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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72)화 (72/120)

72화

“예. 마법사 레아 피어트의 둘째 오라비입니다.”

파이퍼스 자작의 보고에 황태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래…… 그자라면 한번 본 적이 있지.”

천사 같은 얼굴과 달리 기세가 흉흉하던 자였다. 황태자가 생각에 잠겼다.

“이참에 소드마스터를 우군으로 얻어 업적을 세우면…… 제국의 콧대 높은 귀족 놈들도 좀 더 조용해지겠지.”

“소드마스터를 우군으로요? 무슨 계획이 있으십니까?”

황태자 아르카이크가 미소 지었다.

“하나를 얻어서 다른 하나도 따라오게 만드는 거다.”

❀ ❀ ❀

페이런 왕국의 왕성.

왕은 불편한 심정으로 알현실에 앉아 있었다.

‘오켄 황태자의 사절이라니.’

일처일부제인 페이런 왕국과 달리 오켄 제국의 황실은 많은 비빈들을 거느렸다.

그런 황실이었기에 황실 내의 암투도 굉장했고, 황태자가 빨리 정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황제 입장에선 많은 자식 중에서 후계자를 고르고 또 고르는 게 황권 강화에 유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 오켄 제국의 황태자가 정해졌다고 했다. 황제가 아직 정정한 나이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듣기론 외가도 한미하다던데, 무슨 수를 쓴 건가.’

전례 없이 빠르게 황태자로 책봉된 아르카이크 오켄. 그가 보낸 첫 사절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왕은 속이 얹힐 것 같았다.

오켄 제국의 사절은 페이런 왕의 위장 사정은 생각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위대한 오켄 제국의 떠오르는 태양이신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께서, 귀국에 혼인을 청하셨습니다.”

“혼인?”

페이런 왕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혼인이라고?”

“그렇습니다.”

왕은 긴장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네만…… 황태자께서 특별히 우리 페이런 왕국에 청혼하신 이유라도 있는가?”

제국 내에도 황태자와 연을 맺고 싶어 할 귀족 가문은 널려 있을 터였다. 그런데 굳이 변방의 소국과?

‘외가가 한미하니 다음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제국 내의 유력가문과 연을 맺으려 할 것인데.’

왕이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자, 사절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귀국에 눈여겨보신 영애가 있다고 합니다.”

눈여겨본 영애?

“그게 누구인가?”

사절이 말했다.

“귀국의 명문가, 피어트 공작가의 레아 피어트 영애입니다.”

❀ ❀ ❀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가 레아 피어트에게 청혼한 일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수도에 드래곤 깃발을 든 사절단이 와서 피어트 공작가 주위를 빙빙 도는데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페이런의 여론은 들끓어 올랐다.

“오켄 제국이 언제부터 우리 페이런과 국혼을 맺었다고!”

“우리 어머니 말씀이, 예전엔 일흔 줄 황제의 애첩이 될 소녀를 보내라는 요구도 했다더군! 놈들 눈에는 우리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니까?”

“그런데 황태자가 페이릴리와 결혼을 하겠다니, 루얀 피어트를 손에 넣을 셈으로 하는 청혼 아니겠나!”

“페이릴리를 인질로 삼아서 소드마스터를 마음대로 부리겠다 이거야? 이놈들이 이젠 남의 나라 인재까지 날로 먹으려 들다니!”

수도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어린 소년이 오켄 제국의 사절단에게 돌을 던지다가 팔이 잘리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더 심해졌다.

“이대로 페이런의 백합과 소드마스터를 눈뜨고 뺏길 건가?”

“안 뺏기면? 오켄 제국의 황태자야. 피어트 공작가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

“거절할 수 있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방법이 흘러나왔다.

“페이릴리가 먼저 결혼을 하면 되잖아.”

결혼.

페이릴리가 먼저 결혼을 해 버리면 아무리 오켄의 황태자라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페이릴리 정도 되면 이렇게 급하게 결혼하기가 좀.”

“맞아. 대귀족인데 급이 맞는 상대 찾기 쉬운 것도 아니고.”

“이 사람들이 미련하기는.”

말을 꺼낸 이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쳐 보였다.

“우리 페이런 최고 신랑감이 아직 홀몸이잖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벼락 맞듯 깨달았다.

“그, 그렇지!”

“두 분이 맺어지시면 되겠네!”

“그러게. 아주 딱이네, 딱!”

여론은 빠르게 흘러갔다.

‘패트릭 왕자님이 레아 피어트와 결혼해서 국부 유출을 막아야 한다!’

둘 다 약혼 경력도 한번 없는 깨끗한 싱글.

왕위를 이어받을 외동아들 왕자와, 왕국에 셋뿐인 공작가 중 하나인 대귀족 피어트 가문의 고명딸.

귀족 중의 귀족끼리의 결합인 데다 둘 다 가문의 보배 취급을 받고 있었다.

“국왕께서 패트릭 왕자님을 아끼시잖는가? 왕자님 배필로 레아 피어트 공녀만 한 영애도 또 없지.”

“맞네, 공녀도 마찬가지고. 피어트 공작가에서 공녀를 어화둥둥 싸고도는 건 왕국 내에 소문이 자자하지 않은가.”

“거기에 패트릭 왕자님은 능력 있으시고, 성실하시고, 미끈하니 훈남이시고.”

“페이릴리도 절세미녀에, 사교계의 별로 활약한 지 오래되었지. 왕자님이 왕위에 오르시면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실 게야.”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근사한 한 쌍!

❀ ❀ ❀

그렇지만 당사자들은 이 소문이 매우 곤란했다.

“안 됩니다.”

