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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66)화 (66/120)

66화

그녀가 보란 듯이 화려한 붉은 머리를 넘기며 증언석에 착 자리를 잡았다. 과시하는 듯한 큰 동작에 사람들의 시선에 그녀에게 쏠렸을 때, 여자가 제 풍성한 붉은 머리채를 확 잡아 뜯었다.

붉은 머리 가발 아래 금발이 드러났다.

“유리아 세이건 공녀가 아니었군!”

사람들이 수군댔다.

“설마 공녀가 여기까지 나왔겠어요?”

“그랬으면 세이건 공작이 저리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데려갔겠지!”

자신들도 긴가민가했던 방청객들이 서로를 타박하는 사이, 유리아 세이건 공녀를 빼닮은 금발의 미소녀가 입을 열었다.

“이 붉은 머리 가발은 트로우 경이 제게 사 주신 것입니다.”

제자리로 돌아가던 트로우 경이 소스라쳐서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내용에 놀라고,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쇠로 긁는 듯한 목소리에 한 번 더 놀랐다.

콜록. 기침을 한 여자가 목을 잡고 사과했다.

“목소리가 이래서 죄송합니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서…….”

트로우 경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여자가 말했다.

“며칠 전에 누가 불을 질러서 죽을 뻔했거든요.”

재판장이 술렁였다.

“조용, 조용!”

재판관이 소리쳤다.

“증인. 신성한 재판장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는 자제하고, 재판과 관련 있는 이야기만 해 주시오.”

“어머, 존경하는 재판장님. 당연히 재판과 관련 있는 얘기지요.”

여자는 기죽지 않고 말했다.

“저는 연극배우인 니니안. 수도 북쪽의 로세티 극장에서 출연하고 있습니다.”

니니안을 알아본 사람은 몇 없었다.

로세티 극장은 귀족들이 애용하는 극장이 아니었으니까.

허름한 건물. 아직 뜨지 못한 신출내기 배우들이 펼치는 서투른 연기. 막장이고 자극적인데 보다 보면 지루해지는 우연 남발의 스토리.

그런 삼박자를 다 갖춘 삼류극장이었다.

“저렇게 미모가 빼어난데 그런 삼류극장에서 일하다니.”

“아직 연기력이 부족한 모양이지요.”

방청객들이 수런거리며 니니안을 주시했다.

“어느 날,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화장을 지우고 있는데 극장 지배인이 달려왔어요. 저한테 후원을 해 주고 싶다는 귀족분이 나타나셨다고요. 저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드디어 줄을 잡았다고, 이 지겨운 극장을 벗어나 수도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이어지는 뒷얘기에 청중은 귀를 기울였다.

제 미모에 혹해서 후원한 줄 알았는데 묘하게 심드렁하더라는 것. 붉은 머리 가발을 사 줄 때에도 후원자가 붉은 머리가 취향인가 보다 했다는 것. 수줍은 소녀처럼 행동하라 하거나, 요정처럼 사뿐사뿐 움직이라고 요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

방청객들은 들을수록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귀족이 니니안에게 누구를 흉내 내게 시킨 것인지.

“…….”

특별석에 앉은 세이건 공작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다 못해 검게 변해 있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엔 귀족 아가씨나 입을 법한 분홍 드레스를 선물하는 거예요.”

니니안도 그때쯤에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녀에게 푹 빠진 것도 아니면서 그런 비싼 드레스를 선물하다니.

“마음에 둔 귀족 영애 대신 나한테 이러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죠.”

안일한 생각이었다며 니니안이 몸을 떨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차려입은 저를 으리으리한 귀족 저택의 뒷문으로 데려갔어요.”

그때엔 니니안의 머릿속에도 이건 아니라는 경보가 울렸다.

누가 봐도 귀족 영애처럼 꾸민 자신의 모습. 본 파티장도 아니고 귀족 저택의 뒷문으로 자신을 들이려는 것.

