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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74)화 (74/120)
  • 74화

    레아는 휴게실을 찾아 파티장을 두리번거렸다.

    새 저택은 처음 와서 그런지 구조가 낯설었다. 유리아가 납치됐던 예전 저택을 무서워하자 세이건 공작이 새로 사서 단장한 저택이었다.

    ‘옛날에 왕실의 요양 별궁으로 사용됐다던데.’

    그래서인지 남향으로 난 창문들도 크고 발코니도 아주 많았다. 이런 파티에선 휴게실만이 아니라 발코니도 휴식처로 쓰는 경우가 잦았고.

    레아는 어딘지 모를 휴게실을 찾느니 눈앞의 발코니에 들어가서 좀 쉬기로 했다.

    “아이고고.”

    누가 있다는 표시로 커튼을 내린 뒤, 레아는 발코니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늘 드레스에 맞춰서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녔더니 움직일 때마다 아주 곡소리가 나왔다. 그녀가 구두를 벗어 두고 종아리를 통통 두들겼다.

    “……그냥 헬릭스한테 마사지해 달랄 걸 그랬나?”

    민망함은 잠깐이고 고통은 길지 않을까. 후회하며 다리를 쭉 펼 때였다.

    지익.

    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코니 입구에 쳐진 커튼이 찢기며, 누군가 쑥 들어섰다.

    “레아 피어트 공녀.”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레아가 바짝 굳었다.

    “……필립 칼로시 영식?”

    칼로시 대공의 첫째 손자인 필립 칼로시였다.

    올해 열일곱 살인 필립 칼로시는 얼굴은 미소년이었으나, 얼굴로 얻은 호감 따윈 오 분 만에 날려 버릴 만큼 오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불청객의 난폭한 침입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레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칼로시 영식, 나가 주세요.”

    “싫은데.”

    이 자식이 언제 봤다고 왜 반말이죠. 레아는 치미는 성질을 꾹 누르며 따졌다.

    “커튼이 내려져 있으면 들어오지 않아야 하는 거, 모르나요?”

    “그런 거 알 게 뭐야.”

    필립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누나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

    헐.

    하마터면 육성으로 내뱉을 뻔했다.

    ‘너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하는 게 부끄럽지 않니?’

    레아는 괴로운 마음을 겨우 다스리고 선을 그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누나 동생 하는 사이였나요? 나가 주세요.”

    쌀쌀한 반응에 필립은 오히려 레아 쪽으로 더 다가왔다. 그가 난간 위로 늘어지듯 몸을 기대더니,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지금부터.”

    “……?”

    “지금부터 누나 동생 하는 사이 하자고.”

    ‘으아악!’

    레아가 내적 비명을 질렀다.

    ‘내 귀! 고막이 오그라든다!’

    도대체 이놈이 왜 갑자기 이렇게 미친놈처럼 들이대는 건가. 왜 눈빛에 ‘이러면 넘어오겠지? 나는 치명적인 남자니까’라고 쓰여 있는 건가.

    그녀가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필립은 레아를 향해 입꼬리만 말아 올리는 미소를 지었다.

    “누나. 누나가 제국의 나쁜 황태자한테 찍혀서 곤란한 거 알고 있어.”

    한 줄 요약 고맙구나. 근데 너도 곤란한 거에 좀 추가해 줄래? 그리고 나가 줄래?

    레아가 속마음을 눈빛에 가득 담아 필립을 쏘아보았다. 필립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멋대로 오해했다.

    ‘절박하게 내 말에 매달리고 있군. 훗.’

    이런 미인의 구원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구해 줄게.”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패트릭 왕자는 겁쟁이잖아. 지금 누나를 구해 줄 사람은 나뿐이야.”

    얼씨구.

    순간 레아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마음의 소리가 튀어 나갔다.

    “뭐?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제정신은 아닐지 모르겠네.”

    필립이 말했다.

    “난 지금 누나한테 미쳐 있으니까.”

    “……진짜 미치셨군요?”

    “진심이야.”

    필립이 쑥스러운 듯 코끝을 문지르며 말했다.

    “누나는 늙었지만 예쁘니까.”

    빠직.

    레아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이 어린놈의 빡대가리가?’

    그때였다.

    커튼을 젖히고 헬릭스가 들어왔다. 급하게 왔는지 긴 은발이 뺨이며 입술에 붙은 채였다.

    “그 말 취소해라.”

    그가 엄숙하게 필립에게 말했다.

    기에 눌린 필립이 움찔했다가 애써 가슴을 폈다.

    “뭐, 뭘?”

    “레아는 늙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예쁘지. 게다가 네 누나가 아니다.”

    낮고 조곤조곤하게 지적하는 말인데 어쩐지 내용이 좀 이상했다. 그렇지만 헬릭스는 세상 다시없는 진실을 말하듯 당당한 표정이었다.

    “네가 이렇게 예의 없게 굴 여자가 아니란 말이다.”

    크고 건장한 그가 다가오며 말하자 위압감이 상당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던 필립이 발끈했다.

    “네, 네가 뭔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대공이라고…… 개뼉다귀 같은 게!”

    이번엔 레아가 참지 않았다.

    “개뼉다귀라니, 이렇게 잘생긴 개뼉다귀 봤어?”

    그녀가 필립에게 삿대질했다.

    “우리 헬릭스가 개뼉다귀면 너는 오징어 껍데기야!”

    “오, 오징어 껍데기……?”

    ❀ ❀ ❀

    레아는 해탈한 눈빛으로 공작저로 돌아왔다.

    며칠째 파티만 다녀오면 퀭해져서 비틀비틀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자넷이 걱정했다.

