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67)화 (67/120)
  • 67화

    트로우 경도 억울했다.

    불길에서 니니안이 살아 나올 줄 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루얀 피어트가 북부에 있었고, 소드마스터가 되어 돌아올 줄 어떻게 예상했겠는가?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저년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란 건 아버지셨잖아요!’

    ‘자연스럽게 처리하라 했지 누가 끝까지 지켜보지 말라 했더냐? 확인을 제대로 했어야지!’

    두 부자가 니 탓 내 탓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방청석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세상에, 내 눈을 믿을 수가 없군. 저 검기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니!”

    “그것도 검도 아닌 펜으로 말이에요. 소드마스터는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더니, 전설대로네요.”

    누군가는 감격에 훌쩍였다.

    “살아생전 내가 이런 걸 보다니. 여한이 없네. 좋은 생이었어.”

    “이 친구는 검이라곤 후계자 수업 때 두 달 잡아 본 게 다면서, 마음은 아주 기사단장이야.”

    “저 검기를 휘두르는 걸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 ❀ ❀

    모두 놀라고 경탄하는 와중에 칼로시 대공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왕자, 네 이놈.’

    치하하는 척하면서 침 발라 놓는 화법을 듣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이런 꼼수를 부려?’

    루얀의 충심이며 소드마스터가 된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칼로시 대공을 견제하고 루얀 피어트가 제 사람이라고 못 박아 두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찍어 낼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슬려 볼 것을!’

    패트릭 왕자가 적통이라 해도, 외가도 약하고 지지하는 세력도 적은 데다 이제 갓 성년을 지난 어린애였다.

    그에 반해 자신은 선대 왕의 막내아들로 대공의 신분에다 귀족파를 수십 년 이끌어 왔다. 게다가 뒤엔 오켄 제국이 있으니 다음 왕위를 노려 볼 만하지 않은가.

    왕은 병약하니 수년 내에 차기 왕위 다툼이 수면 위로 떠오를 터.

    페이런 왕국에서 세를 키워 가는 피어트 공작가 정도는 지금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 판국에 갑자기 소드마스터가 튀어나올 줄이야.’

    수백의 기사가, 수천의 병사가 못 하는 것을 홀로 해낸다는 탈인간급 병기가 아닌가. 그런 엄청난 무기가 왕자한테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피눈물이 났다.

    ‘루얀 피어트를, 피어트 공작가를 어떻게든 내 편으로 끌어들였어야…….’

    후회하던 그가 눈을 부릅떴다.

    안 될 일이었다.

    ‘저놈이 내 아들을 해쳤어.’

    그는 트로우 경이 니니안을 끌어들여 함정을 파고 그의 아들을 해쳤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럴 깜냥이 안 된다고 여겼으니까.

    ‘트로우 백작가에서 뭘 얻으려고 그딴 짓을 하겠나?’

    트로우 백작이 친제국파인 데다가 제국에서 맡기는 온갖 더러운 일들도 해 댄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 트로우 백작이 왜 친제국파의 거두인 칼로시 대공의 아들을 건드리고 뒤통수를 치겠는가?

    차라리 세상에 무서운 것 없다는 듯이 구는 루얀 피어트가 전부터 눈엣가시로 여기던 아들을 해쳤다는 게 신빙성 있었다.

    칼로시 대공이 루얀을 노려보았다.

    “소드마스터라니 감탄스러운 일입니다만. 이 일이 과연 페이런 왕국의 복이겠습니까? 목줄 없는 사자가 드래곤이 된 것이 아닙니까?”

    패트릭 왕자가 눈썹을 슥 올렸다.

    “말씀을 삼가시지요, 대공.”

    “왕자님은 지금 목줄을 잘 쥐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맹수는 왕실의 일원을 겁 없이 해친 자입니다. 왕자님께 덤비지 않을 거라고 어찌 믿으십니까?”

    올 게 왔구나. 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칼로시 대공은 예상했던 대로 트집을 잡아 왔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가 눈썹을 슥 치켜올렸다. 시의적절하게 헬릭스가 마나를 증폭시키며, 레아의 목소리에 위압감을 실었다.

    “남의 귀한 오빠를 맹수 취급하시다니, 말씀이 과하십니다.”

    “아들을 잃은 아비가 원수를 앞에 두고 어찌 말을 가리겠소?”

    칼로시 대공이 타는 듯한 눈빛으로 루얀을 노려보았다. 레아가 말했다.

    “아직 중요한 증인이 남았습니다.”

    증인이 또 있어?

    트로우 부자도, 방청객들도 당황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반응은 처음과는 영 달랐다. 이미 피어트 공작가를 지지하면서 그들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아는 그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이 순서대로 진행하길 잘했다니까.’

    버티기. 놀라게 만들기. 뒤집기. 막판 쐐기.

    ‘오빠들은 처음부터 쐐기를 박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역시 내 방법이 옳았어. 보는 사람들이 납득하는 과정을 다 밟아야 감정적으로 지지를 얻는다니까.’

    그리고 막판에 확실하게 충격을 줘야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었다.

    절룩, 절룩.

    가장 핵심적인 증인이 재판장에 등장했다.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 마지막 증인의 모습에, 청중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몇 귀족들은 얼굴에서 턱이 떨어져 나갈 듯했다.

    가장 놀란 건 칼로시 대공이었다.

    콰당.

    놀라 일어선 그의 서슬에 의자가 나뒹굴었다. 증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죽은 줄 알았던 더포드 남작이었다.

    ❀ ❀ ❀

    랜달 더포드 남작.