“저는 이럴 거면 돈을 달라고 했어요.”

니니안이 떨면서 말했다.

“저도 듣는 소문이 있어요. 저를 그 유명한 장미 아가씨의 대역으로 쓰려는 거잖아요? 무슨 속임수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쓸 거면 보수를 달라고 했죠.”

방청객들이 숨을 들이켤 때, 레아가 불쑥 물었다.

“그 저택이 누구의 저택인지는 기억합니까?”

“제가 귀족 나리들의 저택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럼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하나요?”

니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뒷문 근처에 나무가 무성하고, 후원이 파티장이 있는 건물하고 꽤 떨어져 있었어요. 그리고 그 뒷문에 문장이 붙어 있었는데…….”

“어떻게 생긴 문장이었습니까?”

“도끼랑 칼이 그려져 있었어요.”

세이건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대담한 행각에 듣고 있던 방청객들의 얼굴도 질렸다. 세이건 공작가의 저택에, 유리아 세이건을 흉내 낸 여자를 몰래 들이다니!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세이건 공작이 벌떡 일어섰다.

“누구냐!”

그가 소리쳤다.

“누가 네게 그런 짓을 시켰나?!”

니니안의 고개가 몇 개의 특별방청석 쪽으로 돌아갔다. 세이건 공작과 나머지 방청객들의 시선도 그녀를 쫓았다.

니니안의 시선 끝에, 파랗게 질린 트로우 경이 보였다.

“저기 있네요.”

❀ ❀ ❀

“헛소리!”

트로우 경이 발악하듯 외쳤다.

“한몫 잡으려는 매춘부의 헛소리일 뿐입니다! 피어트 공작가에서 얼마를 약속받았는지 몰라도……!”

“돈은 네가 안 줬잖아!”

니니안의 째지는 외침이 트로우 경의 말을 갈랐다.

“그 저택 정원에서 웬 남자한테 꼬리 치게 해 놓고, 네 호위한테 그 사람 머리를 내리치게 시켰잖아! 피 묻은 몽둥이를 들이대면서, 돈은 나중에 줄 테니까 조용히 있으라고 했잖아!”

“무슨 헛소리냐!”

“저자가 불을 질렀어요! 돈을 준다고 기다리라고 해 놓고,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다고!”

짚이는 데가 있는 귀족들이 니니안과 트로우 경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며칠 전 비밀클럽에서 일어났던 그 화재가?’

트로우 경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천하고 돈 밝히는 매춘부의 말일 뿐입니다! 제게서 뜻대로 얻는 게 없으니까, 피어트가에 붙어서 저를 깎아내리고 돈을 받아 내려는 속셈이에요!”

그가 루얀을 가리켰다.

“더포드 남작님이 루얀 피어트를 두려워한 것도, 이런 일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패고, 묻고, 신성한 재판정에 매춘부까지 끌어들여 누명을 씌우고!”

혼란통에 지목당한 루얀이 입을 열었다.

“안 팼어.”

“당신이 아니면 누가 감히 더포드 남작님에게 손을 댔겠습니까?”

“난 그때 수도에 없었어. 다른 데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고.”

“……!”

예상 밖의 말에 트로우 경이 딸꾹질을 했다.

칼로시 대공도 방청객들도 놀랐다. 순간 당황한 그들이 기억을 더듬었다.

‘루얀 피어트는 대체 뭘 하느라 코빼기도 안 비친답니까?’

‘페이릴리가 아파서 상심한 게 아닐까요?’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쯔쯔, 그 팔불출이라면 그러고도 남지요.’

‘그래도 수확제까지 안 나올 줄이야…….’

그렇지만 루얀 피어트가 어디서 뭘 하는지, 진짜 저택에 틀어박힌 건지, 제대로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소문일 뿐이었다. 루얀이 더포드 남작을 패서 묻었다는 그 소문처럼…….

“그의 말이 맞네.”