    “공녀님, 파티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칼로시 대공 쪽에서 날 죽일 생각인가 봐…… 미친놈들이 들이대…….”

    사교계의 여론도 레아와 별다르지 않았다.

    “아니, 윌터 칼로시랑 필립 칼로시요? 그 인간들이 페이릴리랑요? 말이 됩니까?”

    “허, 참. 페이릴리가 미쳤습니까? 그자들이랑 결혼할 바엔 차라리 오켄 황태자랑 하겠지요.”

    누군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래도 그건 아니죠.”

    “맞아요. 그러면 안 되죠.”

    “아니 왜요? 제국의 일개 황자도 아니고 황태자인데, 우리 페이런 왕국에서 오켄 제국의 차기 황후가 나오면 좋지 않겠습니까?”

    “보통 귀족 영애라면 그렇겠지만 레아 피어트는 아니죠. 나라의 보물을 제국에게 뺏길 판인데.”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는 이들은 수군댔다.

    소드마스터 루얀 피어트가 여동생 팔불출이니, 페이릴리가 제국의 황실로 시집가면 인질로 잡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소드마스터의 목줄을 오켄 제국에서 쥐여 주는 셈이 될 거라고.

    “……패트릭 왕자님이 나서지 않으면, 칼로시 대공 쪽도 괜찮을 듯싶어요?”

    “그렇습니다. 대공의 아들이나 손자도 페이런 왕실의 일원이 아닙니까?”

    스리슬쩍 바뀐 여론을 전해 들은 레아는 분노했다.

    “지들 인생 아니라 이거지?”

    그녀의 고함에 같이 차를 마시던 리케일이 딸꾹질을 했다. 헬릭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나 대신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랑 결혼하든가! 아니면 황태자 면전에서 거절을 해 보든가! 아주 그냥 다들 주둥이만 살았어!”

    레아는 앞에 놓인 차를 죽 들이켰다.

    레아를 장기말로 여기며 저들 좋을 대로 움직여 주길 바라는 여론.

    계속 수도에 머무르면서 정치적 압박을 해 대는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의 사절단. 강압적으로 재촉해 대는 청혼.

    모든 게 레아를 빡치게 했다.

    “내가 물건이냐?”

    페이런의 여론이며 아르카이크 황태자며, 다들 그녀를 자기들 필요와 이익에 따라 여기 옮기고 저기 옮길 수 있는 장기말처럼 여기고 있었다. 귀하고 예쁘고 비싼 장기말.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내가 지난 재판에서 명예를 되찾지 않았으면, 다들 버리는 패 취급했겠지.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이렇게 정식으로 청혼도 안 하고 또 납치하려고 들었을 거고. 사람들은 둘째 오빠가 어떻게 나올까만 전전긍긍했을 거야.”

    앞에 앉은 남자들은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힘을 길러야 해.”

    레아가 뿌득 이를 갈았다.

    “내가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대마법사였으면, 오켄의 황태자라고 해도 이렇게 밀어붙이는 청혼을 하진 못했을 거야. 그러면 칼로시 대공 쪽에서도 날 이용할 생각은 꿈도 못 꿨을 거고.”

    “레아야.”

    “작은오빠를 봐. 소드마스터 다니까 다들 손에 넣고 싶어 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강제하진 못하잖아? 나를 오빠 목줄로 쓸 생각은 하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도 목줄 말고, 장기말 말고, 다들 겁내는 무기가 될 거야.”

    새파란 눈이 결의를 담고 불타올랐다. 헬릭스는 새삼 감탄했다.

    ‘귀족 영애들이 흔히 하는 생각이 아닐 텐데.’

    특히 페이런 왕국은 남성 중심 사회였다. 오래 살아온 그는 사교계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거의 없다 보니 귀족 영애들도 자연히 가문과 집안 남자의 힘을 빌리려 하지 자신이 힘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은 안 하는 곳이었다.

    ‘내 계약자는…… 어떻게 이리 멋지게 자란 건가.’

    그는 이렇게 특이한 레아가 좋았다. 약한 소리를 하다가도 결국은 일어나서 제 뜻대로 해 나가는 그녀가 눈부셨다. 내가 그러니 너도 그래도 된다는 그녀의 미소를 볼 때면 무감해진 줄 알았던 가슴이 뛰었다.

    이런 레아를, 아르카이크 황태자의 새장에 갇혀 살게 할 순 없었다.

    ❀ ❀ ❀

    헬릭스는 마스터를 찾아갔다. 마스터는 그에게 현 페이런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칼로시 가문의 멍청이들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마스터가 말했다.

    “대공은 피어트 공녀가 자기 가문과 이어질 거라고 기대도 안 할걸요. 그 능구렁이가 오켄 황태자를 적으로 돌릴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그자의 아들과 손자가 왜 레아에게 달라붙는 것인가.”

    “패트릭 왕자를 깎아내리려고 아들과 손자가 설치게 놔두는 거겠지요. 대공은 왕위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헬릭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결실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레아를 이용하는 것이로군.”

    레아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트로우 백작가도 그랬었고.

    눈빛이 가라앉는 그를 향해 마스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쩌실 겁니까? 상대는 오켄의 황태자입니다. 피어트 공작가에서도 계속 답을 미룰 수는 없을 겁니다.”

    아르카이크 오켄. 오켄 제국의 황태자이자 드래곤의 맹약자.

    피어트 공작가의 재력과 무력에, 소드마스터인 루얀과 마법사인 레아까지 모두 뭉치더라도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레아를 그런 강압적인 청혼에 굴복하게 할 순 없다. 내 계약자니까.”

    헬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해야 수호자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알아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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