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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62)화 (62/120)

62화

그녀는 머리 아프도록 고민했다. 그렇지만 어슴푸레한 밑그림만 그려지고 확실한 작전이 나오질 않았다.

“후우…….”

저녁까지 끙끙거리던 레아는 결국 잠을 설치다가 한밤중에 깨었다. 그녀는 두꺼운 숄을 걸치고 발코니로 나갔다.

‘어차피 자기는 그른 거 같으니까 바람이나 쐬어야겠다.’

밤바람은 선뜻하고 시원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나저나 재판에서 변론은 누가 하지? 아빠가 할 만한 사안은 아니고…… 큰오빠가 하나?’

소공작 리케일 피어트는 냉철한 판단과 넓은 정보망, 그를 바탕으로 한 빠른 행동력으로 인정받는 인재였다. 사업에 재능도 있어서 피어트 상단을 크게 키우기도 했다.

다만 루얀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평가였다.

‘큰오빠가 다 좋은데 여론전엔 좀 약한데.’

소공작이지, 머리 좋지. 키 크고 빼어나게 잘생긴 데다 일도 잘했다.

게다가 공작가 후계자에 걸맞은 귀족적인 분위기에 의외로 자상한 면까지 있어, 몇 년째 페이런 사교계 부동의 신랑감 1위였다.

다 가진 리케일 피어트에게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면 존재감.

타고난 에너지를 뿜어 대는 루얀의 형으로 살다 보니,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희미해 보이는 것이었다.

‘정보전만이라면 큰오빠한테 맡기겠지만, 여론전은 아니야.’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번 재판에선 여론전이 무척 중요했다.

“끙.”

레아가 신음하며 발코니의 차가운 대리석 난간에 팔을 얹었다.

‘트로우 백작가 놈들이 재수 없어도 그쪽 머리는 좋은데…… 어떻게 우리한테 유리하게 돌려놓지?’

답답한 마음에 그녀가 난간 위로 엎드릴 때였다.

“으으.”

밤바람이 누군가의 신음 소리를 실어 왔다.

“으으.”

잠꼬대에 가까운 신음이었다.

‘헬릭스?’

귀에 익은 음성에 레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지켜야 한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잠꼬대 같긴 한데 목소리가 무척 괴롭게 들렸다.

‘깨워야 하나? 여기서 부르면 들릴까?’

갈팡질팡하는데 소리가 뚝 끊겼다.

‘다시 제대로 잠들었나 보다.’

안심한 찰나, 허밍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달래듯 부드럽고 청량하면서도 어딘가 구슬픈 멜로디였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악몽에 시달리다 깬 헬릭스가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시작했을 노래.

그렇지만 듣고 있는 그녀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레아가 대리석 난간에 뺨을 붙인 채 노래가 들리는 쪽을 쳐다봤다.

옆 발코니에 달빛을 받으며 선 헬릭스가 보였다.

“…….”

노래는 밤바람을 타고 흐르고, 달빛은 헬릭스의 은발 위에서 부서졌다.

“……그건 무슨 노래야?”

헬릭스가 놀라지도 않고 대답했다.

“엘프들의 노래다.”

그가 먼 하늘을 쳐다봤다.

“그들이 부르면 더 맑은 바람 소리가 나지.”

“난 지금 들은 게 더 좋아.”

헬릭스가 픽 웃었다.

“엘프가 부르는 걸 들어 보지도 않았잖나.”

“그래도.”

잠시 밤바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헬릭스가 다시 낮게 허밍을 시작했다.

엘프의 노래가 밤하늘에 흩어졌다. 그 노래를 들으며 레아는 사람보다는 엘프왕 같은 헬릭스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

처음 봤을 때 레어 중앙에 얼어붙어 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전설 속에나 나온다던 드래곤, 엘프, 그런 존재들을 익숙하게 불렀고.

세상이 어떻게 변한 거냐며 간혹 곤혹스러워했으며, 수호자라는 들어 보지 못한 직함이 자기 정체성이라고 했다.

‘헬릭스는 이 시대가 낯설겠지.’

그렇지만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시간과 공간.

어느 쪽이 비틀려 있건 간에, 원래 여기 속하지 않은 티가 나고야 만다.

‘그래서 내가 헬릭스가 친근했나 보다.’

십 년이 넘게 레아 피어트로 살았는데도, 이제는 엄마 아빠 오빠들이 다 제 가족이고 너무도 소중한데도.

가끔. 아주 가끔.

여기가 어딘가 싶으면서 낯설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이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처럼 막막하고 외로웠다.

“헬릭스.”

노래가 끝나자 그녀가 그를 불렀다.

“손잡아 줘.”

“……위험하다.”

“마나 안 건네줘도 되는데. 이 정도 거리는 뛰어넘을 수 있잖아.”

헬릭스가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과년한 아가씨가 밤중에 남자한테 방으로 오라고 하면 안 된다.”

“우와.”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릭스 방금 조상님 같았어.”

“……조상님?”

“응, 있어. 유교맨이라고.”

“그건 또 뭔가.”

작게 웃은 레아가 말했다.

“헬릭스, 내일 우리 단 거 먹자. 엄청 맛있는 걸로.”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헬릭스가 제 발코니 난간에 올라서더니 휙 뛰었다. 그리고 놀랄 사이도 없이 레아 앞에 섰다.

“……밤중에 방에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생각해 보니 여긴 방이 아니라 발코니잖나.”

“그게 뭐야.”

헬릭스는 푸스스 웃는 레아를 내려다보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아 넌 위기상황에서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우와, 오랜만에 성의 있는 칭찬.”

“그렇게 머리를 쓰고 나면 꼭 단 걸 먹고 싶어 하고.”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알았어?”

