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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69)화 (69/120)
  • 69화

    “레아 너는 결투를 마지막까지 보고 갈 테지.”

    “당연하잖아. 트로우 경 놈이 맞는데.”

    그녀가 갑자기 생기 넘치는 얼굴이 되어 강조했다.

    “꼭, 꼭, 꼭 봐야지.”

    “……알겠다.”

    헬릭스는 포기한 표정으로 레아의 손을 잡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녀가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감촉에 움찔하는 사이 마나가 퐁퐁퐁 건너왔다.

    “사실 나도 보고 싶긴 했다.”

    헬릭스가 낮게 속삭였다.

    ‘보는 것보다 직접 패고 싶지만 말이다.’

    놈이 레아한테 해 온 짓을 생각하면 발골을 해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손에 실려, 그가 레아의 손을 꾹 잡아 눌렀다.

    졸지에 그의 허벅지를 누르게 된 그녀가 당황해서 빨개진 사이 결투가 시작되었다.

    “……와아.”

    이어진 결투는 여러모로 둘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세이건 공작은 대단한 무인이었고, 그의 실력은 주로 해적소탕에서 쌓인 실전형이었다. 어떤 실전으로 단련됐는진 몰라도 교묘하게, 안 보이고 고통스러운 부분만 패고 또 패는 솜씨가 가히 예술이었다.

    “……세이건 공작님을 적으로 안 돌리길 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 ❀

    한편 아르카이크 오켄 황자는 제국의 황성으로 귀환했다.

    레아를 납치하는 데 실패한 뒤, 그는 내심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헬릭스가 보여 준 능력이 너무도 강력하고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마나를 흡수하다니……!’

    드래곤의 힘을 이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나와 마법을 소유하고 있는 그였다. 그런 자신의 힘을 무로 돌릴 수 있는 헬릭스의 능력이 무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황실 마법학자 파이퍼스 자작이 애써 아르카이크를 진정시켰다.

    “정말 그렇게 놀라운 능력이었다면, 왜 황자님을 제압하지 않고 그대로 도망쳤겠습니까? 그자에게 설령 그런 재주가 있다 해도, 아주 미약하거나 순간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미약하진 않았지. 나조차도 마나를 빼앗기고 무력해졌으니.”

    자작이 제 말실수를 속으로 탓하며 달랬다.

    “그럼 순간적인 재주였겠지요. 전부터 그자를 경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재주가 있는 줄 미리 간파하신 모양입니다.”

    “그 거슬리던 느낌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곰곰이 생각하던 아르카이크 황자가 명령했다.

    “혹시 모르니 고서와 전설을 뒤져 마나를 빼앗는 능력에 대해 조사해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파이퍼스 자작이 물러난 뒤, 아르카이크는 깊숙한 폐궁으로 향했다. 맹약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크어어……!”

    복도까지 울리는 고통에 찬 신음. 거대한 생물이 내는 소리가 폐궁 구석구석을 울렸다.

    “후…….”

    아르카이크는 그 울림에 한숨을 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일부 황족들과 뱀 기사단, 마법학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은밀한 계단이었다.

    “크어…….”

    계단을 다 내려온 황자가 철책으로 막힌 석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죽어 가는 어린 드래곤이 갇혀 있었다. 그가 말을 걸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드래곤의 흐린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버텨야 하나?”

    최강의 생명체인 드래곤의 목소리는 이미 가래 끓듯 잠겨 있었다.

    “너는 강해졌다. 강해졌어. 언제 내 소원을 이뤄 줄 거지?”

    “곧.”

    “서둘러야 해. 비늘이 빠지고 있다. 눈곱 때문에 앞이 안 보일 지경이야. 그런데도 저놈들은 심장 근처에서 피를 뽑고 있지……. 그놈의 비약을 만든다고!”

    크옥.

    드래곤이 거세게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황자가 말했다.

    “아르카이크. 드디어 마법사가 생겨났다. 세계에 마나도 더 풀리고 있어.”

    사슬에 묶여 있는 드래곤이 반쯤 몸을 일으키다 고통에 주저앉았다.

    “그럼 네 힘도 더 강해지겠군.”

    “그래. 그런데 변수가 있다.”

    짧게 대답한 황자가 눈을 감고 제 기억을 공유했다.

    헬릭스에게 마나를 흡수당하고 무기력해졌던 그 순간의 기억이었다. 비슷한 트라우마가 있는 황자와 드래곤은 함께 충격받아 부르르 떨었다.

    “이자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이다. 혹시라도 마나를 흡수하는 능력이 진짜라면, 놈을 두고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는 없을 테니.”

    그의 말에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가 계속 말했다.

    “그렇지만 아르카이크…… 만약 네가 약해져서 내가 그자에게 그리 쉽게 제압당했던 것이라면…….”

    황자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금빛 불길이 확 일었다. 그가 속삭였다.

    “우리의 맹세는, 약속은, 영혼의 거래는…… 모두 무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제발, 제발 약속을 지켜라.”

    드래곤이 철창에 매달리듯 거대한 얼굴을 붙였다.

    “약속을 지켜라. 나는 네 대신 모든 것을 견뎠다. 더 버티겠다. 그러니…… 약속을 지켜라!”

    다급해진 드래곤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걸었어. 너와의 맹약에!”

    우렁우렁, 절박한 드래곤의 음성은 폐궁의 실험실을 넘어 복도까지 닿았다. 드래곤을 실험하러 왔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실 마법학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었나?”

    그들은 놀라 급히 달려갔다.

