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68)화 (68/120)

68화

레아는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네놈은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겠지.’

반은 거짓말이었다.

유리아가 지금 피어트 공작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건 맞았다. 계속 보호하고 있던 게 아니라 한참 뒤에 구한 것이긴 했지만. 화재사건 때 구한 더포드 남작과 니니안이 유리아가 트로우 경에게 갇혀 있다고 알려 줘서, 루얀이 몰래 구해 왔던 것이다.

구출되어 피어트 공작가에 온 뒤에도 유리아는 계속 울었다. 사교계에 소문이 퍼질까 봐 두려워서였다.

‘흐윽…… 트로우 경에게 갇혀 있던 게 아, 알려지면 어, 어쩌면 좋아요? 아버지가 트로우 경하고 결혼하라고 하면 어, 어떻게 해요? 으헝…… 저 진짜 싫은데…… 무서운데…….’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화가 치솟았다.

‘심지어 저놈은 덮치려고 했다고 했어…… 썩을 놈!’

유리아가 너무 무서워하고 떨자 신경질을 내면서 다음번엔 미약이라도 먹여야겠다며 나가 버렸다고 했다. 너무 성질이 나서 레아는 흡 하고 호흡을 갈무리했다.

‘진정하자. 진정하고 지금은 프로페셔널 하고 비즈니스적으로 가는 거야. 이 기회에 유리아도 돕고 세이건 공작가에게 호감도 얻어 두는 거야!’

포퐁.

헬릭스의 마나가 응원하듯 그녀를 북돋웠다. 레아는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증폭된 마나에 실린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세이건 공작님께 제가 서신을 보냈었는데, 소식을 못 받으셨나요?”

거짓말이었다. 당연히 세이건 공작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서신을 보냈다고? 그랬다면 내가 이 자리에 나왔을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저는 분명히 보냈는데요.”

레아가 밀고 나갔다.

“혹시 중간에서 누가 빼돌린 건 아닐까요?”

“누가 말인가?”

“더포드 남작님이 습격받던 날, 세이건 공녀는 새파래져서 테라스에 있던 제게 달려왔어요. 남작이 눈앞에서 머리를 맞는 걸 봤다고 하더군요. 저택 뒷마당 쪽에서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왜 그런 으슥한 데까지 갔었냐고 물어보니, 위프트 백작부인이 가 보라고 강요했다더군요.”

뜻밖의 말에 세이건 공작은 놀란 눈치였다.

“……위프트 백작부인이?”

“평소에도 위프트 백작부인이 세이건 공녀를 자꾸 더포드 남작 쪽으로 들이밀었다던데, 알고 계셨나요?”

세이건 공작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레아가 기름을 부었다.

“저도 언젠가 파티에서 우연히 본 적 있습니다. 위프트 백작부인이 더포드 남작에게 세이건 공녀의 마음을 사려면 비싼 보석 장신구를 선물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세이건 공녀는 그런 건 받은 적 없다고 말했습니다.”

세이건 공작은 요즘 점점 호사스러워지던 위프트 백작부인의 차림새를 떠올렸다.

“세이건 영애는 위프트 백작부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몰라 무서워했어요. 그래서 제게 공작님께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네요.”

레아가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트로우 경이 외쳤다.

“거짓말입니다! 정말 그랬으면 지금까지 소문에 시달리며 가만있지 않았을 겁니다!”

레아는 고요하고 차가운 눈으로 트로우 경을 잠시 노려보았다. 트로우 경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솔직히.”

고개를 돌리고 레아가 입을 열었다. 마나와 카리스마가 뿜어 나왔다.

“이 정도로 일이 커질 줄 모르고 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일을 겪은 선배로서 후배를 보호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세이건 공작이 되뇌었다.

“비슷한 일을 겪은 선배로서……?”

“저도 더포드 남작의 구애를 받기 싫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제 별명이 창부의 예명이 될 것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기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했던 귀족이 움찔했다. 주변 귀족들이 그자를 향해 혀를 찼다.

레아가 말을 이었다.

“세이건 공녀가 사교계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무슨 일을 참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세이건 공작은 침묵했다. 자책이, 그다음엔 분노가, 다시 자책이 휘몰아쳤다.

레아는 그를 쳐다보며 나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위프트 백작부인은 그녀가 주목받으려면 노출이 있는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고 강요했어요. 더포드 남작의 구애를 거절하면 안 된다고 계속 세뇌하다시피 했고요. 세이건 공녀가 그래도 거부하려고 하면 페이로즈의 명성을 잃어 공작가에 누가 될 셈이냐고 겁을 줬습니다.”

세이건 공작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이상하게 의기소침하게 변해 가던 딸. 노출이 너무 과하지 않냐고 말하자 ‘공녀님이 고집부리신 거다’라며 우기고, 점점 더 제 집인 양 굴며 자신이 공녀를 페이로즈로 만들었다고 으스대던 위프트 백작부인.

그녀를 누가 소개했는지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눈이 분노로 번득였다. 공작이 이를 갈며 트로우 백작을 노려보았다.

“트로우 백작…… 이러려고 페이로즈 운운하며 위프트 백작부인을 내 딸에게 붙였나? 그리고 보석도 편지도 빼돌리게 시키고?”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세이건 공작, 저희는 그런 적이……!”

