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71)화 (71/120)
  • 71화

    “그러니까 더 부담 없이 많이 받으란 뜻이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따뜻한 마나가 퍼져 갔다. 레아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청량한 숲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다시 멀어졌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왜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데……?’

    레아가 애꿎은 초대장을 부채처럼 흔들었다. 미약한 바람이 빨개진 귓가에 닿으며 금빛 잔머리를 살랑살랑 흩뜨렸다.

    “…….”

    헬릭스는 헬릭스대로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 그녀를 향해 움직이려는 손으로 초대장을 꽉 쥐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이 애꿎은 초대장들만 들고 서로의 시선을 피할 때였다.

    “공녀님, 헬릭스 님. 들어갑니다.”

    드르륵.

    자넷이 번쩍거리는 트레이를 밀고 나타났다. 레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이게 뭐야?”

    “공작부인께서 보내셨어요.”

    “엄마가?”

    그녀는 더 놀라서 트레이를 살펴보았다.

    아기자기한 디저트랑 안주로 먹을 만한 핑거푸드가 종류별로 놓여 있고, 샴페인도 얼음통에 담겨 있었다.

    예쁜 카나페 앞쪽으로 금색 피어트 문양이 찍힌 쪽지가 보였다.

    레아는 얼른 쪽지를 펼쳐 보았다.

    <우리 대견한 딸.

    딸, 고생했는데 헬릭스랑 같이 축배도 들고 분위기도 내고 그래. 엄마가 응원하는 거 알지?

    PS. 참, 네 아빠가 헬릭스 작위 구해 왔대. 자유무역도시연맹 중에 거의 명맥이 끊긴 소공국이 있거든. 거기 대공 작위를 사 오셨다더라. 네 아빠 스케일도 얼굴만큼 멋지지 않니? 새삼 반할 거 같지 뭐니.

    우리 딸도 힘내. 미남은 쟁취하는 거야.>

    이런 센스쟁이. 그녀는 자넷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자넷이 웃었다.

    “공작부인께 그렇게 전할게요.”

    “응.”

    자넷이 나가고 나자 헬릭스도 트레이 근처로 다가왔다.

    “레아, 이게 다 뭔가?”

    “엄마가 너랑 나 재판 때 고생했다고 축배라도 들래.”

    “축배? 술이 어딨나?”

    “술이 이건데?”

    레아가 얼음통에 담긴 샴페인을 꺼내 입구에 감긴 철사를 낑낑대며 비틀었다. 보다 못한 헬릭스가 받아서 철사를 주욱 늘였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그거 원래 그렇게 늘어나는 거였어?”

    잠시 당황했던 레아가 그의 손에서 샴페인 병을 받아 와서 흔들었다.

    “이게, 이렇게 흔들다 보면…….”

    뻥!

    헬릭스는 놀라 샴페인병을 낚아채 멀리 들어 올리며 레아를 보호하듯 껴안았다. 높이 든 샴페인 병에서 둘 위로 분수 같은 포말이 쏟아졌다.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꺄하하 웃기 시작하던 레아는 당황해서 굳었다.

    “……이렇게 마시는 술인가?”

    헬릭스가 향기로운 샴페인 거품을 뒤집어쓴 채로 물었다. 그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렇게 마시는 건…… 아닌데?”

    “아닌가? 이렇게 마시는 술인 줄 알았다.”

    그가 긴 손가락으로 레아의 속눈썹에 방울방울 맺힌 거품을 닦아 내어 맛보았다. 레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 그걸 왜 먹어?”

    안긴 채로 가슴을 툭 치며 올려다보는 빨간 얼굴. 부끄러워하며 도리질하는 움직임에 이마에 붙은 금발이 흐트러지며 달콤한 술 냄새가 피어올랐다.

    “……왜 못 먹나?”

    이대로 싹 다 핥아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헬릭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레아가 놀라며 몸을 비틀었다.

    “왜 멀쩡한 술 두고 이상한 술 마시려고 그래.”

    이상한 술이 더 맛있을 거 같은데. 그는 아쉬워하며 그녀를 안은 팔을 풀었다.

    레아가 도로록 품에서 벗어나며 어색하게 말했다.

    “추, 축배를 들려고 그랬는데 다 쏟았네.”

    “아직 남아 있다.”

    헬릭스는 들고 있던 병에 남은 샴페인을 잔 두 개에 나눠 따랐다.

    “자. 멀쩡한 술이다.”

    “그게 뭐야.”

    레아가 피시시 웃으며 잔을 받다가 멈칫했다. 유리잔을 넘겨받으며 스치는 손가락이 뜨거웠다.

    ‘뭐야, 뭐야. 나만 또 음란마귀지.’

    레아는 애써 긴장한 티를 안 내려고 웃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헬릭스, 짠.”

    챙.

    잔을 부딪치는 소리에도 괜히 가슴이 쿵 뛰었다.

    샴페인을 마시며 헬릭스를 흘끔 쳐다보자 그는 세상 제일 예쁘고 귀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레아 네가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눈을 떼나.’

    낮고 거칠게, 띄엄띄엄 말하던 헬릭스의 음성이 생각났다.

    그때도 그의 숨결에선 이런 샴페인처럼 달콤한 술향기가 났었고, 그녀를 잡은 손가락은 델 것처럼 뜨겁기만 했었다.

    ‘왜 그때 일은 생각나고 그러는데!’

    레아는 목까지 빨개져서 초대장을 뒤적거리는 척했다.

    “…….”

    헬릭스는 헬릭스대로 침묵하며 그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자꾸 자기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손에 쥔 샴페인 잔이 초조하게 빙그르르 돌았다.

    ‘그렇게 피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내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군.’

