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세이건 공작님은 오늘 원고 측이 아니라 특별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하신다던데.”
“허어…….”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세이건 공작은 딸 때문에 휩쓸렸을 뿐 주도적으로 이 촌극에 참여한 거 같진 않네. 그렇다면 트로우 백작 쪽에 던져 줄 폭탄이 더 늘어나겠는걸.’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아, 기분이 좋아 보인다.”
헬릭스가 소곤대는 말에 레아가 표정 관리를 했다.
“티 나? 나면 안 되는데.”
“지금은 안 난다.”
“그래. 나 표정 관리 안 되면 좀 말려 줘. 기껏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출격했는데, 사소한 데서 흠 잡힐 순 없으니까.”
레아는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자료와 증인은 물론이고 옷차림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평소와 다르도록 신경 썼다.
바짝 틀어 올린 머리와 힘을 준 눈썹, 짙은 남색의 공단 드레스가 어우러져 단정하고 신뢰 가는 인상을 주려고 애쓴 모습이었다.
‘면접 준비하는 기분이었어…….’
그녀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타이밍 좋게 헬릭스가 마나를 건넸다.
퐁.
“걱정 마라.”
그가 앞을 보며 말했다.
“이 재판장에선 레아 네가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일 없을 거다. 내가 마나로 카리스마를 뿜도록 도울 테니까.”
심장에 갑옷을 댄 듯 든든했다. 레아는 애써 무표정하게 앞을 보며 대꾸했다.
“헬릭스만 믿을게.”
“거짓말하지 마라.”
헬릭스가 작게 덧붙였다.
“레아 너는 너 자신도 믿고 있지 않나.”
저도 모르게 크게 웃을 뻔했다.
새어 나오지 않아도, 배 속에 고인 웃음은 든든하게 그녀를 지지해 주었다. 등이 절로 꼿꼿해지고, 턱이 곧게 들리고, 어깨가 펴졌다. 레아의 눈에 빛이 깃들었다.
‘좋아. 시작이다.’
❀ ❀ ❀
트로우 백작과 그의 장남 얀 트로우 경은 특별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비난받는 레아를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이날이 왔습니다, 아버지.”
트로우 경이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작게 말했다. 백작은 미소 띤 얼굴로 타박했다.
“조용히 해라. 그리고 앞니가 나간 얼굴로 웃으니 모자라 보이는구나.”
“……주의하겠습니다.”
“쯔쯔. 그러게 밤마실은 정도껏 다니라 했건만. 뭘 하고 다니다 그 꼴로 맞고 온 게냐?”
할 말 없는 트로우 경은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이게 다 그 쥐새끼들 때문이었다. 며칠 전 단골 비밀클럽에서 제가 예약한 방에 숨어든 건방진 쥐새끼들.
도둑 정사를 하려는 낮은 신분의 연놈들이었지만 몸매며 가면 너머 얼굴이 꽤 반반했다. 기분전환도 할 겸 겁을 줘서 데리고 놀 생각이었는데, 쥐새끼들이 답지 않게 한 성깔들 했다.
‘남자 놈은 주먹으로 귀족을 치지 않나, 그년은 의자로 사람 머리를 찍지 않나.’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었다.
‘감히 그 비밀클럽에서 나를 물 먹여?’
예약자 명단에서 연놈들을 찾아서 아주 갈아 놓으려고 했는데. 하필 불이 클럽 본채까지 옮겨붙는 바람에 도망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나중에라도 밤마실 나왔다가 또 마주치게 되면 혼쭐을 내주리라. 이를 득득 가는 그에게 백작이 말했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증언도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 믿을 만한 인물처럼 보여야 한다.”
“예. 앞니는 잘 가리도록 하겠습니다.”
트로우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결전의 날이자 수확의 날이었다. 그간 두 부자가 얼마나 애써서 그물을 쳤던가.
세이건 공작에게 접근해 딸 유리아 세이건의 데뷔탕트를 화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하고. 겁먹고 칩거 중이었던 더포드 남작을 꼬드겨 유리아 공녀를 쫓아다니도록 부추기고.
유리아 세이건이 얻은 페이로즈라는 별명, 사교계를 뒤흔든 장미와 백합의 전쟁. 모두 그들이 해낸 거나 다름없었다. 뿐인가.
‘페이릴리는 한물갔다, 페이로즈가 대세다.’
‘장미와 백합의 전쟁 때문에 루얀 피어트가 더포드 남작을 벼른다더라.’
페이릴리와 피어트 가문을 깎아내리는 소문을 내며 열심히 부채질했다.
그러잖아도 피어트 공작가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속으로 질투하던 사교계 사람들은 이 먹음직스러운 미끼들을 꿀떡꿀떡 잘도 삼켰다.
이제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든 큰 고기를 잡아들일 때였다.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어.’
페이릴리와 루얀 피어트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왕실 특별재판이라니. 몇 달 전만 해도 상상이나 했겠는가.
“루얀 피어트의 그 자신만만한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보게 되겠군요.”
반지르르한 낯짝이 포승줄에 묶여 굴욕에 물들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트로우 백작이 슬쩍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기대하진 마라. 그래도 공작가 차남에 왕국제일검이다. 한 번의 의혹으로 바로 거꾸러트릴 순 없을 테지.”
