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73)화 (73/120)

73화

레아가 휙,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그놈이 드래곤인 건 맞겠지?”

그녀의 미심쩍어하는 물음에 헬릭스가 답했다.

“확실히 이상한 자긴 하더군. 드래곤과 인간의 기운이 모두 느껴지다니. 드래곤과 계약을 했다, 단순한 계약이 아닌 맹약이다, 말이 많던데…… 그렇게 봐도 어딘가 이질적인 데가 있다.”

말을 마친 그가 레아의 안색을 살폈다.

“레아. 놈의 청혼이 걱정되나.”

“거절한다고 순순히 물러갈 놈이 아니잖아.”

그녀는 아르카이크의 검은 눈에 떠오르던 금빛 불길을 떠올렸다. 오싹했다.

“그 미친놈이랑 결혼이라니…… 절대 싫어.”

헬릭스가 떨리는 손을 꽉 잡았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마나가 스며들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단호한 말에 레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없겠지?”

“절대 없다.”

❀ ❀ ❀

이 와중에 기회가 왔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칼로시 대공 쪽의 결혼적령기 남자들이었다.

‘이 무능한 놈들, 쓸 만한 짓을 해 오란 말이다!’

‘리케일 피어트처럼 정보 팍팍 얻어서 상단을 잘 키우든가! 루얀 피어트처럼 떡하니 소드마스터가 되든가! 하다못해 레아 피어트도 재판에서 저리 제 가문 이름을 드높이는데!’

재판 이후 칼로시 대공은 툭하면 피어트가를 들먹이며 아들, 손주들을 잡았다.

그런데 레아 피어트에게 오켄 제국 황태자의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여론은 소드마스터의 목줄을 오켄 제국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들끓었고. 패트릭 왕자는 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칼로시 대공가의 남자들은 생각했다.

‘이번에 레아 피어트 잡고 아버지 인정 좀 받아 봐?’

‘페이릴리를 얻으면 민심도 얻고, 처가도 얻고, 미인도 얻는 셈인데, 확 그냥?’

칼로시들은 레아 주위에 벌떼처럼 윙윙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피어트 영애.”

제일 먼저 파티에서 레아에게 말을 건 건 칼로시 대공의 셋째 아들, 윌터 칼로시였다.

‘얘는 왜 갑자기 나한테 아는 척이지?’

레아는 속마음을 숨기고 예의 바르게 화답했다.

“오랜만에 뵙는 듯합니다, 칼로시 경.”

의례적인 인사에 윌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삼 년 전 영애의 데뷔탕트 해에 뵙고는 처음이군요. 그간 제국에서 지냈던지라.”

그는 묻지도 않은 근황을 늘어놓았다.

“이번에 제국에서 아주 돌아왔습니다.”

윌터 칼로시가 쓸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내를 잃고 나니 마음이 너무 헛헛해서 제국에 계속 있을 수가 없더군요.”

“아…… 그러시구나.”

레아는 영혼 없이 대꾸하다가 퍼뜩 의심했다.

‘혹시 지금 이 인간, 나한테 돌싱이라고 어필하는 거야?’

설마.

서얼마.

설마 칼로시 대공 아들들이 다 더포드 남작처럼 주제 파악 못 하진 않겠지. 그녀는 불안감을 느끼며 눈을 도로록 굴렸다.

삼십 대 초반의 윌터 칼로시는 레아와는 띠동갑인 데다 아버지 빽을 제외하면 뭐 볼 게 없는 인물이었다.

인물도 추남은 면한 정도, 풍채도 그냥저냥, 지적인 학식이나 검술 재능이나 예술적 식견이 있냐 하면 아니올시다.

그렇다고 인성이 좋으냐? 단연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나도 들은 소문이 있지.’

페이런 사교계에 이미 암암리에 퍼진 소문이었다.