    술을 핑계로 레아를 껴안고 만지다니, 이래서야 그 비밀클럽 안에 있던 무뢰한들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수호자의 자격도 없다.’

    세상 점잖음은 다 가진 척하더니 알고 보니 변태라고, 그녀가 혐오하고 경멸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입안을 가득 채운 씁쓸함을 삼켰다.

    헬릭스는 자책하며 고개를 돌리다 트레이를 보았다. 디저트 접시가 눈에 띄었다.

    과일이 올라간 작은 타르트며 아기자기한 마카롱들은 레아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가 빠르게 디저트 접시를 가져왔다.

    “레아, 먹어라.”

    “어어…… 어? 응.”

    입가로 타르트가 다가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어린 새처럼 입을 벌렸다.

    “아.”

    냉큼 입을 벌려 받아먹은 레아의 볼이 움직였다. 우물우물거리더니 얼굴 전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헬릭스의 얼굴에도 그 미소가 옮았다.

    “맛있나?”

    “웅! 우…… 응.”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멈칫하며 눈을 굴렸다. 가까이 붙어 앉은 그를 그제야 의식한 것이다.

    몸을 뒤로 물리는 레아를 보고, 헬릭스는 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달달한 설탕 냄새가 났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혐오하거나 경멸하는 것도 아니었다.

    몸을 뒤로 물리면서도 레아의 시선은 헬릭스에게 새침하게 꽂혔다, 깜박깜박 내리깔리고 있었으니까. 그를 의식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시선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금빛 속눈썹이 나비 날갯짓 같았다. 만지고 싶었다. 햇빛을 받아 뺨에서 보얗게 빛나는 솜털을 저도 모르게 쓸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꽃잎처럼 물든 귓불을 만지고, 우물거리다 어쩔 줄을 몰라 부풀어 있는 입매를 누르며 입술을 벌려서…….

    ‘제정신인가.’

    헬릭스가 퍼뜩 상체를 뒤로 물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정말 변태가 아닌가!’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꽂혀 난장판이 된 것 같았다. 수호자인 자신이 이렇게 변태일 줄이야.

    충격받은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변태들은, 그 비밀클럽에서 봤던 이들처럼 제 욕망을 위해서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이들이 아닌가. 자신은 수호자의 신념에 맹세코 그런 적은 절대 없었다.

    이 눈길은, 이 손은, 레아에게만 반응했으니까.

    ‘설마…….’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가정이 생겨났다.

    ‘비밀클럽 안에서의 일은 실수가 아니었던 건가?’

    레아를 늘 눈으로 쫓게 되고, 눈빛이며 몸짓이 그림처럼 머리에 새겨지고,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신경 쓰이고, 보기만 해도 예뻐서 웃음이 나던 그 모든 게…….

    콰앙!

    “레아야!”

    갑자기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루얀이 들이닥쳤다. 허겁지겁 뒤따르는 리케일도 함께였다.

    “어? 작은오빠? 큰오빠?”

    “짐 싸! 튀자! 어디든!”

    “뭐? 작은오빠, 무슨 소리야?”

    리케일이 루얀의 어깨를 쥐며 말했다.

    “루얀, 제발 진정해. 진정하고…….”

    “진정? 형은 진정이 돼? 아까 선 채로 기절했던 게 누군데?”

    뭐? 누가 기절을 해? 레아가 놀라 제 큰오빠를 쳐다봤다.

    소공작 리케일은 우아해 보이는 귀족적인 외모와 달리 음험한 구석이 있어서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

    리케일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오켄의 황태자가…… 네게…….”

    “청혼 사절을 보냈다고! 그 미친놈이!”

    ❀ ❀ ❀

    페이런 왕국의 수도는 떠들썩했다.

    “오켄 제국에서 사절이 왔다고요?”

    “이 계절에? 웬일이래요?”

    그럴 만도 했다.

    오켄 제국과 페이런 왕국 사이에는 산맥과 바다가 있어 겨울엔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모르겠어요. 엄청 많이들 왔던데. 사절단이 대규모라 수도에 입성하는 모습도 장관이었다나 봐요.”

    검은 옷 일색의 기사들이 각을 맞춰 도열해 들어오며 깃발을 펄럭이는 모습이 꽤나 멋있었는지, 수도 사람들은 ‘젠장, 오켄 놈들이 대제국은 대제국이야’ 하면서 투덜댔다.

    “그런데 그 깃발에 날개 두 개 달린 드래곤의 인장이 그려져 있었대요!”

    “날개 두 개 달린 드래곤이요? 오켄 황제의 인장은 날개 네 개 달린 드래곤이잖아요.”

    “네. 그러니까 이번 사절단은 그거 아닐까요?”

    누군가 눈을 빛냈다.

    “이번에 황태자가 정해졌다면서요? 그 사람이 보낸 건가 봐요.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

    추측대로, 오켄의 사절단은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가 보낸 것이었다.

    황태자는 즉위하자마자 이황녀와 황후의 오른팔인 엘름 후작가를 반역으로 몰아 쳐 냈다. 황태자의 맹약자인 드래곤을 해치려는 시도를 했고, 그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명분이었다.

    황후와 그 지지세력인 귀족들은 놀라 부르짖었다.

    ‘오해입니다! 오랜 전통의 명문가인 엘름 후작가를 해명할 기회도, 재판도 없이 멸문시키다니, 이런 무도한 진압이 어디 있습니까!’

    ‘즉위식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피를 묻히다니, 황태자님껜 드래곤의 잔인한 본성도 흐르는 것 같습니다. 폭군이 제국의 미래를 암흑으로 이끄실까 두렵습니다!’

    황태자는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더 찍어 누를지 궁리했다.

    그런데 마침 페이런 왕국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페이런에 소드마스터가 나타났고, 그게 피어트 공작가의 루얀 피어트 공자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