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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61)화 (61/120)

61화

“나도 걱정할 줄 안다고!”

레아가 소리쳤다.

“나도 이런 거 모르는 체하기 싫고, 힘없는 사람들 비명 듣고 싶지 않고!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거, 그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거, 다 속 뒤집힌다고!”

헬릭스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데 넌 목숨 걸 거잖아!”

소리치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연기를 마신 목이 따끔거렸다. 그렇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넌 수호자 의무라면서 네 안전 안 돌보고 막 뛰어들 거잖아!”

레아가 그의 가슴을 팍 쳤다.

“나도 걱정한다고! 너만 아니라, 나도 너 걱정한다고!”

후드 아래로 가발의 붉은 머리카락이 불길처럼 너울거렸다.

휘오오오오!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회오리처럼 솟아올랐다. 레아의 푸른 눈이, 빨갛게 칠한 입술이, 가면으로 가려진 하얀 얼굴이 화마에 붉게 물들었다.

헬릭스가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목숨 안 걸겠다.”

수호자로서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이었다.

“레아 네가, 걱정하고…….”

그가 레아의 가면 위로 쓰다듬듯 손을 얹었다.

“울지 않게 하겠다.”

“안 울었거든!”

바락 악을 쓰는 그 눈꼬리에 맺힌 건 눈물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녀와 있으면 늘 이랬다. 늘 위험했다. 언제나 생각지 못하게 그의 심장을 두들기고, 그가 당연하다 여기던 것을 부쉈다.

아플 정도로 뛰는 심장 때문에 헬릭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폭주하는 것처럼 뛰는 제 심장보다도 눈앞의 레아가 더 쓰렸다.

‘왜 네가 나 때문에 우는 건가.’

헬릭스는 충동에 휩싸여 레아의 눈물을 입술로 훔쳤다. 독약 같았다. 눈물에 닿은 입술이 마비된 듯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그가 겨우 입을 떼었다.

“네 옆에서 죽지 않겠다.”

“…….”

“떨어지지도 않겠다. 그러니 함께…….”

헬릭스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함께 구하게 해 다오.”

레아가 허락하듯 그의 손을 살짝 잡고는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약속한 거야.”

“약속하마.”

수호자의 손이 제 계약자의 손을 꽉 붙들었다. 헬릭스는 왜인지 간절한 기분이었다. 깊이 모를 동굴에 내려온 동아줄을 잡은 것처럼, 이 손과 온기가 절실했다.

퐁.

마나가 그 마음을 담아 레아의 몸에 흘러드는 동안, 그녀가 불러낸 바람은 불을 이끌고 클럽 본체를 덮쳤다.

“으아악! 사람 살려!”

“불이야!”

비밀클럽이 아수라장이 된 사이, 숨어 있던 기사들이 움직였다.

“창고에 사람이 묶여 있습니다!”

“뭐?”

긴박한 보고에 루얀이 확인하러 나섰다. 레아도 헬릭스와 함께 창고로 따라 달려갔다. 묶여 있던 사람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 ❀ ❀

수도의 모처에서 큰불이 날 뻔하고 며칠 뒤.

“재판이 열린대요!”

더포드 남작의 실종 건으로 특별재판이 열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남작의 부친, 칼로시 대공 쪽에서 아들의 실종 범인으로 루얀을 지목한 것이었다.

“루얀 피어트가 내 아들을 해친 게 분명하오!”

대공은 주장했다. 루얀이 유력한 범인이니, 피어트 공작가가 국외로 빼돌리기 전에 가둬야 한다고.

“더포드 남작도 엄연한 왕실의 일원! 대귀족의 자제가 왕실의 핏줄을 해치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이 기회에 기강을 바로 세우셔야 합니다!”

“하루빨리 재판을 열어야 합니다!”

칼로시 대공을 따르는 친제국파 귀족들이 입을 모아 주장했다.

“충분한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더포드 남작이 실종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나, 그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꼭 루얀 피어트가 범인이라 확신할 순 없지요.”

“맞습니다. 혹시 사채업자가 관련된 일일 수도…… 크흠, 실언했습니다.”

중립파 귀족들은 소극적으로 루얀 피어트를 변호했다. 친제국파 귀족들이 쏘아붙였다.

“세이건 공녀까지 실종된 이 마당에 그런 태평한 말들이 나오십니까?”

“사소한 시비와 질투로 왕실 인사와 공작의 딸을 해치다니, 피어트 공작가의 만행이 도를 넘었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죄를 물어야 합니다!”

결국 얼마 후 재판이 결정되었다.

더포드 남작과 세이건 공녀의 실종 및 살해 의혹. 그에 대해 레아와 루얀 남매를 소환하는 재판이었다. 칼로시 대공의 끈질긴 요청을 국왕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나마 피어트 공작가의 눈치를 보느라, 루얀을 구금하란 요청까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진행한다고 했다.

자연히 레아를 비롯한 피어트 공작가 사람들은 날카로워졌다. 공작이 중얼거렸다.

“이런 일로 재판까지 갈 줄이야.”

공작부인이 말했다.

“왕이 은근히 칼로시 대공 등쌀을 못 이긴다니까요.”

리케일이 덧붙였다.

“친제국 귀족들이 다 칼로시 대공 쪽에 몰려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트로우 백작가는 사업의 경쟁자인 피어트 공작가를 흠집 내고 물어뜯으려는 것이고. 칼로시 대공은 트로우 백작가가 깐 판을 이용해, 중립파인 피어트 공작가를 찍어 낼 꿍꿍이일 터였다.

