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당연히 ‘그만해라, 뭐 하는 짓인가’ 그런 타박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헬릭스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 머쓱하고 수줍은 침묵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레아는 눈치를 보면서 슬쩍 물었다.
“……나 지금 충전해도 돼?”
“……기회를 너무 잘 잡는 거 아닌가.”
퉁명스러운 어조였지만 분명 허락이었다. 그녀가 헤실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럼 이럴 때 급속 충전해야지.”
레아가 헬릭스의 가슴에 파고들어 꼬옥 껴안았다.
쿵쿵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온갖 걱정과 헬릭스에 대한 연민으로 헝클어져 있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따뜻한 품에 뺨을 비비며 생각했다.
잠도 못 자고, 이렇게 날밤 새우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헬릭스와 더 가까워지고 그를 위로해 주는 밤이 될 줄은 몰랐다. 북부의 숲과 같은 헬릭스의 향이 코끝을 감돌았다.
‘이런 게 전화위복인가 봐.’
생각하던 레아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잠깐만…… 전화위복?’
❀ ❀ ❀
전화위복.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
‘이거다!’
레아는 드디어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헬릭스와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레아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엄마, 아빠, 오빠들. 이건 기회예요. 우리 쪽이 재판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기회? 무슨 기회 말이냐?”
“여론을 뒤집을 기회요!”
그녀가 설명했다.
“결국 이 재판의 본질은 세력싸움이잖아요.”
“더포드 남작과 세이건 공녀의 실종사건이 아니라?”
“정말 아들딸 찾는 것만 목적이라면 재판이 아니라 수사를 더 열심히 했겠죠.”
냉정하게 잘라 말한 레아가 설명했다.
“결국 재판까지 벌이는 이유는 그거예요. 우리 피어트 공작가가 왕실파도 귀족파도 아닌 중립이면서 잘나가니까, 끌어내리고 싶어서 하는 일이지요.”
이번 재판에서 남매의 무고함이 밝혀져도, 피어트 공작가는 지금까지처럼 잘나갈 수 없을 것이다.
재판으로 인해 페이런 사람들은 똑똑히 알게 될 테니까.
피어트 공작가가 아무리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여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칼로시 대공과 그를 따르는 귀족세력들이 마음만 먹으면 또 위협하고 꺾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역시 칼로시 대공 뒤에 있는 오켄 제국 세력을 이길 순 없다고 다들 생각하겠죠.”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침묵하는 가족들을 향해 레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 재판을 승부처로 만들어야 해요.”
그녀의 말에 가족들은 의아해했다.
“승부처라니?”
“재판 준비를 잘하자는 이야기냐.”
“아니. 재판 자체에 집중할 게 아니라, 재판에서 쇼를 해야 한다고요.”
쇼?
가족들은 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레아가 말했다.
“우리 남매의 무고를 주장해서 이겨도 그건 허울뿐인 승리죠. 세력싸움을 가를 진짜 승부는 여론이에요.”
“여론?”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애초에 이 재판이 왜 열리나요? 우리 남매가 괴소문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렇지.”
“그 괴소문은 왜 생겨났을까요?”
“트로우 백작 그놈이 분명 일을 꾸민 거야.”
“아냐, 작은오빠.”
레아가 루얀을 쳐다보며 말했다.
“트로우 백작이 괴소문을 만든 건 맞겠지. 하지만 괴소문을 믿고 퍼트린 건 사교계 사람들이야.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사교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달라지는 게 없어.”
전생의 기억이 있는 데다, 페이릴리로 시달려 온 레아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건 결백만 호소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여론의 흐름을 바꿔야 해요. 우리가 무고하다 정도가 아니라, ‘피어트는 무고하고 건재하며 덤비는 놈들을 언제나 거꾸러트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확실하게 보여 줘야 한다고요.”
훨씬 복잡하고 치밀하면서 대담하게 상대해야 했다. 마치 억울한 루머에 휘말린 연예인과 기획사와 법무법인처럼!
“최소한 세 팀으로 움직여야 해요.”
1팀. 누명을 쓴 본인이 결백을 호소한다.
동시에, 여론몰이 2팀에서 더 흥미로운 패를 들고 와서 판을 뒤집는다.
마지막으로 칼자루를 쥔 3팀이 정보와 힘을 과시하며 상대를 탈탈 털 것!
‘자본주의의 여론전 맛 좀 봐라, 이놈들아!’
속으로 이를 간 레아가 루얀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1팀인 작은오빠는 일단 수면마법 해제부터 얼른 하고, 억울한 표정연기 좀 연습해.”
“억울한 표정이라니.”
루얀은 그런 건 어떻게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생전 억울할 일이 없으니 억울한 표정도 지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내 억울함을 만방에 알리겠다 하는 각오로 해.”
“꼭 그런 방법을 써야 되냐? 기사가 칼로 말하면 되지, 연기까지 할 필요가…….”
“이 오라버니가 아직 위기의식이 없고만.”
그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오빠. 이 재판에 우리 피어트가의 명예와 앞으로 오십 년이 달렸어. 어디 가서 ‘피어트 공작가 거기, 돈 좀 만지고 남매 얼굴 반반한 거 말고 뭐 볼 거 있나? 칼로시 대공이 헛기침 한번 하면 꼼짝도 못 하는데’라는 말이나 듣고 다니고 싶어?”