    ❀ ❀ ❀

    오켄 제국의 황제 또한 놀라 물었다.

    “아르카이크가 드래곤과 그냥 계약을 한 게 아니라, 맹세를 나눈 계약자란 말이냐?”

    “예. 저희가 이 두 귀로 들었사옵니다.”

    “드래곤이 맹약을 잊지 않았느냐고 아르카이크 황자님을 채근하였습니다.”

    “허어.”

    황제가 놀라 수염을 쓸었다.

    “들은 대로라면 꽤 예전에 이루어진 계약 같은데.”

    “아르카이크 황자님의 신중한 성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좀 더 성장하실 때까지 위협을 피하고 싶으셨겠지요.”

    파이퍼스 자작의 말에 황제가 생각에 잠겼다.

    일리가 있었다. 변방의 자작일 뿐인 아르카이크의 외가로선 황자를 황궁의 암투에서 지킬 수 없었다. 아직 어렸던 아르카이크는 생각했으리라. 제 쓸모를 보여서 살아남되, 견제를 받다 못해 죽을 만큼의 능력은 숨기자고.

    “참으로 드래곤의 피가 이어진 분다우십니다.”

    “그러하옵니다. 황제 폐하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옵니다.”

    마법학자들의 아부에 황제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

    “드래곤의 아들이 뱀일 리가 있겠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황제가 손가락으로 옥좌를 두드렸다.

    천 년의 제국. 완벽한 제국. 마법이 되살아나고, 제국민 모두가 황제의 뜻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제국.

    드래곤의 계약자라면 그 제국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황제가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미룰 필요가 있나 싶군.”

    “무얼 말씀입니까?”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책봉 말일세.”

    ❀ ❀ ❀

    ‘정말 폐하께서 아르카이크 황자님을 황태자로 책봉하시는 건가.’

    황실 마법학자들의 수장, 파이퍼스 자작은 놀라 가슴이 벌렁거렸다.

    황제가 마법에 집착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황후 소생에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황녀를 제치고 일황자의 손을 들어 줄 줄은 몰랐다.

    ‘하긴…… 마법은 이 대를 내려온 황제 폐하들의 꿈이셨지.’

    오래전 오켄 제국의 남부에서 발견된 드래곤의 알. 전설인 줄 알았던 드래곤의 알이 나타나자 선대 황제는 크게 흥분했다.

    ‘이것은 오켄 황실이 영원하리라는 뜻이다!’

    어릴 때 즉위해 어머니 가문의 간섭을 이겨 내고 황권을 강화시킨 그에게, 드래곤 알은 황권의 상징처럼 보였다. 선황제는 야망에 불타올랐다.

    ‘드래곤의 힘을, 마법을 부활시키리라. 그래서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지속될 완벽한 제국을 만들리라!’

    그랬던 선황제가 죽고, 현 황제가 즉위한 뒤에도 황실의 야망은 계속되었다.

    ‘선황께서 꿈꾸시던 마법 제국을 내가 이루겠노라.’

    황제는 선대의 야심을 이어받아 더 구체적이고 악랄하게 진행했다. 파이퍼스 자작뿐만 아니라 마법에 미친 학자들을 끌어모아, 황실 직속 비밀 연구기관을 만들고 드래곤의 알을 깨울 방법을 찾아내라 채근했다.

    학자들 중에서도 또라이로 소문났던 이가 제안했다.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황족의 피를, 드래곤 알에 접촉시켜 보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마법에 미친 놈들만 모아 놓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파이퍼스 자작은 식겁했다.

    ‘제정신인가? 황실 모욕죄로 삼 대가 멸하고 싶나?’

    그런데 황제도 미쳐 있었다.

    ‘황족의 피라!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군!’

    그에겐 많은 비빈들과 자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황제는 제 자식들 대부분이 황족의 이름을 달기에는 기준미달이라 생각하던 차였다. 그는 많은 황자와 황녀들을 가혹한 실험장으로 몰아넣었다.

    ‘오켄의 황족으로 태어났으니 그만한 의무를 해야 할 것이다!’

    외가가 한미하거나. 지병이 있거나. 특출한 면이 없거나. 경쟁에서 밀릴 거라 낙인찍힌 황자와 황녀들.

    아직 어린 그들은 가축처럼 끌려와 피를 뽑히곤 했다. 마법 연구실은 늘 어린 황족들의 비명과 울음이 메아리쳤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황족의 피에 드래곤 알이 반응했다.

    ‘드래곤이 깨어났다!’

    파이퍼스 자작은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알을 깨고 나온 드래곤 해츨링의 황금빛 눈동자.

    그 눈은 반항심과 불신으로 가득했다.

    실험을 할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마법학자들을 노려보는 눈빛이 점점 더 원한에 차서, 이래도 되나 오싹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랬던 드래곤이 아르카이크 황자님과 교감을 시작하면서부터 순순해졌지.’

    그는 황제의 자식 중 드래곤의 알에 가장 많은 피를 줘야 했다. 모친의 가문이 제일 한미해 황궁에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드래곤과 교감을 시작하면서 그의 입지는 달라졌다.

    드래곤의 마나를 추출해서 만드는 비약 제조, 비약을 사람에게 먹여 보는 인체실험, 그 인체실험으로 만들어진 마법능력자들인 뱀 기사단까지. 아르카이크 황자가 아니었다면 이뤄지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뱀 기사단은 아르카이크에게 절대 충성하고 있었다.

    ‘황실친위대로 알려져 있지만…… 요 몇 년 사이 황자님의 개인 친위대가 된 거나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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