페넬라 홀의 문이 열리면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판관이 벌떡 일어섰다.

“왕자 저하!”

❀ ❀ ❀

방청객들이 놀라 돌아보았다.

“왕자님?!”

“왕자님이 왜 여기에?”

패트릭 왕자는 뚜벅뚜벅 걸어와 재판이 진행되는 연단에 섰다. 니니안이 눈치 빠르게 내려온 증인석에 패트릭 왕자가 올라서 말했다.

“루얀 피어트는 내가 이끄는 토벌대에 동행했다네.”

트로우 경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칼로시 대공도 당황했다.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비밀리에 동참했으니까요.”

왕자가 설명했다.

“왕국제일검인 루얀 피어트 경이 토벌대에 합류했다고 하면, 북부의 몬스터 사태가 심각하다고 오해하는 소문이 퍼지지 않겠습니까. 민심의 안정을 위해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다.”

패트릭 왕자가 청중을 향해 씩 웃었다.

“다들 그 몬스터 토벌에서 활약하는 루얀 피어트 경을 봤어야 하는데. 대검을 무슨 빵 자르는 칼 다루듯 하더군. 몬스터들이 다른 기사들한테 달려들 틈도 없었지.”

루얀이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하, 겸손은. 자네가 해치운 몬스터만 백 마리가 넘지 않는가.”

현실감 없는 활약을 듣고 있던 남자 귀족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토벌대가 그렇게 파죽지세로 북부를 헤집은 거로군!”

“어쩐지 새로운 혜성이 나타났나 했더니, 그게 루얀 피어트였나?”

그렇지만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왕자와 루얀이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피어트가의 협력이 필요한 왕자가 이 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게 아닌가.

패트릭 왕자는 그 미심쩍은 시선들 앞에서 빙글 웃었다.

“그렇게 몬스터를 혼자 다 무찌르고 다니더니, 그가 힘을 얻었지 뭔가.”

힘?

어리둥절한 청중들 앞에서, 루얀 피어트가 일어섰다.

레아가 자연스럽게 제 앞에 놓여 있던 펜을 건네주었다. 펜을 받은 루얀이 그것을 똑바로 들었다.

파아앗!

펜에서 새파란 검기가 솟구쳤다.

❀ ❀ ❀

“거, 검기가……!”

검기를 본 이들이 놀라 외쳤다. 검 좀 잡는다는 귀족들은 더욱 경악해 눈을 비볐다.

대리석도 철도 무 썰듯 한다는 전설 속의 검기가 페넬라 홀의 지붕을 뚫을 기세로 뻗고 있었다.

얀 트로우 경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앞니 빠진 채 경악하는 꼴에 몇몇 귀족들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얀 트로우를 볼 정신도 없었다.

“와, 이게 뭐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미진진한 법정 싸움이었고. 그다음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막장 드라마였는데.

갑자기 루얀 피어트가 전설에서나 듣던 검기를 보이며 다 뒤집어 놓았다. 얼이 나간 방청객들 앞에서 패트릭 왕자가 말했다.

“물러나지 않는 충심을 보여 주었던 루얀 피어트. 그가 소드마스터가 되었으니 페이런 왕국의 경사로다.”

표정은 근엄하고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왕자의 카리스마에 고개를 끄덕이던 방청객들은 한발 늦게 깨달았다.

“소, 소드마스터……!”

“루얀 피어트가 소드마스터…… 와, 이게 이렇게……!”

패트릭 왕자가 청중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페이런 왕국을 이끌 사람으로서 참으로 마음이 든든하구나.”

“맞습니다!”

“참으로 왕국의 경사이며 왕자님의 복이십니다!”

재판장의 분위기는 레아와 루얀 쪽으로 완전히 넘어왔다.

트로우 백작이 희게 질렸다. 그가 아들인 트로우 경을 눈빛으로 매섭게 채근했다.

‘일을 이따위로 허술하게 처리하다니! 어쩔 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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