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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70)화 (70/120)

70화

드래곤을 등에 업고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아르카이크 오켄은 더 이상 핍박받던 어린 황자가 아니었다. 아마도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을 젊은 패자였다.

파이퍼스 자작은 새삼 감회에 젖어 생각했다.

‘귀족들은 그분의 진정한 힘을 모르고 반대하고 있지만…… 다들 곧 알게 되겠지. 황태자 책봉식이 기대되는군.’

❀ ❀ ❀

특별재판이 끝난 후, 페이런 왕국에선 장미와 백합의 전쟁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새로운 화제들이 너무도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루얀 피어트가 소드마스터가 됐다더라, 비밀클럽 뒤채에 더포드 남작이 갇혀 있었다더라, 트로우 백작을 조사하면 뒤가 구린 일이 잔뜩 나올 거다…… 화젯거리는 끝도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화제인 건 역시 페이릴리 레아 피어트의 활약이었다.

“……그래서 그때 피어트 공녀님이 딱 무게를 잡고 좌중을 둘러보며 당당하게 말씀하셨대요. 후회하지 않는다! 비슷한 일을 겪은 선배로서 후배를 보호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멋있어!”

“저 완전 반했다니까요. 외모 보고 청순한 줄만 알았는데 반전매력이 크…… 그냥!”

특히 유리아 세이건 공녀가 레아를 칭송하며 앞장섰다. 털목도리 사건과 티파티에서의 드레스 발언 등도 알려지면서 레아는 미혼인 영애들의 우상이 되어 갔다.

“호호…… 저러다 새 팬클럽이라도 만들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페이릴리로 화제가 되었을 때에는 마뜩잖게 여기던 귀부인들도 이번 사건으로 레아를 좋게 보기 시작했다. 엄마가 없어서 사교계 승냥이들의 밥이 될 뻔한 유리아 세이건 영애를 구하고, 저뿐만 아니라 오빠의 명예도 찾아 주려 애쓴 것이 호감을 샀던 것이었다.

세이건 공작과 페이로즈도 화제였다. 세이건 공작가는 하마터면 이 재판으로 위신이 상할 뻔했지만, 트로우 경과의 결투에서 보여 준 공작의 검술로 인해 오히려 명성이 높아지고 두려움을 샀다.

게다가 세이건 공작이 트로우 경을 반쯤 다져 놓은 뒤부터 페이로즈 가슴 어쩌고 하던 치들이 죄다 입을 다물었다. 가끔 정신 못 차린 이들도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예전 페이로즈 드레스 스타일이 더 좋았는데. 어차피 여자들 드레스, 보여 주기용 아니냐? 가슴도 드러내고 좀 보는 맛이 있어야지.”

누군가 그 눈치 없는 이의 팔을 툭 쳤다.

“야, 말조심해. 요즘 그러고 다니면 안 되는 거 몰라?”

“왜, 뭐. 이 정도도 말 못 하냐?”

옆에서 듣고 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 그러다 더포드 남작처럼 된다.”

“헉……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미소녀 밝히다 죽을 뻔한 망신살의 대명사가 된 더포드 남작이었다.

❀ ❀ ❀

통쾌한 일은 세이건 공작저에서도 일어났다. 세이건 공작이 트로우 백작가에서 소개해 준 시녀들을 다 해고한 것이다.

“지금껏 받은 급료, 트로우 백작에게서 받은 돈, 더포드 남작에게서 뜯어낸 선물. 모두 토해 놓아야 할 것이오.”

새파랗게 질린 위프트 백작부인과 그 패거리들은 자비를 베풀어 달라 빌었다. 세이건 공작은 하인들을 시켜 그녀들을 쫓았다.

“끌어내라. 내 딸을 지켜 주라 했더니 팔아먹은 여자들이다.”

수도에 온 뒤 어딘가 그늘지고 주눅 들어 있던 유리아 공녀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공작은 그런 딸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저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몰랐구나.’

그 씹어 먹을 트로우 백작가의 손에 맡기는 게 아니었다. 더포드 남작이 꽃다발을 들고 쫓아다니는 걸 보며 멀리서 인상만 구기고 있을 게 아니었다.

‘진작 이렇게 할 것을.’

결투에서 트로우 경을 반쯤 다져 놓은 뒤, 대놓고 페이로즈 가슴이 어쩌고 하던 치들은 죄다 입을 다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이건 공작은 새삼 자책했다. 딸을 두고 뒤에서 그런 말이 돌고 있었던 것도 이제야 알았던 것이다.

그는 딸의 밝은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수도의 유행이 뭐고, 사교계의 명성이 뭐란 말인가.

‘수도 놈들 눈치 볼 거 없다.’

어설프게 잘 보이려 드는 것보다 자신이 칼을 빼 들면 입을 다물 놈들이었다. 그는 다짐했다.

“유리아, 이 아빠만 믿어라.”

루얀 피어트를 잇는, 막 나가는 팔불출의 탄생이었다.

❀ ❀ ❀

드물게 청명한 날, 오켄 제국의 황성에선 황태자 책봉식이 열렸다.

황궁 앞 드넓은 광장에 연단이 세워졌다. 수많은 귀족들과 백성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메꿨다.

끝없이 이어지는 인파를 연단 위의 아르카이크가 내려다봤다.

“보이느냐?”

황제가 말했다.

“저들이 모두 너의 백성들이다.”

그가 인자하게 웃었다.

‘황실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면 제 쓸모를 해야지.’

드래곤의 알에 피가 필요하다는 소리에 제일 처음 끌려온 아르카이크.

그에게 황제가 했던 말이었다.

‘네 마나로 황실의 은혜를 갚아라.’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심장 근처를 바늘로 찔린 드래곤 해츨링.

