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솔깃한 제안이지만……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는 드래곤의 맹약자, 혹은 그 이상의 존재다. 승산이 없다.”
리케일이 괴로운 얼굴로 두 사람을 말렸다.
“이 미친놈아. 피어트 공작가가 잿더미로 변하는 꼴을 봐야겠냐? 참아.”
“형은 지금 가문이 중요해? 그리고 레아한테 저렇게 구는 건 우리 가문도 우습게 보는 거라고!”
“레아만큼 가문도 중요하지. 기사단 애들 다 죽은 뒤에 혼자 걔들 장례 치러 주고 싶어?”
“……젠장.”
루얀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래서 단장 안 하고 방랑기사 하고 싶었는데.”
“내가 하겠다.”
헬릭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오켄 황태자를 죽이겠다. 어차피 수호자의 은원에 묶인 몸, 놈을 죽이고…….”
“멀쩡한 척하더니 너까지 왜 이래?”
새된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세 남자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레아!”
“레아야! 괜찮냐?”
레아는 그 꼴을 보고 잠시 머리를 짚었다. 혹시 이러지 않을까 하고 깨어나자마자 달려왔는데.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여러분이 좀 진정해 주시면 괜찮아질…… 리가 없나?”
레아의 말꼬리가 자신감 없이 흐려졌다.
“후. 솔직히 안 괜찮아. 무섭고 화나.”
그녀는 일단 의자에 앉아 물을 한 잔 마셨다.
“근데 그렇다고 작은오빠 말처럼 바로 들이받으면 우리가 다치잖아.”
“그럼 이대로 있자고? 오켄 황태자 그놈이 우리나라 눈치 보는 줄 아냐? 저러다 멋대로 너 제국으로 데려갈 놈이야!”
레아가 손을 저으며 말을 끊었다.
“나도 알아.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어.”
생각 같아선 조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그녀는 속으로 분을 꾹꾹 누르며 헬릭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헬릭스, 나 이 청혼 어떻게든 거부하고 싶어.”
“역시 내가…….”
“근데 헬릭스도, 나도, 우리 가족이랑 공작가도 무사했으면 좋겠어.”
주먹을 쥐던 헬릭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레아가 그 손을 꼭 쥐었다 놓고는 세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안 다치면서 거부할 방법을 생각해야 해.”
❀ ❀ ❀
레아 생각에는 청혼을 잘 거부하려면 두 가지를 해결해야 했다.
“첫째, 내가 아르카이크의 드래곤의 힘에 지배되지 않도록 해야 해. 두 번째는 황태자가 페이런 왕국이나 우리 집안에게 보복 안 하게 만들어야 하고.”
“놈들은 반드시 보복하려 할 거다. 오켄 제국의 콧대를 생각하면…….”
중얼거리던 리케일에게 루얀이 툭 내뱉었다.
“그러면 보복할 정신이 없게 만들어 버리자고.”
“뭐? 어떻게?”
“아르카이크 그자, 들어 보니 드래곤의 맹약자라서 황태자 자리를 꿰찬 거라며.”
“그래. 황실 내에서의 위치나 귀족들의 지지는 이황녀가 압도적이었다더군. 아직도 제국 귀족들 상당수가 그녀를 지지하고 있다고 하고.”
“그럼 그 드래곤이 없으면 아르카이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아냐.”
루얀의 눈이 위험스럽게 번득였다. 레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작은오빠, 설마?”
“내가 가서 죽여 버릴게. 이참에 드래곤 슬레이어 한번 되어 보자.”
“미쳤어?!”
레아가 벌떡 일어났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 경계가 어마무시할 텐데! 소드마스터 되더니 아주 그냥 눈에 뵈는 게 더 없어!”
“……아주 일리 없는 소리는 아니다.”
헬릭스가 심각하게 끼어들었다.
“이황녀가 황태자를 이기기 위해 드래곤 유물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쪽과 접촉한다면 조금은 협력을 얻어 낼 수 있겠지. 드래곤의 위치를 알려 준다거나, 황궁에 잠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루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도 나처럼 외부인인 소드마스터가 골칫거리 드래곤을 없애 준다면 환영하지 않겠냐?”
“……이렇게 들으니 확실히 해 볼 만해.”
리케일도 동의했다.
“헬릭스, 이황녀의 정보를 가져온 측과 나를 연결해 줄 수 있겠나? 내가 교섭에 나서 보지.”
“알겠다.”
착착 진행되는 일 진행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레아도 정신을 차렸다.
루얀이 말한 계획은 대담한 만큼 위험했지만, 해내기만 하면 그만한 성공이 없었다. 제 드래곤을 잃은 황태자는 레아에게 신경 쓰고 있을 정신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도 놈의 마수에서 확실히 벗어날 수 있을 테고.’
그래도 너무 위험했다.
“……내 일 때문에 작은오빠가 위험해지는 건 싫어.”
“레아, 너만의 일이 아니다.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
뜻밖에도 헬릭스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 또한 위험한 곳에 가야 한다.”
“우리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무역도시 남쪽의 사막에서 드래곤의 유적이 발견됐다고 한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듯한 알껍질도.”
“뭐?”
놀란 레아와 루얀과 리케일을 향해 헬릭스가 말을 이었다.
“드래곤은 위험한 생물이다.”
놈들은 제 것에 엄청나게 집착했다. 제 보석, 제 마나, 제 마법에는 끔찍할 정도였다.
그러니 제 마나로 각성한 마법사에게 보이는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린 드래곤들은 제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마법사를 잡아먹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니 아르카이크에게서 레아 네가 완전히 벗어나려면, 다른 화염 드래곤의 마나를 얻는 게 좋지 않겠나.”