세이건 공작이 말을 끊었다.

“잘도 내 딸을 더러운 수작에 써먹었군.”

그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챠악.

가죽장갑이 트로우 백작의 뺨을 치며 떨어졌다.

“트로우 백작, 결투를 신청한다.”

❀ ❀ ❀

트로우 백작의 주름진 눈가가 미친 듯이 떨렸다.

여기서 거부한다면 결투장갑에 뺨을 맞고도 도망친 겁쟁이가 될 것이다. 이미 끝장난 가문의 평판에 그것까지 더할 순 없었다.

벌벌 떠는 그의 눈에, 옆에 웅크리고 있는 아들이 들어왔다.

“코, 콜록!”

갑자기 백작이 기침을 하며 엎어졌다.

“코올록!”

청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병약한 노인처럼 기침을 해 대던 트로우 백작이 말했다.

“이 모든 게…… 아들을 잘못 키운 제 탓입니다!”

옆에 있던 트로우 경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아, 아버지?!”

“그런 일을 벌이고 다니는 줄도 모르고, 아들의 말만 믿은 제가 죄인입니다!”

아버지가 시켰잖아!

뒤집어쓰게 생긴 얀 트로우가 외치려 했지만 트로우 백작이 더 빨랐다.

“더 이상은 부정으로 아들의 잘못을 감싸 주지만은 않겠습니다. 세이건 공작 각하, 부디 제 아들을 단죄하는 걸로 노여움을 거두시고, 저희 다른 식솔들만은…… 콜록!”

세이건 공작도 방청객들도 알았다. 진짜 일을 주도한 머리는 트로우 백작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결투 상대로 대신 내세우고 빠져나가는 걸 막을 수도 없는 일. 주먹을 부르르 떨던 세이건 공작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얀 트로우 경과 결투가 성사된 걸로 알겠네.”

트로우 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세이건 공작가. 그들은 대대로 페이런 왕국의 서부를 지키며 해적들로부터 해안 국경선을 수비한 뿌리 깊은 무가였다.

당연히 그 공작가를 지휘하는 세이건 공작 또한 실전으로 단련된 무인. 수도에서 모략과 오입만 일삼던 얀 트로우가 상대할 레벨이 아니었다. 그가 백작에게 애걸하듯 속삭였다.

“아, 아버지. 절 죽이실 작정입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냐?”

트로우 백작이 매서운 눈으로 아들을 다그쳤다.

“일을 수습해야 가문을 구할 게 아니냐?”

두 부자를 쳐다보던 세이건 공작이 말했다.

“증인들도 많으니 결투는 바로 하는 걸로 하지.”

“예?”

“당장 결투에 응하란 말일세.”

세이건 공작이 허리에 차고 있던 의전용 검을 꺼내 들었다. 결투 날짜부터 잡자, 무기를 정하자, 그런 이야기를 꺼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기세였다.

‘좀 막아 주십시오!’

주위에 간곡한 눈빛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뿐.

트로우 경은 어쩔 수 없이 결투에 응해야 했다.

“검, 검을 빌려주십시오…….”

❀ ❀ ❀

페넬라 홀 안은 갑자기 결투장으로 바뀌었다. 방청객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연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멍해 있던 재판장이 서둘러 재판을 마무리했다.

“레아 피어트와 루얀 피어트의 혐의 없음과 실종자들의 생존이 확인되었으므로, 본 재판은 무효로 처리한다!”

땅땅땅.

지금까지의 체증이 쑥 내려가는 소리였다. 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잠시 망설이던 재판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레아 피어트 공녀와 루얀 피어트 공자의 용기와 활약에 큰 감명을 받았소. 실로 페이런 귀족의 귀감이시오.”

“나도 같은 생각이 드는군.”

패트릭 왕자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 레아는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페이런 왕국에 정의가 살아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런 왕국에 정의를!”

방청객 중 누군가 그녀의 말을 따라 하며 소리쳤다. 다른 이들도 연호했다.

“페이런 왕국에 정의를!”

“페이런 왕국에 정의를!”

그 외침이 커질수록 트로우 백작과 얀 트로우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갔다.

세이건 공작이 자리에서 내려와 레아에게 다가왔다.

“이제 우리의 자리를 바꿔야 할 때인 것 같소, 공녀.”

그가 그녀와 헬릭스에게 자신이 앉아 있던 특별석을 가리켰다.

“부디 저기서 정의가 집행되는 광경을 지켜봐 주시오.”

레아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 괜찮겠나?”

특별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 헬릭스가 가만히 물었다. 재판 내내 너무 긴장하고 마나도 많이 써서, 그녀는 지금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고 다리도 후들거리는 상태였다. 레아가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올려 겨우 웃어 보였다.

“나 잘했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나.”

헬릭스는 자랑스러움과 걱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타박했다. 큰 손이 성급하게 차가운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은 재판 연단 위에 있을 때처럼 방청객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포포퐁.

급한 손짓만큼이나 다급한 마나 공급이었다. 레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듣고 싶은데. 나 잘했지.”

“……잘했다.”

잘했지만 너무 고생했지 않나. 그는 속마음을 누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빨리 쉬어야 한다.”

“아니, 그래도 잠깐만.”

“안다.”

헬릭스가 고개를 저으며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