윌터 칼로시는 얼마 전까지 윌터 칼로시 엘름이란 이름으로 살았다. 오켄 제국에서 오래 유학하다 그쪽 귀족과 결혼했던 것이다. 상대는 무려 황후의 오른팔로 움직이며 잘나가던, 엘름 후작가의 여식이었다.

그렇지만 결혼 생활 내내 처가와 아내는 그가 소국의 귀족이라고 무시한 모양이었다.

윌터는 늘 이혼하고 싶어 했지만, 제국 정계와 연을 만들어 놓으려던 대공의 뜻으로 결혼을 깨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처가인 엘름 후작가가 황실 반란죄로 멸문해 버렸다. 아르카이크 황태자가 제일 먼저 황후의 오른팔을 자른 통에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윌터는 후작가에서 홀로 빠져나와 페이런 왕국으로 도망쳤다.

‘그럼 아내를 잃고 온 거 아니에요?’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죠. 사이도 안 좋았다면서.’

‘그런 게 아니래요.’

소곤소곤, 구체적인 소문들이 이어졌다.

‘아내가 같이 데려가 달라고 매달렸대요. 목숨만 살려 주면 헤어지고 돈도 주겠다고 했는데, 뿌리치고 혼자 도망쳤다나 봐요.’

‘그러면 아내는요?’

‘당연히 죽었지요. 황태자 부하들이 손속이 그렇게 잔혹하다던데.’

‘세상에.’

‘그래 놓고 페이런에 오자마자 자기 친구들이랑 축하파티까지 했다던데요? 이제 자기는 자유라면서.’

소문을 떠올린 레아가 눈앞의 윌터 칼로시를 빤히 쳐다봤다.

‘네가 전처한테 어떻게 했는지 페이런에 소문이 자자한데…… 그래 놓고 지금 나한테 치근대면 그게 되겠니?’

❀ ❀ ❀

윌터 칼로시는 그 눈길을 오해했다.

‘레아 피어트가 나한테 집중하고 있다!’

더포드 남작이 페이릴리를 쫓아다닌다고 들었을 때에는 혀를 찼는데. 눈앞에서 저를 보는 레아를 보니 놈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제국에서도 이만한 미인은 본 적이 없어.’

욕심이 끓어올랐다. 윌터는 레아가 흥미를 가지면서, 자신이 멋져 보일 만한 화제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영애. 조심하셔야 합니다.”

윌터가 중요한 정보를 전하듯 작게 말했다.

“제가 제국에서 들은 바가 있는데,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아주 잔인하고 가차 없는 성정이라더군요. 그런 자의 청혼을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뭐라고 하려나 했더니. 레아는 어이가 없었다. 제국까지 안 가도 여기 귀족들도 다 아는 얘기였다.

“아, 예……. 충고 감사합니다. 그럼 다른 분들과 제국 이야기 더 나누시길.”

이제 적당히 하고 가라.

레아가 눈빛으로 이야기하며 끊었지만, 그녀의 미모에 혹한 윌터 칼로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입니다. 제 말을 허투루 들으시면 안 됩니다. 제국에는 결혼했던 이의 결혼 충고를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예에.”

레아는 시큰둥하게 대꾸하면서 부채를 펼쳤다. 명백히 너랑 얘기하기 싫다는 제스처에도 그는 꿋꿋했다.

“그러니 황태자에게서 영애를 보호해 줄, 방패로 삼을 남편감을 찾아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방패요?”

그녀의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갔다.

“설마 그런 남편감이 칼로시 경이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하하, 제가 그런 역할을 맡는다면야 영광이지요.”

윌터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는 제 행적이 페이런의 사교계에 다 소문난 것을 몰랐고, 레아가 이러는 건 단지 새침하게 구는 거라 여겼다.

‘과연 얼굴값을 하는군. 제법 앙칼져.’

전처에게 단단히 데어, 또 결혼한다면 반드시 순한 여자를 만나리라 다짐했던 그였다.