“그, 그러면 그 화염 드래곤은?”
“내가 죽이겠다.”
헬릭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루얀이 아르카이크의 맹약 드래곤을 죽이고, 레아 네가 다른 해츨링을 찾아 마나를 바꾸고, 나 또한 드래곤을 죽임으로써 수호자의 힘을 되찾겠다. 그래야 레아 네가 놈의 집착에서 놓여날 수 있다.”
꿀꺽.
레아가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판이 커지고 있었다.
세 남매는 새삼 실감했다.
눈앞의 은발 남자는 정말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드래곤을 상대하며 피를 봐 온 사람이었다.
레아가 저도 모르게 살짝 떨며 물었다.
“아르카이크의 드래곤을 못 죽이면? 해츨링을 못 찾으면? 수호자의 힘을 되찾지 못하면?”
“그러면 베고, 다시 찾고, 방법을 또 찾아야겠지. 레아 네가 잘하는 일이 아닌가.”
부드러운 말을 들으며 레아는 안도했다. 제가 알던 헬릭스인 것 같았다. 기운 차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 해 보고 안 되면 다시 하거나 방법을 또 찾으면 되지.”
“바로 그거다.”
레아는 헬릭스와 오빠들을 보며 기합을 넣었다.
“좋아, 일단 이대로 해 보자. 큰오빠는 작은오빠 지원해 주고, 작은오빠는 소드마스터로 실력 발휘하고, 나는 헬릭스랑 드래곤 찾으러 가자.”
“맡겨 둬라.”
“또 레아 너까지 고생해야 하다니…….”
영 못마땅해하며 투덜대는 루얀에게 그녀가 신신당부했다.
“작은오빠, 안 될 거 같으면 튀어야 돼. 약속이야?”
“……알았어.”
❀ ❀ ❀
자유무역도시의 해안.
피어트 상단의 선박인 장수호가 빠르게 물살을 헤치며 나아갔다. 갑판에 선 선장은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었다.
“왜 벌써 항구가 보이지……?”
선장만이 아니었다. 항해사도 선원들도 귀신에게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만에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어제 출발했는데요?”
“저희 사실 다들 기절했던 거 아닐까요?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사이에 표류했다거나…… 태풍에 휩싸였다거나?”
“이놈의 자슥이 불길한 소리 할래?”
뱃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모습을 곁눈질하며 헬릭스가 레아에게 다가왔다. 자랑스러움과 떨떠름함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가 작게 말했다.
“레아, 적당히 하지 그랬나. 이러다 바람마법 마스터하겠다.”
“뱃멀미 싫어…….”
“…….”
헬릭스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레아에게 마나를 넣어 주는 사이, 배는 항구에 도착했다. 카라이와 자넷은 처음 보는 번화하고 화려한 항구에 넋을 놓았다.
“피어트 상단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다행히 항구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길잡이는 단출한 일행에 놀란 눈치였다.
레아, 헬릭스, 자넷, 카라이.
공녀님이 낯선 곳에 가시면 시중이라도 들겠다며 따라붙은 자넷과, 만일의 사태에 마법 방어막을 펼치기 위해 함께 온 카라이.
“기사님들은 더 없으십니까?”
“이번엔 방해돼서.”
헬릭스가 짧게 말했다. 드래곤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평범한 기사는 오히려 짐이 되었다. 휩쓸릴 수도 있으니까.
길잡이가 허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보기보다 강한 분들이신가 봅니다.”
제가 사실 이래 봬도 화염마법사랍니다!
레아는 잘난 척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뱃멀미에 절여진 파김치 신세였다.
❀ ❀ ❀
레아 일행은 남부사막으로 출발했다.
더위에 강한 조랑말을 탔다가, 일꾼들이 끄는 가마로 갈아타고, 다음엔 낙타까지 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사막 깊숙이 들어갈수록 일행은 점점 침묵 속에 잠겨들었다.
더위와 피로와 불안과, 각자의 생각이 뒤엉켜 꼬리를 물었다.
‘드래곤이 정말 여기 있을까?’
레아는 지난번에 아르카이크를 만난 이후로 드래곤이 두려웠다.
‘놈들이 다 아르카이크처럼 독점욕 심하고 좀 미친 상태면 어떡하지?’
그녀는 저를 헬릭스에게로 인도했던 아즈라를 떠올렸다. 약초사로 가장했는데도 기품 있어 보여서 의심했었지. 모든 드래곤이 아르카이크처럼 굴 것 같지는 않았다.
‘드래곤들이 나한테 순순히 마나를 줄까.’
다른 드래곤의 마나를 이미 가진 마법사에게 제 마나를 선뜻 내줄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헬릭스는 드래곤의 마나를 받으면 바로 죽일 거라 하지 않았던가.
‘마나만 뺏고 죽인다니…….’
어쩐지 강탈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헬릭스는 처음부터 드래곤들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지금 와서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드래곤들을 죽이고 나면 헬릭스가 힘을 되찾는 건 맞는 거겠지?’
❀ ❀ ❀
헬릭스는 헬릭스대로 고민이 깊어졌다.
‘만약에 드래곤을 찾는다면…….’
놈들이 아르카이크나 아즈라처럼 되기 전에 죽여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수호자의 힘을 다 되찾지 못한 상태. 마나를 압수하는 건 아주 짧은 시간만 가능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드래곤을 제압해서 레아에게 필요한 드래곤 마나를 빼앗고 죽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