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코앞에서 트로우 경의 말을 듣는 헬릭스는 좀 더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마스터에게서 수상한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더포드 남작의 행적을 다시 파다 보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공녀님에게 처음 비약을 먹이고, 이차로 암살자를 보내 독을 먹이려 했던 인물이 더포드 남작 같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사건의 전말이 짐작이 갔다.
‘트로우 백작가에서 그 비약을 다루며 인체실험을 한다 했으니, 그 비약 또한 트로우에게서 더포드 남작에게로 나간 것이겠지.’
한마디로, 실종됐다는 더포드 남작과 지금 증언석에서 가증을 떠는 트로우 경이 합심해서 레아를 죽이려 들었단 소리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번엔 추문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고.
부르르.
헬릭스는 탁자 위에서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고, 다시 증언석을 쳐다봤다. 옅은 회색 눈이 얼음 같은 빛을 뿜었다.
움찔.
저도 모르게 기세에 눌린 트로우 경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더포드 남작님은 점점 더 힘들어하셨습니다. 장미와 백합의 경쟁이 시작되며 눈에 띄게 무서워하셨죠.”
그가 레아와 헬릭스 쪽을 본 뒤 더욱 움츠린 모습을 보이자 청중은 피어트 공작가에게 더 싸늘해졌다. 트로우 경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렇지만 페이로즈, 아니 유리아 세이건 공녀에 대한 진실 되고 애타는 마음으로 견디신 것입니다. 늘 저를 보고 유리아 공녀가 뭘 좋아하느냐 물으셨고, 그녀가 남작님의 진심을 곡해할까 걱정하셨습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요정 같은 이라고 좋아하셨는데…….”
쾅.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칼로시 대공이 원고석 앞에 놓인 탁자를 쳤다. 연륜으로 주름진 눈매가 붉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왕실 인사를 위협하고 해치다니, 이것은 왕실에 대한 명백한 도전입니다.”
아들의 실종으로 끓는 감정을 누르고 명분부터 말하는 칼로시 대공이었다.
그 노련한 정치인다운 자세에 청중은 감탄했다. 칼로시 대공이 말했다.
“루얀 피어트를 살인 및 반역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청중이 큰 소리로 동조했다.
“옳습니다!”
“무도한 루얀 피어트를 봐주지 말고 처벌해야 합니다!”
몇몇 성질 급한 방청객은 목청을 높이며 일어서기까지 했다. 칼로시 대공이 레아 쪽을 보며 꾸짖듯 외쳤다.
“또한 레아 피어트 역시, 그 일을 부추기고 묵과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이오!”
쾅!
레아도 지지 않고 탁자를 내리쳤다.
예상 못 한 위협적인 기세에 대공도 방청객도 움찔했다. 그녀가 서슬 퍼렇게 되물었다.
“루얀 피어트가 더포드 남작을 직접 위협하는 장면을 보았습니까? 찔리는 게 있던 이들이 지레 겁먹은 거 아닙니까?”
마나로 증폭된 목소리가 홀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직 증언석에 서 있던 트로우 경이 급히 반박했다.
“다른 이들이 당하는 걸 봤으니 그랬겠지요!”
“당한 다른 이들이라면 누굽니까? 저자? 아니면 저자?”
레아가 조금 전 증언했던 귀족을 가리켰다. 페이릴리가 백합을 유행시킨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루얀에게 맞았다고 한 자였다.
“저도 그 사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저 때문에 매춘부들이 가슴에 백합을 꽂고 다닐 판이라고, 이러다 페이릴리가 창부들 예명으로 불리겠다고 했다고 했다지요?”
생각지 못한 센 발언에 방청객들이 입을 벌렸다. 레아가 좌중을 훑어보았다.
“명예로운 페이런의 귀족이자 대귀족 피어트 공작가의 일원인 제가, 어째서 그런 모욕을 들어야 하는 걸까요? 또한!”
레아가 턱을 꼿꼿이 들었다.
“세상 어느 멀쩡한 오라비가 여동생을 매춘부와 비교하는데 참고 있겠습니까?”
그녀가 손을 들어 가슴을 내리눌렀다.
“저희 오빠는 그럴 때 참는 비겁한 사람이 아닙니다. 동생과 가문의 명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귀족이자 기사란 말입니다.”
❀ ❀ ❀
방청객들은 뜨악해서 레아가 가리킨 귀족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귀족 영애한테 그런 말을……!”
“어느 집안 영식입니까?”
창백해진 귀족이 손을 저었다.
“그, 그렇게까지는……!”
“루얀 피어트. 제 오빠는 기사의 덕목을 지켰습니다.”
그녀는 귀족의 변명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동생의 명예를 위해 나설 때에도 검을 뽑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청중이 술렁였다.
“주먹만 썼을 뿐이지요.”
그 주먹이 이미 흉기잖아! 맞았던 귀족이 속으로 외쳤다.
그렇지만 그도 눈치가 있었다. 지금 여기서 그 말까지 했다간 제 체면이 더 상하는 건 물론이요, 피어트 가문에 더욱 단단히 찍힐 게 분명했다.
게다가 술렁이는 분위기는 조금 전과 달랐다.
칼로시 대공과 트로우 경에게 완전 넘어가는 듯했던 방청객의 마음이 다시 레아 피어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칼로시 대공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결백하다면.”
