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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75)화 (75/120)
  • 75화

    “예.”

    잠시 망설이던 마스터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수호자님의 힘을 묶어 둔 건 아무래도 용언마법 같습니다.”

    “용언마법?”

    헬릭스가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다.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의 후유증만으로 이제껏 힘을 못 찾으셨을 리 없습니다. 공녀님께 마나를 전해 주시는 것도 그렇고, 다른 부분은 잘 적응하고 계시잖습니까. 그냥 후유증이었다면 이제 풀릴 때가 지났을 겁니다.”

    “……다른 저주나 마법일 가능성은?”

    “다른 저주나 마법이었다면 수호자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파훼됐을 것이고요.”

    “…….”

    “또 아즈라가 제대로 마법을 걸었다면 수호자님이 알고 계셨을 텐데, 그건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드래곤이 마음을 담아 한 말이 마법이 된 용언마법일 것 같습니다.”

    일리 있는 말에 헬릭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마스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아즈라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기억나십니까?”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실패한 수호자라고, 진정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뭔지 모른다고 하더군.”

    “허어. 자기가 배신한 주제에……. 마지막까지 뻔뻔한 건 여전했군요.”

    마스터가 혀를 찼다. 헬릭스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힘을 되찾으려면 아즈라를 찾아야 하는 건가.”

    “어차피 찾아내 복수할 생각이셨잖습니까. 피어트 공녀더러 헬릭스 님을 깨우라고 한 걸 보면 어딘가 숨어 있을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해서 찾아봤다. 북부를 뒤져도, 놈의 레어를 이 잡듯이 사용하고 헤집어도, 마나를 써서 행방을 추적해도 찾을 수가 없더군.”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레아를 깨우고 죽은 건 아닐까. 마스터는 불길한 생각에 침을 삼켰다.

    “만약 아즈라가 죽었다면…… 어쩌실 겁니까?”

    “살아남은 드래곤이 죗값을 받아야 하겠지. 드래곤로드가 제 종족을 위해 벌인 일이니.”

    헬릭스가 무겁게 말했다.

    “나만의 개인적인 은원과 복수심이 아니다. 그대는 알지 않나.”

    “……알다마다요.”

    “그 멸망의 날, 얼마나 많은 이가 파멸을 막기 위해 준비했었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렇게 배신당하면 안 되는 거였다. 헬 산맥 너머의 이종족들은 또 어떤가. 아무 대비도 못 하고 있다가 드래곤들이 멸망의 별과 함께 자폭하며 재앙을 떨어트리다니…… 그 땅은 아직까지 오염의 땅으로 불리고 있지 않은가.”

    “…….”

    “어떤 생물도, 저와 제 새끼만을 위해서 다른 생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몰살시킬 순 없다. 그게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수호자다운 강직한 말에 마스터는 숙연해졌다. 그가 퍼뜩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아르카이크 황태자를 상대하기 전에, 다른 드래곤들부터 처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혹시 아즈라가 나타나거나…… 수호자님이 힘을 되찾으실지도 모르니까요.”

    “다른 드래곤들을 찾았단 말인가?”

    “예.”

    마스터가 말했다.

    “일전에 보여 드렸던 드래곤 알껍질 술잔 말입니다. 출처가 밝혀졌습니다.”

    ❀ ❀ ❀

    헬릭스가 암흑길드에 간 사이 레아는 자선음악회에 참여했다.

    초겨울의 음악회답게 선곡은 따뜻한 분위기의 교향곡이 대부분이었다. 반쯤 졸린 눈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났다.

    ‘왜 다른 자리를 두고 여길?’

    그녀는 흘깃 돌아보다 굳었다. 깊숙이 모자를 쓴 흑발흑안의 남자는 아는 인물이었다. 레아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오켄의 황태자?”

    “이제야 얼굴을 보는군.”

    아르카이크가 비죽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청혼까지 했는데 이렇게 보기 힘들어서야.”

    “그야 납치도 청혼도 멋대로시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레아는 대꾸하며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객석에 앉은 다른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소리를 지르면 통할까?

    “어림없는 수작은 부리지 마라.”

    아르카이크가 그녀의 팔을 잡아채 제 옆으로 끌었다.

    “이야기를 하지.”

    “난 할 얘기 없어.”

    “있을 거다.”

    단정하듯 말한 그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쾅!

    무대에서 심벌즈가 날카롭고 묵직하게 울렸다. 어쩐지 더 크게 들리는 금속음에 레아가 몸을 떨었다. 아르카이크가 속삭였다.

    “이 정도로 압박을 했으면 굴복해야지.”

    무려 대제국 오켄 황태자의 청혼이었다.

    드래곤의 깃발을 높이 건 사절단이 대대적으로 방문해, 수도를 점거하다시피 하고 밀어붙인 청혼. 그런데 레아도 피어트 공작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렇게 나를 괘씸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것도 재능이야. 그대 가문은 오켄 제국에게 찍혀 멸문당하고 싶은가 보지?”

    “……이제 막 황태자로 책봉되신 몸입니다. 청혼을 거부했다고 타국의 귀족 가문을 멸문시키면 제국의 여론이 나쁘게 흐를까 염려됩니다.”

    “또박또박 말대답할 때만 존댓말이군. 건방진 건 참 여전해.”

    아르카이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종알대는 입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아가 흠칫하며 뒤로 몸을 물렸다.

    그가 마른 입술을 적셨다. 레아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게 만족스러우면서도 불만이 솟았다.

    아르카이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여론 같은 건 신경 쓸 것 없다. 누가 감히 오켄 제국의 황후를 핍박하겠는가.”

