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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60)화 (60/120)

60화

얀 트로우 경이었다. 바짝 굳은 레아가 흐트러져 있던 옷섶을 여몄다.

‘이 꼴로 내 정체를 들키면 사교계가 초토화될 거야.’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철수하는 게 좋을 듯했다. 레아가 빨리 가자는 듯이 헬릭스를 탁탁 쳤다. 막 침대에서 일어나는 둘을 본 트로우 경이 음흉하게 웃었다.

“분위기 뜨거울 때 방해해서 실례긴 한데…….”

달칵.

‘응?’

트로우 경이 방문을 잠갔다.

‘뭐야? 방문을 왜 잠가?’

예상 밖의 상황에 레아가 주춤했다.

둘을 아래위로 훑으며 끈적한 시선을 보내던 트로우 경이 침대를 향해 다가왔다.

“보아하니 어디 높은 분이 기르는 귀염둥이 같은데.”

레아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걸친 게 제법 고급인 걸 보니 네 주인이 꽤나 아끼나 보군.”

아무래도 놈은 레아를 귀족의 정부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트로우 경이 약점을 잡은 악당 같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주인 품에서는 아양을 떨다가, 클럽에서 미남 정부를 만나는 건가.”

네?

순간 레아의 넋이 가출했다.

졸지에 ‘고위 귀족의 예쁨받는 정부인데 가면 쓰고 비밀클럽에서 미남 정부와 밀회를 즐기는’ 복잡한 설정의 캐릭터가 되었다.

역시 트로우 백작가의 막장 여론전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트로우 경이 변태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속삭였다.

“끼워 주면 네 주인에게 이르지 않을 수도 있는데.”

넋이 나간 레아를 향해 트로우 경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셋이서 즐기자고.”

“…….”

인성쓰레기인 줄만 알았더니 변태까지 첨가된 놈이었구나.

레아의 짜게 식은 눈빛을 ‘싫지만 어쩔 수 없지’의 승낙으로 착각한 트로우 경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흐. 이것 봐라. 가슴에 뭘 넣은 게냐?”

레아가 반사적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트로우 경이 히죽 웃었다.

“아니라고? 진짜 네 가슴이라고?”

그가 훅 다가오며 레아에게 손을 뻗었다.

“만져 봐야 알겠구나!”

❀ ❀ ❀

레아가 당황해서 몸을 굳히는 것과 동시에 헬릭스의 주먹이 나갔다.

“컥!”

트로우 경의 코가 짓뭉개지며 이가 두어 개 날아갔다. 레아는 그 광경을 아연하게 바라봤다.

“어, 어어?”

후두둑 코피를 쏟으며 트로우 경이 바닥에 쓰러졌다.

“꺼흑.”

트림 같은 괴상한 신음을 뱉은 그가 제 코를 만져 보더니 바닥의 핏자국을 보았다.

“이, 이 천한 연놈들이! 감히!”

그가 눈을 뒤집으며 일어나 앉았다.

“오늘 여기서 멀쩡하게 못 나갈 줄 알아라! 여기 누구……!”

퍼억!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트로우 경이 바닥에 길게 누웠다.

레아가 헥헥대며 의자를 내려놓았다.

“사람 부르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헬릭스가 다가와 놈을 살폈다.

“죽지는 않은 거 같다.”

생애 첫 체어샷으로 변태를 기절시켰다. 흡족해진 그녀가 탁탁 손을 털며 헬릭스를 흘겨봤다.

“그래도 그렇게 주먹질부터 먼저 하면 어떡해?”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죽일 듯이 트로우 경을 노려봤다.

“레아 너를 함부로 만지려고 했잖은가.”

“아니 그야, 이놈이 맞아도 싼 짓을 하긴 했는데.”

한마디 더 하려고 했던 레아가 헬릭스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진 걸 보고 입을 닫았다. 헬릭스는 술이 확 깬 듯 흉흉한 표정이었다.

‘왜 이러고 있어도 잘생겼지?’

평소엔 이런 얼굴을 하면 얼음칼로 심장을 도려낼 것처럼 보였다.

엄청 멋있었지만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거리감이 들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변장 때문인지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어도 듬직하기만 했다.

‘아닌가? 술 취한 모습을 봐서 더 친근하게 느껴지나?’