“미쳤냐? 죽인다!”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해. 억울한 표정 연습하라고.”
루얀은 생전 처음으로 여동생에게 기가 눌렸다.
“……하, 하겠습니다.”
그가 충격에 휘청거리며 레아의 말을 곱씹는 동안, 그녀는 리케일과 공작 부부 쪽으로 몸을 돌렸다.
“3팀을 맡아서 트로우 백작가의 약점은 뭐든 쓸어 와 주세요. 제가 2팀 여론몰이 작전을 준비할게요. 헬릭스가 아는 암흑길드 사람이 있으니 함께 의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마.”
딸의 낯선 모습에 당황했던 공작과 공작부인은 곧 레아의 어릴 때를 떠올렸다.
‘엄마, 아빠. 역시 저는 이렇게 죽을 수 없어요.’
‘돈과 노오력이면! 건강은 못 사도 목숨은 살 수 있지 않겠어요?’
부부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파도 밝고 씩씩한 모습에 잊고 있었네. 우리 딸 어릴 때에도 남다른 데가 있는 애였지.’
현실적응을 끝낸 공작 부부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트로우 백작가의 약점이라면 이미 쌓인 자료가 꽤 된단다.”
“잘됐네요. 뭐든 이용해야 돼요. 필요하다면 제가 마법사인 것도 공표하고…….”
“그건 안 된다.”
조용히 듣고 있던 헬릭스가 말을 잘랐다.
“레아 너는 아직 드래곤의 마나 주인에게서 자유롭지 않다. 네가 마법사인 걸 공표했다가 아르카이크 황자가 너를 조종하기라도 하면, 더 큰 오해를 사게 될 것이다.”
“……그건 확실히 그렇네.”
레아는 두려움에 약간 풀이 죽었다. 헬릭스가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 툭 말했다.
“이용할 게 필요하다면 패트릭 왕자에게 협조를 구하는 게 어떤가?”
공작가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왕자님한테?”
헬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모르지만 패트릭 왕자는 루얀에게 약해 보였다.”
“그거야 내가 왕국제일검에다 피어트가 차남이라서 그런 거지.”
루얀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헬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것과는 달랐다. 마치 마음의 빚이 있는 사람처럼…….”
마음의 빚.
그 말을 듣자 짚이는 게 있었다. 레아가 루얀을 돌아보았다.
“작은오빠, 혹시 토너먼트 때 왕자님도 그 자리에 있었어?”
“어? 어어…… 그랬지!”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레아는 루얀의 어깨를 턱 짚었다.
“작은오빠, 내가 마법사로 지원은 못 해 주지만…….”
파란 눈이 번쩍 빛났다. 루얀은 어쩐지 동생이 좀 무서워졌다.
“……이번에 오빠는 확실하게 밀어줄게! 나만 믿어!”
❀ ❀ ❀
며칠 후. 왕실 소유의 페넬라 홀에서 특별재판이 열렸다.
“그러니까 페이릴리가 부추겨서, 루얀 피어트 경이 페이로즈와 더포드 남작을 죽였단 말이지?”
“이 사람아, 죽인 게 아니라 실종이라니까.”
“에이, 이렇게 재판까지 하는 거 보면 죽인 거 아니겠어?”
왕실 인사의 실종과 그 범인으로 소문난 명문귀족.
게다가 알려진 범행동기는 장미와 백합의 전쟁 때문이라니,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스캔들이었다. 재판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뻔하지. 루얀 피어트가 팔불출인 건 지나가던 고양이도 아는 사실 아닌가. 페이릴리가 페이로즈한테 밀리는 꼴을 못 봐 줬던 게지.”
“그렇다고 왕실 인사를! 무서운 게 없다니까.”
그야말로 수도의 눈과 귀가 모두 이곳으로 몰린 듯했다.
페넬라 홀 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운 좋게 방청권을 얻어 낼 수 있었던 귀족들이, 상기된 얼굴을 부채와 수염으로 감추고 속닥였다.
“루얀 피어트는 아직도 도착 안 했대요?”
“아까 공작가의 마차가 왔는데, 페이릴리만 내리더군요.”
“세상에. 피어트 소공작도 안 오고 페이릴리만요?”
귀족들이 서로 눈짓했다.
“사안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겠지요.”
“정말 오만하네요.”
그들은 피고석으로 걸어오는 레아를 쳐다봤다.
쏟아지는 눈길 속에서 피고 측에 앉은 그녀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옆에는 은발의 냉미남이 함께였다.
“어머, 예전에 소문났던 그 미남자 아니에요?”
“제 잘못을 가리는 신성한 재판장에 애인을 데리고 오다니……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너무 천지 분간을 못 하는 거 아닙니까?”
귀족들의 시선이 비교하듯 양측을 오갔다.
그에 반해 더포드 남작 쪽에서는 칼로시 대공이 직접 나섰다.
짙은 회색 옷을 입고 침통한 표정을 지은 채 원고석에 앉아 있는 칼로시 대공. 그의 얼굴에서는 귀족파의 거두다운 위엄과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이 함께 읽혔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동정하는 눈길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자식 농사는 내 맘대로 안 된다더니.’
‘저 부족할 것 없는 분이 못난 자식 때문에 이 무슨 고생이람.’
‘더포드 남작이 좀 못나기는 했어도 죽을 잘못까진 안 했는데.’
웅성웅성하는 중에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세이건 공작님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