패트릭 왕자는 단호한 말투로 거절했다.

“얕은수로 연을 맺기에는 피어트 공작가가 너무 거물입니다. 정치적 이득 때문에 딸을 거래할 이들도 아니고요.”

넌지시 권했던 왕도 푹, 한숨을 쉬었다.

“네 말이 맞다. 하도 답답해서 그만.”

“그리고 지금 약혼이라도 하면 오켄 제국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왕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페이런 왕국은 오켄 제국과 힘겨루기를 하기에 역부족이었으니까.

“청혼을 넣으니 부랴부랴 자국의 왕자와 약혼이라니. 상대는 오켄 제국의 황실입니다. 그중에서도 차기 태양이라는 황태자고요.”

“…….”

“무시하는 처사라고, 전쟁을 일으키고도 남을 겁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왕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네 말이 맞지만…… 귀족들과 백성들에게는 뭐라고 할 셈이냐?”

“…….”

“그들은 듣기 좋은 말만 원할 게다. 네 판단을 말해도 다 변명이라고 치부할 게야.”

실제로 여론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패트릭 왕자는 고민이 깊어졌다.

❀ ❀ ❀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파티만 나갔다 하면 언제 왕자님과 약혼할 거냐 묻는 말들에 노이로제가 생길 지경이었다.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끄라고!’

이래저래 화가 났다.

‘그놈의 청혼 때문에 헬릭스 데뷔도 묻히고! 이렇게나 잘생겼는데!’

그녀는 제 옆에 딱 붙어 있는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은회색 연미복을 입은 그는 오늘도 근사했다.

‘……묻혀서 다행인가?’

화제가 되었으면 다른 영애들이 마구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헬릭스가 몸을 기울이며 작게 물었다.

“레아, 왜 그러나?”

“잘생긴 사람 보니까 기분이 풀리고 있었어.”

“그냥 잘생긴 사람이어서 되겠나? 날 보니까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닌가.”

레아는 잠시 반성했다. 내가 이 남자를 너무 우쭈쭈 해서 콧대를 높였구나.

“와아, 방금 다른 남자였으면 재수 없었을 뻔. 헬릭스니까 봐줄게.”

“봐주고 많이 봐라.”

그가 연미복 앞섶을 매만지며 슬쩍 덧붙였다.

“네가 날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게 좋다.”

왜 보냐고 비싸게 굴던 우리 헬릭스 어디 갔어.

그렇지만 다정한 속삭임도 좋았다. 레아는 피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그를 살짝 흘겼다.

“천년만년 잘생겨야 돼. 약속.”

“……단위가 만 년인가? 노력하겠다.”

둘만의 세계에 퐁당 빠져 있는 그들에게 익숙한 사람이 다가왔다.

“레아 피어트 공녀, 헬릭스 샤리트 대공.”

“페이런의 미래를 뵙습니다.”

패트릭 왕자가 손사래를 쳤다.

“딱딱하게 그렇게 부를 거 없네. 잠시 이야기 좀 하겠는가?”

레아와 헬릭스는 서로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두 사람을 왕실 전용 휴게실로 이끌었다.

“요즘 고생이 많다고 들었네.”

“왕자님께서도 괜히 얽혀서 피해를 보고 계시지요. 송구합니다.”

“내가 곤란한 게 영애와…… 또 대공과 비교가 되겠는가.”

패트릭 왕자의 시선이 헬릭스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느리게 말했다.

“이번 일로 피어트 영애와 나 사이의 지지관계가 변하진 않는다고 말해 두고 싶군.”

“왕실 특별재판 이전부터 패트릭 왕자님께서 피어트 가문에게 보여 주신 신뢰는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답니다.”

“확실하게 대답해 주니 좋군.”

왕자는 짐을 내려놓은 듯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자꾸 주위에서 거짓 약혼이라도 하라고 부추겨서 말이야……. 영애도 곤란하지 않나?”

“곤란하지요.”

말을 고르는 레아 옆에서 헬릭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왕자님은, 동의 없이 레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실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런, 샤리트 대공. 공녀가 내게 이용당할 사람도 아니라네.”

왕자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전설의 주인공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없어.”

“…….”

“북부에서 토벌대로 돌아다니면서 많은 유물과 고대어 비석을 발견했다네. 헬 산맥의 이름이 누구에게서 따온 것인지부터…… 전설이 참 무궁무진하더군.”

헬릭스는 침묵했다. 패트릭 왕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피어트 공작가를 부탁하네. 내가 아니어도 잘 지키겠지만, 내게는 절실한 정치적 동반자라서.”

❀ ❀ ❀

“……왕자님이 헬릭스 정체를 눈치채고 있을 줄은 몰랐어.”

“영민하고 눈치가 빠르더군.”

“으음. 눈치라면 그분이 한 눈치 하시지.”

그런데 과연 헬릭스 눈치만 보고 거짓 약혼도 안 하겠다 장담한 것일까.

그보다는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 눈치를 더 보는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울적해졌다.

“헬릭스, 아르카이크 오켄 그놈은 대체 나랑 무슨 원수를 진 걸까?”

레아가 푸념했다.

“꿈에 나타나서 협박해, 수면마법까지 걸고 불태워 죽이려고 들어, 저번엔 트로우 백작이 나 몰아세운 틈을 타서 납치까지 하려고 했잖아. 그래 놓고 청혼이라니, 이게 말이 돼?”

“드래곤들이 원래 그렇다. 레아 네가 제 마나로 마법사가 되었다 여기니, 너를 제 소유로 여기는 거다.”

“으으, 싫다…….”

그녀가 진저리를 쳤다. 헬릭스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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