    “황후…….”

    레아가 도전적으로 아르카이크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바라는 게 그거야? 내가 오켄의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는 거?”

    “그렇다.”

    “왜 난데?”

    “너는 내 것이어야 하니까.”

    검은 눈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걱정 마라. 누구도 너를 무시하지 못하게 해 주겠다.”

    레아의 목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감히 오켄 제국의 황후를 핍박하겠느냐니. 누구도 너를 무시하지 못하게 해 주겠다니. 상대가 아르카이크 오켄이 아니었다면 로맨틱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치를 떨며 반박했다.

    “……내 인생에서 당신만큼 날 핍박한 사람이 없어.”

    “…….”

    “당신, 날 죽이려고도 했잖아. 멋대로 납치해서 노예로 삼으려고도 했고. 황후 자리를 받는다고 다를까?”

    황태자가 멈칫하는 사이, 무대 위에선 협주곡이 끝나고 바이올린 솔로이스트가 새 곡을 시작했다. 처음 활이 현을 스치며 내는 새된 소리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둘을 감쌌다.

    “다를 거다.”

    “난 못 믿겠는데.”

    레아가 차갑게 말하며 일어섰다.

    “황후라니, 당신처럼 변덕스러운 남자의 마음에 기대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살라고? 생각만 해도 얹힐 거 같네.”

    턱. 일어서는 레아의 손을 아르카이크가 잡아챘다.

    “앉아.”

    “싫다면?”

    아르카이크의 눈에 금색 불길이 일렁였다. 그가 짓씹듯 말했다.

    “……그 남자 때문이냐?”

    그녀가 순간 움찔했다. 그 반응에 아르카이크는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속이 들끓었다.

    ‘감히 나를 거부하고 날을 세우면서, 놈의 얘기엔 바로 반응해?’

    아르카이크의 눈이 황금색으로 타올랐다.

    “빛난다 귀하다 해 주니 더 방자해지는구나.”

    고저 없는 온화한 목소리인데 고막을 인두로 지지는 느낌이었다. 뜨겁고 강한 마나가 공간을 지배하며 그녀에게 쏟아졌다.

    “으윽……!”

    목이 졸린 듯한 압박감에 레아가 헐떡였다. 무대에서는 바이올린이 찢어지는 고음을 계속 연주했다. 비명 같은 바이올린 음색이 극장을 울렸다.

    연주를 뚫고 아르카이크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미쳐 가는 연주. 찍어 누르는 마나. 숨소리도 못 내고 있는 관객들. 레아가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아르카이크는 다시 웃었다. 웃는 건 그뿐이었다.

    “약하고.”

    아르카이크가 그녀의 손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하찮고.”

    숨을 못 쉬는 레아의 손등을 타고, 아르카이크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올라왔다.

    “예쁜 것아.”

    레아는 입을 뻐끔대며 그 손을 떨쳐 내려 뒤틀었지만, 아르카이크는 손쉽게 그 저항을 떨쳐 내고 올라와 손톱으로 그녀의 목을 긁었다.

    “아윽.”

    날카로운 아픔에 레아가 신음했다.

    아르카이크가 쓰라린 상처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하얀 피부에 빨간 피가 방울져 맺히는 광경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라, 그는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 마세요! 살려 주세요, 아바마마!’

    드래곤이 묶인 사슬 근처까지 끌려와 울부짖던 때의 소리가 떠올랐다.

    비명이 메아리치던 돌벽. 힘에 억눌려 차디찬 바닥에 엎드린 채 헐떡이던 호흡.

    그런 어린 날의 아르카이크처럼, 눈앞의 마법사 레아도 힘에 굴복해 피를 흘리며 떨고 있었다.

    속이 뒤집힐 만큼 기분 나쁘면서도 묘하게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난 인간이 싫다.”

    아르카이크가 레아의 상처를 누르며 말했다.

    “약한 주제에 건방지고, 봐주고 있어도 고마운 줄을 모르지.”

    “…….”

    레아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너는 달라.”

    똑같이 약한 주제에 건방지고, 봐주고 있어도 고마운 줄을 몰랐지만, 레아에겐 순수한 거부만 있을 뿐 일그러진 공포나 흑심이 없었다.

    그것이 그를 묘하게 들뜨게 했다.

    “네가 내 옆에 얌전히 있는다면…… 그래, 또 모르지.”

    아르카이크가 그르렁거리듯 말했다.

    “인간들을 조금은 더 참아 줄 수 있을지도.”

    “……그거 협박이야?”

    “협박?”

    아르카이크가 웃었다.

    “협박이란 이런 거지.”

    그가 레아의 목을 움켜잡고 이를 드러냈다.

    “날 계속 거부한다면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인간부터 망가트려 주겠다. 그 은발 남자.”

    아르카이크의 손이 상처를 꽉 눌렀다.

    “아윽!”

    “이름이 헬릭스였지?”

    레아가 목을 잡힌 채 파르르 떨었다.

    “나한테 왜 이래. 뭘 원하는데!”

    “원하는 건 이미 제시했잖나?”

    사납게 말한 아르카이크가 피가 묻은 제 손을 레아의 뺨에 문질렀다. 붉어진 뺨이 제법 잘 어울렸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장 귀한 여자가 되어 달라고.”

    ❀ ❀ ❀

    레아가 자선음악회에서 쓰러져 실려 온 뒤 피어트 공작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헬릭스.”

    루얀이 초췌해진 얼굴로 심각하게 물었다.

    “네가 마나를 공급해 주면, 내가 소드마스터니까 황태자 새끼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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