디뎠다. 알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즈라, 너는 이 알들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인가……!”
봐라. 네가 택한 이기적인 선택의 결말을.
헬릭스는 이를 악물며 손끝에 마나를 실었다. 긴 손가락 끝에서 마나가 총알처럼 발사되었다.
콰광!
천장에 맞은 마나탄에 서까래 모서리가 떨어졌다.
쾅!
기둥에 맞은 마나탄에 장식기단이 부서졌다.
쾅!
바닥을 맞히자 돌가루가 일어나며 시야가 자욱해졌다. 그 돌먼지가 모두 가라앉아 알들이 보얀 회색빛을 띠었다.
헬릭스는 그런 알들을 노려보며 손을 내렸다.
“……부당하다.”
오랜 원수들 앞에서, 몇백 년간 복수심을 짓씹던 남자가 무너졌다.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드래곤에게 복수하고 싶다지만, 죄 없는 알들을 이대로 깨 버릴 수가 없었다.
“너희에게 얼굴도 모르는 선조의 죄를 묻는 건 너무나 부당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렇다면.
세계에게 죄를 지은 드래곤의 잘못은, 고통당한 수호자의 세월은…….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뱉어 놓고, 강직한 남자가 무너졌다. 알들 사이에 시체처럼 누운 그가 고통스레 중얼거렸다.
“……레아.”
❀ ❀ ❀
“그러니까 당신들, 화염마법 쓰는 성녀 본 적 있어요? 없잖아. 사람 착각한 거라니까요?”
“아즈라의 성녀님이시니 화염마법 정도는 쓰실 수 있지요!”
뭐? 뭐의 성녀?
‘아즈라?’
그거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레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험악해졌다.
‘여기서 아즈라가 왜 나오지?’
그녀는 얼른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전생에서 티비로 봤던 사막 쪽 마을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창문과 벽마다 무언가를 수호하듯 그려 놓은 작은 그림들이 특이하긴 했지만.
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눈이 삐지 않았다면 저건 드래곤 같은데.’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듯 촌장이 자세를 바르게 했다.
“성녀님, 혼란스러우신 것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예언에 따라 성녀님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후우우.”
한숨을 쉰 레아가 말했다.
“도대체 그 성녀 얘기가 무슨 소리인지부터 설명을 해 봐요.”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께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 ❀ ❀
촌장이 안내한 곳은 마을 뒤 동산에 있는 유적이었다.
‘어쩐지 드래곤로드 아즈라의 레어랑 비슷하게 생긴 거 같다?’
레아가 둘러보고 있는데 촌장이 설명했다.
“이곳은 저희가 모시는 아즈라 님의 신전입니다.”
신전 내부는 주변 촌락의 건물과 다르게 다듬은 석재로 마무리되어 있고, 중앙에는 큰 석상도 보였다.
촌장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즈라 님. 드디어 성녀께서 이곳에 오셨습니다.”
레아는 그 석상을 올려다봤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자주 본 얼굴은 아니지만 분명 본 적이 있었다.
‘헬칸에서, 나더러 은빛 단풍나무에 용한 온천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던 그 약초사 아냐? 그 약초사, 드래곤로드 아즈라라고 그랬는데?’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여기가 진짜 드래곤로드 아즈라를 섬기는 신전?’
헬릭스의 원수인 그를 이렇게 신으로 모시는 곳에 오다니, 레아는 기가 찼다. 돌아서 나가려는 그녀를 촌장이 붙잡았다.
“성녀님,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저희는 아즈라의 성녀님이라 부르지만, 예언에선 다르게 불렀습니다.”
“뭐라고 불렀는데요?”
“드래곤의 성녀라고 불렀지요.”
“…….”
어디서 들어 본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레아는 찜찜해하며 팔짱을 끼었다.
“드래곤이 멸망의 길에서 살아남은 뒤, 오만한 드래곤들을 바른길로 인도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 마나를 돌려주실 분이라고요.”
“잠깐. 성녀가 드래곤들을 바른길로 인도한다고요?”
“예.”
“그럼 진짜 나 아닌 거 같은데요.”
나는 어린 드래곤 마나 빼먹을 생각인 나쁜 사람인데?
그렇지만 촌장은 확신에 차 있었다.
“성녀님이 맞으십니다. 성녀님께서 세계에 마나를, 저희에게 오아시스를 돌려주실 분이십니다.”
그가 설명했다. 원래 이곳은 비옥했던 곳이었는데, 마나가 마르면서 그 영향으로 이렇게 사막이 되고 말았다고.
그들이 모시는 아즈라 님은 예언했다고 했다.
세계에 마나가 돌아오는 날, 오아시스는 다시 차오를 거라고.
“아즈라 님은, 마나가 돌아오기 위해서는 성녀님께 힘을 실어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석상 밑의 크고 둥근 보석을 눌렀다. 석상 앞의 바닥이 열리며, 오래된 상자가 드러났다.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성녀님.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 ❀ ❀
‘아니, 성녀라며.’
레아가 받은 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마법지팡이였다.
‘드래곤의 성녀라더니…… 무슨 마법의 성녀 같은 거야? 성녀라면서 왜 또 주는 건 마법지팡이야?’
도통 무슨 조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이걸 써 볼까.’
써 보면 감이 잡히겠지. 판단을 내린 레아가 마을 외곽으로 걸어갔다.
그새 해가 지고, 뚝 떨어진 사막의 기온이 차가운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일교차 엄청나네.’
몸을 움츠렸던 레아가 지팡이를 들며 등을 쭉 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낯선 곳에서 난데없이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마법에 몰두하면. 그렇게 정신없이 있다 보면. 헬릭스가 없다는 건 잊고 있을 수 있으니까.
‘레아, 집중해라.’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에, 레아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