칼로시 대공이 잠시 말을 멈추고 형형한 눈으로 레아를 쳐다봤다.
“루얀 피어트가 왜 출석하지 않는가?”
묵직한 한마디였다.
그 말에 방청석이 술렁였다. 기회를 감지한 트로우 경이 재빨리 새되게 외쳤다.
“벌써 도망친 것 아닙니까?”
❀ ❀ ❀
“내가?”
갑자기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을?”
가당찮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음기까지 서린 음성이었다.
루얀 피어트였다.
열린 문 사이로 빛이 들어와 그의 백금발을 후광처럼 비추었다. 잠이 모자란 듯 녹색 눈을 잠시 깜박이며 서 있는 그를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마치 낮잠을 방해받은 요정이나 인간계에 싫증 난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판장이 외쳤다.
“피고는 재판장에 예의를 갖추시오!”
“아, 죄송합니다. 도망이라니, 생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서.”
루얀이 말했다. 레아가 잽싸게 말을 받았다.
“제 오빠는 평생 물러난 적이 없습니다. 전투에서도, 토너먼트에서도.”
그녀가 뒷말에 힘을 주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요. 몇 년 전 토너먼트에 난입해 국왕 전하와 왕자 저하, 그리고 무수한 귀족인사들을 위협하던 불한당 같은 역적 무리를요.”
방청객들 중 상당수가 움찔했다. 레아는 목소리를 높였다.
“도적으로 위장했지만 검을 쓰는 실력이 상당하던 그 역적 무리를, 누가 제압했습니까? 누가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상대했습니까?”
그녀의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랬다.
루얀 피어트에게 사람들이 관대한 건, 그가 왕국제일검이고 피어트 공작가의 차남이자 기사단장이어서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토너먼트에 난입해 왕족과 귀족들을 인질로 잡은 도적들. 놈들을 제압하기 위해, 루얀이 연단에서 우승자의 관을 쓴 채 검을 뽑아 들었던 일은 아직도 가끔 회자되고 있었다.
뿐인가.
그때 검귀처럼 베고 또 베던 그는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크게 앓고 난 뒤 예전의 천재적인 몸놀림을 잃고 말았다.
지금도 왕국제일검이기는 하지만 예전의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말했다.
날개 꺾인 천재, 불운한 천재라고.
레아는 지금 그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희는 내 오빠에게 목숨을 빚졌고, 내 오빠는 너희를 구하다 찬란한 재능을 잃었다.’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좌중을 훑어보다 피고석으로 다가오는 루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양심이 따끔따끔해지던 방청객들도 루얀을 쳐다보았다.
저벅저벅.
피고석으로 걸어가는 루얀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늘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해 보이던 천사 같던 얼굴에, 피곤과 억울함과 화가 뒤섞여 애처로웠다.
“어떡해…….”
그 얼굴에 홀린 귀족 영애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옆에서 귀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루얀이 작게 한숨을 쉬며 피고석에 앉을 때는, 방청석 여기저기서 안쓰러워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작은오빠, 나이스.’
그런 루얀을 기특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재판장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증인을 신청합니다.”
❀ ❀ ❀
피어트 쪽 증인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놀라 외쳤다.
“페이로즈?”
풍성하고 화려한 붉은 곱슬머리. 새초롬한 눈매와 도톰한 입술이 인상적인 미소녀였다. 방청석의 사람들이 제 눈을 의심했다가, 특별석에 앉은 세이건 공작을 쳐다보았다.
세이건 공작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감히 내 딸을…….”
몇 년 전 상처하고, 혹시 엄마의 빈자리로 기죽을까 노심초사해 온 딸이었다.
그런데 그 딸을 감히 흉내 내다니.
분노로 떨리는 손을 그가 꽉 쥐었다. 평생 서부에서 해적들과 싸워 온 거친 주먹에 핏줄이 일어섰다.
세이건 공작의 반응에 청중이 술렁였다.
“피어트 공작가는 이제 세이건 공작가와도 척을 질 생각인가?”
“동부의 피어트, 서부의 세이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국경이…….”
“당장 국경보다 내부분열이 더 걱정일세.”
사람들은 세이건 공작의 극적인 반응을 살피느라 몰랐다. 증언석에 아직 서 있던 트로우 경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것을.
또각또각.
증언석으로 다가오는 붉은 머리의 미소녀가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노려보았다.
“이 천한 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트로우 경이 증언석의 모서리를 꽉 잡은 채 잇새로 내뱉었다.
미소녀가 표독스럽게 대꾸했다.
“어디긴 어디야! 당신 묫자리지.”
“이년이……!”
당장 칠 기세던 트로우 경이 침을 삼켰다. 여기서 이래 봤자 저 여자와 무슨 사이냐는 의혹이나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만있기에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잠시 갈등하던 그가 슬그머니 몸을 뺐다.
‘무슨 말을 하든, 천한 년이 돈에 넘어가서 거짓 증언을 한 거라고 몰아붙이면 돼.’
그러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떨어지는 게 좋았다. 트로우 경은 두고 보자는 눈빛으로 여자를 보며 증언석에서 내려갔다. 여자를 스치는 그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쓸데없는 생각 마라. 내가 나서면 너 하나 발붙일 데 있을 거 같아?”
여자의 입매가 비웃듯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