    루얀 측의 마지막 증인으로 그가 나오자, 재판장은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남작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얻어맞은 상처가 이제 겨우 아물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절 죽이려 한 건 루얀 피어트 경이 아니라 얀 트로우 경입니다!”

    더포드 남작이 트로우 경을 삿대질하며 그간의 일들을 토로했다.

    페이로즈에게 거액의 선물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꼬드긴 것. 그가 전한 대로 세이건 공작가의 파티에서 뒤뜰로 나갔던 일. 페이로즈처럼 꾸민 여자에게 홀려 다가가다 머리를 맞고 쓰러진 것까지.

    남작의 진술은 니니안과 모두 일치했다. 그의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깨어나 보니 퀴퀴한 창고였습니다.”

    팔과 다리가 묶인 채였고, 기절해 있을 때 어디를 어떻게 때렸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같은 건물에 있던 비쩍 곯은 여자들이 돌봐 주지 않았다면 죽었을 거였다.

    “알고 보니 매춘부 숙소 창고에 절 가둬 뒀던 거였습니다.”

    듣고 있던 방청객들은 트로우 경의 용의주도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여배우가, 돈 주겠다고 자길 불러내서 가두고 불을 질렀다고 했어요!”

    “며칠 전에 화재가 났던 데가 쉬쉬하는 그 클럽이라면서요? 거기 뒤채에서 불이 났다고…….”

    “그러면 그 뒤채 창고에 더포드 남작을 가둬 두고, 그 여배우도 거기로 불러내서 불을 낸 거네요? 어머나 어쩜!”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오늘 이 재판에서 정보는 넘치도록 나온 상태였다. 방청객들이 추론하기 시작했다.

    “한번에 해치우려는 거였을까?”

    “그게 다겠어요? 혹시 이 일이 나중에 알려졌어 봐요.”

    뒷일이 어떻게 될지 훤했다.

    ‘더포드 남작의 시신이 불난 사창가에서 발견됐대.’

    ‘그럼 뭐야. 더포드 남작이 뻘짓 하다 죽었는데 루얀 피어트가 재수 없게 휘말린 거였네?’

    ‘루얀 피어트 손에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더포드 남작이 진짜 사창가에서 죽은 건지, 그 시체는 언제 적 시체인지, 루얀 피어트 짓이라고 처음에 소문낸 건 누군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고 들춰내지 않았을 게 아닌가.

    칼로시 대공조차 추문을 피하려고 덮었을 테니까.

    “허어. 그러니까 걸렸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려고…… 그렇게 일을 꾸민 거로군!”

    “어쩌면 저렇게 악랄할 수가!”

    상황을 알게 된 청중이 분노했다.

    “아주 우리 모두 홀딱 속아 넘어갈 뻔했습니다!”

    “더포드 남작을 속여서 저렇게 만들어 놓고, 재판까지 와서 뻔뻔하게 증인 노릇을 하다니.”

    “루얀 피어트가 더포드 남작을 해쳤을 거란 소문도 트로우 백작가에서 낸 거 아닙니까?”

    ❀ ❀ ❀

    그중 가장 화가 난 건 칼로시 대공이었다.

    그를 여기까지 몰아붙이고 아들을 해친 적은 피어트 공작가가 아니었다. 제 수하인 줄 알았던 트로우 백작가였다. 대로한 대공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뭣들 하느냐. 남작을 부축해 치료하러 가지 않고.”

    “예, 각하.”

    칼로시 대공의 부하들이 더포드 남작에게 망토를 덮어 데려가려 하자, 재판장이 곤란해하며 말렸다.

    “즈, 증인을 이렇게 데려가시면…….”

    “지금 이 재판에 더 의미가 있겠나?”

    칼로시 대공이 되묻고는 피어트의 두 남매 쪽으로 돌아섰다. 그가 허리를 숙였다.

    “내 어리석은 오해로 큰 폐를 끼쳤군.”

    ‘암. 큰 폐였지.’

    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양쪽 다 지금은 서로가 아니라 트로우 백작가를 팰 때였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일어나 목례했다.

    “이제라도 오해를 풀게 되어 다행일 따름입니다.”

    허리를 세운 칼로시 대공이 특별방청석에 앉은 트로우 백작과 얀 트로우 경을 노려보았다.

    “이 일을 저지른 자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대, 대공님……!”

    칼로시 대공은 살기를 풍기며 더포드 남작을 데리고 재판장을 떠났다.

    “대, 대공님…… 오해가…… 저희가 그랬을 리가 있겠습니까!”

    트로우 백작이 외쳤지만 대공은 돌아보지 않았다. 백작의 공허한 외침에 반응한 건 다른 사람이었다.

    벌떡.

    맞은편의 특별석에 앉아 있던 세이건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딸을…… 어떻게 했나?”

    흉포한 기세에 얀 트로우는 딸꾹질을 했다.

    “공작님, 그것이…….”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뜻밖에도 레아가 나섰다.

    “유리아 세이건 공녀는 저희 가문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트로우 경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유리아 세이건은 자신이 가둬 두고 있었다. 더포드 남작를 꾀어내 기절시킬 때 그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더포드 남작처럼 처리해 버리기엔 아까우니, 겁을 잔뜩 준 다음 임신시킬 생각이었다. 일단 그래 놓고 세이건 공작에게 결혼과 성대한 지참금을 요구하면 통할 거라 여겼다.

    명문가 태생의 예쁘고 어리며 겁먹어 고분고분한 마누라. 딸이란 족쇄에 잡혀 호구 뒷배가 되어 줄 세이건 공작과 공작가. 유리아 세이건은 여러모로 탐스러운 먹잇감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따로 가둬 놓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트로우 경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거짓…… 거짓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