왕실은 중립파인 피어트 공작가를 봐주고 싶겠지만 명분이 없었다.

‘사면초가네. 우리가 그렇다고 왕실파는 아니니 적극적으로 비호할 정도는 아닐 테고.’

즉, 이 더러운 함정은 피어트 공작가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궁리하던 레아의 눈이 피어트 공작과 마주쳤다. 복잡한 표정이던 공작이 딸의 얼굴을 보더니 웃어 보였다. 힘없는 미소였다.

“이 아비가 면목이 없구나.”

“여보,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왜.”

“아니오. 우리가 우리 애들 듬직하고 잘난 것만 믿고 너무 안일했소.”

그의 눈이 세 남매를 차례로 스쳤다.

“아직은 우리 보호가 필요한 애들인데, 처음 소문이 돌 때 적극적으로 대처할 걸 그랬어.”

남매는 뭔가 울컥했다.

한 적도 없는 일로 벌어진 사달이 억울하긴 했다. 그래도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공작이 가문에 피해를 줬다고 꾸짖을 줄 알았다. 피어트 공작가는 그 정도는 할 만한 가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대단한 가문의 수장은 이 와중에도 자식들을 믿고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아빠.”

레아는 눈물이 나기 전에 얼른 공작을 불렀다.

“아빠 탓은 하나도 없어요. 아, 하나 있다.”

그녀가 피어트 공작을 향해 밝게 미소 지었다.

“아빠가 이렇게 멋진 분이셔서 우리가 너무 잘나게 자라 버린 거. 그래서 트로우 백작가 놈들이 질투하잖아요.”

“레아야…….”

“그러니까 우리가 저런 비열한 수작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봐 주세요.”

말을 마친 레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탁.

어느새 짧은 지팡이를 쥔 그녀가 가족들 앞에서 빙글 몸을 돌렸다. 브리핑을 시작하는 발표자 같은 자세였다.

“자, 주목해 주세요.”

가족들과 헬릭스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멍하니 쳐다보았다. 레아가 지팡이를 붕붕 흔들며 주의를 끌었다.

“어차피 작은오빠와 제가 무고한 건 다들 아실 테니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일단 이 재판에 대응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전에, 가장 신경 써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는데요.”

레아의 날카로운 눈빛이 공작과 리케일에게 꽂혔다.

“아빠. 큰오빠.”

“그, 그래.”

“말……해라.”

당황한 와중에도 둘은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좋아. 일단 들어 보려고는 하고 있어. 반은 성공이야.’

레아가 속으로 생각하며 물었다.

“첫 번째 문제인데요, 수면마법 후유증을 완전히 없앨 때까지 이 재판을 미룰 수 있을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 같은데요.”

둘은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리케일이 물었다.

“최대한 얼마나 잡아야 하지?”

“헬릭스가 최소 이틀, 최대 닷새 정도랬어.”

수염을 만지던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다. 해 보마.”

“예. 그럼 재판 연기는 해결된 걸로 알고 있을게요. 그럼 두 번째 문제.”

레아가 가족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번 재판을 여는 당사자는 칼로시 대공과 세이건 공작이잖아요. 이들도 아르카이크 황자처럼 트로우 백작과 한패일까요?”

헬릭스가 물었다.

“트로우 백작가에서 소문을 퍼트렸지? 아르카이크 황자가 그걸 이용해서 널 납치하려고 했고.”

“그랬지. 썩을 놈들.”

“그럼 레아 네 말은…… 칼로시 대공과 세이건 공작도 트로우와 손잡고 너희 소문을 이용하는 건지, 그게 궁금하다는 것인가?”

“응. 바로 그거야.”

“아니면 좋겠지만…….”

말을 흐리는 리케일을 향해 공작부인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때까지 사교계에 칼로시 대공과 세이건 공작이 자식들한테 냉담하다는 소문은 없었단다. 특히 대공 쪽은 아들들 중에서 더포드 남작을 가장 아낀다고 소문이 자자했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자식 생사가 달린 일이다. 그걸 미리 짜고 하겠니? 그렇진 않을 거다.”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네 엄마 말이 맞지만, 혹시라도 같은 편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세이건 공작은 잘 모르지만 칼로시 대공은 야망이 큰 인물이야. 우리 가문에 흠을 낼 수 있다면 사생아 아들 정도는 내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리케일도 다른 의견을 보탰다.

“이미 죽었을 테니 이참에 이용하려 드는 걸 수도 있어.”

공작 부부와 리케일의 말에 레아는 잠시 고민했다.

“……알겠어요. 그럼 지금까지 나눈 얘기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짜 볼게요.”

“레아 너 괜찮겠느냐? 네가 어떻게…….”

“아빠.”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재판은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어요.”

레아는 웃으며 덧붙였다.

“방법이 문제일 뿐이죠.”

❀ ❀ ❀

레아는 생각했다.

더 크고 확실하게 이기고 싶다고.

‘하려면 제대로 이겨야지. 어떻게 해야 이번 재판에서 얻을 걸 다 얻고 트로우 백작가를 밟아 주지?’

레아는 손가락을 들어 재판에서 할 것을 꼽아 보았다.

남매의 결백 증명, 소문 퇴치, 여론 우리 편으로 되돌리기, 트로우 백작가 조지기.

‘될 것 같은데, 진짜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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