말과는 달리 백작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흠을 내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
트로우 백작의 말에 트로우 경이 귀를 기울였다.
“철옹성 같던 명성도 흠이 생기면 흔들리기 마련. 흠이 생긴 자를 사지로 밀어 넣고 슬쩍 떠민다면…….”
트로우 경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사지라면 어디 말입니까?”
백작도 거의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지금 오켄 제국과 소규모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면, 혹은 오켄 제국에서 국경 근처의 도적떼를 소탕할 것을 요구한다면. 누가 가게 되겠느냐?”
트로우 경은 깨달았다.
평소 같으면 루얀 피어트가 갈 이유가 없을 터. 하나 왕족 살해죄의 의혹을 뒤집어쓴 뒤라면, 왕실에 충성심을 증명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루얀이 가야 하리라.
그러고 전장에서 아군의 눈먼 화살에 당하는 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게 된 트로우 경이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이 아들은 놀랄 뿐입니다. 거기까지 생각해 두셨다니.”
“루얀 피어트는 시작일 뿐이다.”
트로우 백작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피어트 공작가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 ❀ ❀
“이 법정에 테미라 여신의 자비와 페이런 국왕 전하의 정의가 함께하길.”
단상에 오른 재판관이 특별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국왕 전하께선 감기가 심해지셔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레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국왕이 불참한 것이 다행이네.’
칼로시 대공의 청을 들어주긴 했지만, 피어트 공작가를 아예 적으로 돌리진 않겠다는 메시지일 터였다. 그녀가 칼로시 대공 쪽을 흘깃 보았다.
대공은 국왕의 불참 소식에 잠깐 인상을 썼다가,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 재판은 자신이 이긴 거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과연 그 표정에는 이유가 있었다. 증인들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루얀 피어트 경이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습니다.”
칼로시 대공 측의 증인들이 단상에 올라 말했다.
루얀에게 맞아 오래 병상에 있었다던 귀족이었다. 그는 클럽에서 페이릴리 이야기를 하다가 루얀에게 맞아 기절했다고 했다.
“페이릴리 이야기는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폭력을 휘두르지 뭡니까.”
“페이릴리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페이릴리 때문에 백합 장식이 유행하는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 장식이 매춘부들 사이에 유행할 거라 조롱했던 것은 쏙 빼놓은 말이었다.
뒤이어 나온 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루얀이 얼마나 쉽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성정인지. 또 특히 여동생 일이라면 얼마나 발작 버튼이 눌리는지. 각양각색의 목격담과 증언이 쏟아졌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구길 뻔했다.
‘이 오빠 놈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방청석에서 듣고 있던 귀족들이 놀라 수군댔다.
“저렇게까지 무도한 자일 줄이야. 고삐 풀린 망아지가 아닙니까?”
“망아지면 다행이지요. 왕국제일검입니다. 맹수 중의 맹수가 고삐도 없이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기사가 칼을 뽑는 일엔 신중해야 하는데, 저렇게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러서야.”
“하는 짓을 보면 시정잡배가 아닙니까? 왕국제일검으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흥분한 귀족들이 침을 튀겼다.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새 증인이 증언대에 올랐다. 트로우 백작가의 장남 얀 트로우였다.
평소 달변은 아니어도 제법 말재간이 있는 그였는데, 오늘은 왜인지 입을 작게 벌리며 우물우물 입을 떼었다.
“지난 수확제 후 더포드 남작님을 오랜만에 뵈러 갔을 때, 그분은 소화가 안 되고 몸이 안 좋다고 하소연하셨습니다. 평소 건강하던 분이시라 제가 이유를 캐물었지요.”
트로우 경이 흘끔, 피고석 쪽을 보며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 루얀 피어트 경이 보복할까 두려워서 칩거 중이신 것이었습니다.”
답답한 모습에 왜 저러나 싶던 방청객들이 상황을 이해했다.
‘피어트 공작가, 특히 루얀의 보복을 두려워해 저러는 것이구나!’
그래도 왕실 핏줄인 더포드 남작이었다.
그가 떨면서 저택 밖으로도 못 나오게 만든 루얀이니, 지금 트로우 경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재판장이 물었다.
“더포드 남작이 루얀 피어트 경에게 보복당할 만한 일이 있었는가?”
“그분은 그저 레아 피어트 영애의 아리따운 모습을 찬양하셨을 뿐입니다. 백합의 향기가 그토록 그윽하니, 그 자태와 향취를 좇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트로우 경의 말에 청중이 고개를 주억였다.
더포드 남작이 페이릴리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좀 도를 넘었을 뿐, 크게 해를 끼친 건 아니지 않은가?
‘빡친다…….’
레아는 뻐근해져 오는 뒷목을 잡지 못하고 대신 눈을 꾹 감았다.
‘더포드 남작이 숨어서 못 나오는 건 가여운 일이고, 그놈의 공개구애, 스토킹, 소문 뿌리기로 생겼던 내 스트레스와 건강 악화는 별일 아니냐?’
분노하는 건 레아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