그에게 황제가 했던 말이었다.

황제의 백성.

황제의 제국.

그것이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니, 상관있긴 한가.’

아르카이크가 속내를 숨기고 미소를 흘렸다. 황제는 그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연단 너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짐의 백성들이여.”

수많은 눈들이 황제에게로 향했다. 드래곤에게서 빼낸 마나로 강화한 황제의 음성이 쩌렁쩌렁 퍼져 갔다.

“짐의 자식 중 가장 뛰어난 황자, 아르카이크가 드래곤의 맹약자로 드러났노라.”

“오오.”

백성들이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귀족들의 얼굴에 놀람과 낭패의 기색이 스쳤다.

‘폐하께서 아직 정정하신데 왜 벌써 황태자 책봉식을 치르나 했더니.’

‘드래곤과 교감하는 정도가 아니라 맹약자였다니. 황녀님을 지지하고 있던 우리 가문은 어쩌지?’

황제는 그 반응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에 짐은 아르카이크 황자를 미래 오켄 제국의 중심으로 세우고자 하는 바,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노라.”

아르카이크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그의 머리에 신전에서 받은 성수를 바르고, 어깨를 잡아 일으켜 가슴에 작은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황금색 드래곤 모양의 브로치. 오켄 제국의 황태자라는 표식이었다.

“아르카이크 황태자님 만세!”

“만세!”

군중이 만세를 연호했다.

황제는 그런 군중을 바라본 뒤 아르카이크 황태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빛에 뿌듯함이 어렸다.

“이 백성들을 황태자가 인도할 테니…… 제국의 미래가 밝도다.”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웃었다.

그의 눈이 금안으로 바뀌었다. 흡사 드래곤의 눈과 같은 황금빛 눈동자에 황제와 좌중의 사람들 모두 놀랐다.

“역시 드래곤의 맹약자시다!”

“오켄 제국 황실이여, 영원하라!”

수군대는 목소리들, 감격에 취한 목소리들이 얽히며 광장을 가득 채웠다.

하나 황태자의 금안에는 다른 모습의 광장이 보이고 있었다.

눈이 멀 것 같은 휘황한 불길. 그 속에서 타들어 가는 황성의 모습.

‘제국의 미래가 밝도다.’

황제의 말을 떠올린 아르카이크 황태자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미래가 밝긴 밝을 것이다.’

❀ ❀ ❀

황태자 책봉식이 끝나고, 한 무리의 기사들이 급하게 움직였다.

❀ ❀ ❀

명예가 회복되자, 페이런의 사교계에선 다시 레아를 찾기 시작했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몰려오기 시작한 초대장들은 그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레아의 응접실에 왔던 헬릭스가 질린 듯이 물었다.

“이 산더미가…… 다 초대장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짚었다.

“재판도 성공적으로 끝냈으니 쉬려고 했는데. 이게 뭐람.”

“무시하면 안 되는 건가.”

“그치만 이제 헬릭스 너도 사교계 데뷔해야 하잖아. 지금 무시했다가 네가 무시당하면 어떡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가.

헬릭스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를 걱정해 줄 때면 낯선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물속에 잠겨, 몸속에서 구름이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결코 싫지 않았다. 헬릭스가 입을 열었다.

“나도 돕겠다. 이 초대장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 막막했는데 잘됐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초대장을 고르기 시작했다.

“꼭 참석해야 하는 거는 여기 두고, 우리가 같이 가기 좋은 초대는 이쪽으로 놓자.”

“아니다 싶은 건?”

“벌써 아니다 싶은 게 나왔어? 누군데?”

레아가 헬릭스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흘깃 넘겨보더니 얼굴을 팍 찡그렸다.

“위프트 백작부인? 하, 진짜 얼굴 두껍다. 어떻게 나한테 초대장 보낼 생각을 해?”

“위프트 백작부인이라면 트로우 백작과 손잡고 세이건 공녀를 괴롭혔던 사람 아닌가.”

“맞아. 세이건 공녀를 더포드 남작한테 넘기는 척하면서, 중간에서 패물도 가로채고 그랬다더라고. 그래 놓고 지금 와서 나한테 초대장이라니.”

그녀는 혀를 차며 손사래를 쳤다.

“헬릭스, 그거 지지야, 지지. 버려 버려. 트로우 백작가가 망할 거 같으니까 다른 데 빌붙으려고 하나 보네.”

헬릭스는 잠시 제 손안의 초대장을 내려다봤다. 그가 물었다.

“레아, 이 정도로 괜찮나?”

“뭐가?”

“트로우 백작가 말이다.”

헬릭스의 회색 눈이 얼음처럼 서늘해졌다.

“네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대로 끝낼 게 아닌 것 같다.”

“응. 그건 그래.”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칼로시 대공이 트로우 백작가를 팽했다던데. 상단 자금줄도 막았다고 하고.”

“보복이 빠르군.”

“응. 그 할아버지가 하극상을 가만히 둘 양반이 아니거든. 잘됐지, 뭐야.”

그녀가 탁탁 손을 털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트로우 백작가 그 집안, 순조롭게 망해 가는 중인걸. 굳이 바쁜 나까지 나설 필요가 있을까?”

“바쁜가?”

“바쁘지. 헬릭스도 데뷔시켜야 하고, 헬릭스랑 파티도 가야 하고, 얼른 대마법사 돼서 헬릭스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서 드래곤들도 같이 혼내 줘야 하고.”

생글거리는 레아의 얼굴을 보며 헬릭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설핏 웃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레아 넌 지금도 든든한 계약자다.”

“헬릭스가 나한테 하는 것만큼 듬직해지고 싶은데.”

“연륜이 차이 나서 무리다.”

“와, 여기서 연륜을 밀고 오다니, 비겁하다.”

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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