❀ ❀ ❀

헬릭스가 옅게 웃었다.

“계속 옆에서 보고 있는데 어떻게 모르겠나.”

평범한 말인데 이상하게 가슴께가 몽글몽글하고 든든했다.

빤히 헬릭스를 쳐다보니 그가 레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움직여 어깨를 가볍게 만졌다. 단단한 손 밑에서 굳어 있던 어깨가 자연스레 풀어졌다.

‘나 긴장하고 있었구나.’

자신도 눈치 못 챈 상태를 알아채 주다니. 레아는 헬릭스를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누구 계약자가 이렇게 세심하지?”

그가 움찔하더니 어깨에서 슬그머니 손을 떼었다.

“……너무 긴장 마라. 늘 잘해 왔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헬릭스의 손끝이야말로 긴장으로 멈칫거렸다. 그녀가 살짝 투정했다.

“왜 손 떼시죠? 더 해 줘도 되는데?”

“레아 넌 진짜 경계심이 너무 없다.”

“제가 여기서 경계할 사람이 누가 있나요?”

레아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손을 꼽았다.

“내가 좋아하는 헬릭스? 내 편인 헬릭스? 내 하나뿐인 계약자 헬릭스?”

“…….”

그녀가 사르르 웃었다.

“어머나, 하나도 없네?”

헬릭스는 그런 레아를 내려다보며 이를 꽉 물었다. 눈앞의 귀여운 계약자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달밤에 무슨 미친 생각인가.’

그는 일부러 더 딱딱하고 엄격하게 말했다.

“너는 마법사고 나는 수호자니 경계해야 마땅하다. 내가 마나를 빼앗았던 마법사만 해도…….”

쓸데없는 말을 했군. 헬릭스는 후회하며 입을 다물었다. 레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것 때문에 그래? 마나 주는 것 때문에?”

“…….”

“그래서 저번에 비밀클럽에서도 나한테 그랬어? 나 망칠까 봐 무섭다고?”

헬릭스가 번개같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그건……!”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마스터가 드래곤의 성녀 이야기를 가끔 꺼낸다고. 레아 네가 드래곤의 성녀가 아니냐고 말한다고.

아닐 거라고 믿지만 때때로 미친 듯이 두려웠다.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애써 다른 말을 꺼냈다.

“……트라우마 때문이다.”

“트라우마?”

“……오래전 아즈라의 레어에 봉인되었을 때에도, 나는 계획을 하나 망친 셈이었다.”

헬릭스는 짧게 이야기했다.

오래전 멸망의 별이 떨어졌다는 것(아마도 운석 충돌 같았다). 그것을 막기 위해 드래곤, 마법사, 수호자가 모여 마법 방어막을 치기로 했다는 것.

결전의 날. 마탑주와 마법사들은 헬릭스와 함께 기다렸지만 드래곤들은 오지 않았다. 헬릭스가 설득하기 위해 드래곤로드 아즈라를 찾아갔을 때,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마법 방어막이 불완전하니 드래곤들은 계획에서 빠지겠다고 하더군. 드래곤들은 따로 움직이겠다고, 멸망의 별과 함께 자폭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드래곤 알들에게 100%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더군.”

“…….”

“그들은 이미 결계도 준비해 둔 상태였어. 어마무시할 폭발의 충격에서 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결계였다. 그리고 날…… 결계를 유지할 마나를 공급하기 위해 거기 봉인시켰지.”

드래곤들이 그 정도로 깊게 뒤통수쳤을 줄은 몰랐다. 충격에 떨던 레아가 겨우 말했다.

“드래곤들…… 진짜…… 나쁜 놈들이었구나? 자기들 알들밖에 생각 안 하잖아?”

“태생이 자기중심적인 생물이다. 워낙 강하니 일어나는 일이지.”

헬릭스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어두워졌다.

“그때의 멸망의 별 폭발로 헬 산맥 북쪽은 초토화되었을 거다. 그곳이 오염의 땅으로 불리게 된 것도, 몬스터가 들끓는 땅이 된 것도, 그 일 때문이다. 원래는 대륙의 다른 곳들처럼 평화로운 곳이었는데…….”

원폭 피해지 같은 곳이 되어 버렸구나. 레아는 안쓰러운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헬릭스가 무겁게 말했다.

“내가 중심을 잘 잡고 양측을 제대로 설득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거다.”

뭐시라.

안쓰럽고 짠하던 기분이 단번에 날아갔다. 그녀가 도끼눈을 뜨며 그의 가슴을 꾹 눌렀다.

“누가 또 내 앞에서 자책하래? 잘못한 건 드래곤들이지 헬릭스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어허! 헬릭스, 잘 들어 봐. 내가 지금 네 앞에서 ‘흑흑, 내가 처신을 잘했으면 그런 소문이 나지도, 재판이 열리지도 않았을 텐데, 다 내 탓인가 봐’ 이러면 넌 뭐라고 할 거야?”

“그게 왜 레아 네 탓인가!”

헬릭스가 화를 냈다.

“비열한 소문을 꾸며 낸 트로우 백작가 놈들 잘못이 아닌가!”

“그것 보라니까.”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똑같거든? 우리 잘생기고, 약자는 보호하고 악당에겐 자비 없는 멋진 헬릭스 잘못은 하나도 없거든? 다 드래곤 잘못이거든?”

세상 진리를 말하는 듯 당당한 어조였다. 파란 눈이 믿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며 반짝였다.

“우리 헬릭스, 고생 엄청 많이 했는데 왜 나랑 있을 때까지 맘고생 하고 그래. 자, 예쁜 나를 봐.”

레아는 안 하던 꽃받침을 하고 헬릭스를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예쁘지? 보기만 해도 기분이 풀리지? 내가 막 그 정도로 좋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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