그렇지만 절세미인 앞에서 과거의 다짐 따위는 무용지물이었다.

‘역시 페이릴리. 도도한 매력이 있어!’

더 달아오른 윌터 칼로시가 은근하게 말했다.

“그래도 제국이 우리 칼로시 가문을 어떻게 하진 않을 겁니다.”

“그거야 겪어 봐야 알 일이지요. 오켄 황실이 어디 믿을 만한 상대던가요.”

몸을 가까이 붙이는 윌터 칼로시의 가슴을 부채 끝으로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탁.

부채 끝을 잡고 그녀의 손을 잡아끈 윌터가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야멸차시군요, 레이디. 그렇지만 저는 다음 만남을 고대하겠습니다.”

“…….”

“하하. 제국의 사교계에선 이렇게 하는 것이 세련된 행동이랍니다.”

레아는 어이가 없었다.

밀어내는 숙녀의 부채를 힘으로 끌어당기다니, 제국이든 아니든 무례한 짓이었다. 그러면서 제국 운운하며 상대를 예의에 무지한 촌사람으로 후려치는 수법까지 쓰다니.

타닥.

그녀가 손을 빼내며 부채를 빠르게 폈다. 날카로운 살에 맞을 뻔한 윌터가 눈을 찡그렸다.

“위험하게……!”

“위험하죠. 윌터 칼로시 엘름 경.”

레아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뜻밖의 상황에서 불린 옛 성에 윌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 경이 제국의 이름을 팔고 다니실 때가 아닐 텐데요.”

그녀는 윌터를 똑바로 보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반역의 수괴인 엘름 후작가에서 많은 걸 배워 오셨나 보죠? 이렇게 페이런에 오셔도 잊지 못하실 만큼?”

“……!”

윌터 칼로시의 얼굴이 노래졌다가, 모욕감에 벌게졌다. 그렇지만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레아가 부채를 탁 접었다.

“다음번에 볼 때는 제국 물은 좀 빼셨으면 좋겠네요. 페이런에서라도 잘 지내셔야 하지 않겠어요?”

윌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새삼스레 자각이 왔다.

황태자가 이곳에 사절을 보내 눈앞의 이 여자에게 청혼했다. 그런 여자에게 치근대던 엘름 후작가의 잔당 어쩌고로 몰리게 되면 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존심이 상한 채로 물러날 순 없지 않은가. 그가 주먹을 쥐었다. 왼손엔 제법 큰 알이 박힌 보석반지를 끼고 있었다. 이대로 이 여자의 얼굴에 대고 휘두르면…….

“으아아아악!”

“아, 실례.”

회색 눈이 무감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긴 은발의 미남이 윌터가 뻗은 주먹을 그대로 잡아 쥐었다. 엄청난 힘이었다.

반지를 뺄 수도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손을 놓으며, 헬릭스가 그를 내려다봤다. 일자로 꽉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렸다.

“페이런이나 제국이나…… 레이디를 공격하려는 자는 본보기를 보이는 게 법도라서 말일세.”

❀ ❀ ❀

하지만 칼로시 일가의 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윌터 칼로시가 왼손을 다치고 도망간 지 며칠 뒤, 레아는 세이건 공작가의 파티에 참석했다.

“레아야, 헬릭스 좀 빌려 가마.”

루얀은 세이건 공작과 검 얘기를 나누다 신이 나서, 오러 설명을 한다고 헬릭스를 데려갔다. 마침 다리가 아팠던 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좀 쉬고 있을게.”

“혼자 있어도 괜찮겠나?”

“그럼. 얼른 갔다 와.”

그녀는 사실 헬릭스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게 기꺼웠다.

그냥 구두 벗고 의자 위에 다리 얹어 놓고 쉬면 될 거 같은데, 헬릭스가 알면 다리를 마사지해 준다 마나를 넣어 준다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집에서라면 몰라도, 파티장에서 그러는 건 좀 민망하단 말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