헬릭스의 술주정을 기억해 낸 레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큼큼.

괜히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한 그녀가 뻗은 트로우 경을 다시 내려다봤다.

“아무튼 이렇게 기절시켰으니 어쩔…… 어? 잠깐.”

레아는 깨달았다.

‘이거 꿀인데?’

어차피 트로우 경이 가지고 다닌다는 비약을 훔치러 온 거였다. 그녀는 바로 트로우 경 앞에 주저앉아 앞섶을 뒤지기 시작했다.

“킁?”

가까이 몸을 붙이니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탄 냄샌가? 기름 냄새 같기도 하고?”

레아가 중얼대며 냄새를 맡았다.

“약하게 나긴 하는데. 헬릭스, 너도 한번 맡아 봐.”

보고 있던 헬릭스는 맥이 빠졌다. 어쩐지 혼자 열 낸 듯한 느낌에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레아 너는 진짜…….”

“아니, 이 인간이 비약 가지고 있다니까?”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

헬릭스가 허겁지겁 합류했다.

“옷! 옷 좀 제대로 입고!”

“아, 알았다!”

열심히 뒤진 둘은 부츠에 숨겨져 있던 투명한 병을 발견했다.

“이건가.”

크리스탈 병 안에서 새빨간 액체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요요한 빛.

하지만 그 가냘프고 아름다운 표면 아래, 무시무시한 힘이 파도치고 있었다. 목이 꽉 졸린 느낌을 받으며 레아가 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드래곤의 마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방 안이 확 밝아졌다.

“뭐야?!”

레아가 비약 병을 꼭 쥐고 튕기듯 일어섰다.

“여기가 아니라 밖인 것 같다.”

헬릭스가 말하며 슬쩍 커튼을 걷자 레아도 쏙 끼어들어 밖을 살폈다.

불길이 일고 있었다.

❀ ❀ ❀

“살려 주세요!”

여자의 째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비밀클럽 본채가 아니라 좀 떨어진 뒤채에서였다. 번듯한 본채와 달리 뒤채는 허름했고, 낡은 나무 벽재를 타고 불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불이야!”

“사람 살려!”

잇달아 여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헬릭스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안에 사람이 있다.”

레아의 얼굴에도 갈등이 어렸다.

지금 그들도 변장하고 비밀리에 일을 벌이는 상황. 저기까지 관여하기엔 위험했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사람이 살려 달라는데 가만있을 수도 없었다.

“나가서, 레아 너부터 데리고 나간 뒤에.”

헬릭스가 말했다.

“저들을 구하러 가겠다.”

“……알았어.”

레아가 어쩐지 가라앉는 기분으로 동의했다.

“내려가면서 여기 사람들한테 불이 났다고 알리자.”

헬릭스가 바닥에 널브러진 트로우 경을 흘깃 보았다.

“이자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여기 단골이랬어. 문만 조금 열어 놓고 나가자.”

생각 같아선 이 기회에 한 대 더 때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중에 싹 묶어서 보복해 줄 거야.”

레아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헬릭스가 긴 다리를 뻗었다.

퍼억!

그녀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헬릭스가 정신 잃은 상대를 차다니?’

그가 레아의 시선을 피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실수다.”

“……실수라기엔 정확히 얼굴을 차셨는데요?”

“수호자는 악당을 보면 손발이 제멋대로 나가는 실수를 한다.”

“…….”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레아가 방 밖으로 나가며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수호자 좀 멋진 것 같아.”

“이제 알았나.”

❀ ❀ ❀

그들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다 종업원과 마주쳤다.

“잠깐만.”

레아가 클럽 종업원을 잡았다.

“뒤쪽에서 불이 나던데.”

“아, 예.”

어쩐지 알고 있었던 듯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곧 꺼질 겁니다. 손님께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음?’

이상했다.

‘불이 났다는데 왜 이렇게 태연하지?’

레아는 혹시 싶어서 한 번 더 말해 보았다.

“사람 비명 소리가 들리던데.”

“겁먹어서 지레 지르는 소립니다. 염려 마십시오.”

덤덤하게 대답한 종업원이 그들을 지나쳐 테이블에 새 술을 세팅했다.

‘그러고 보니…… 왜 이렇게 아까랑 똑같아?’

비밀클럽 일층은 여전히 하하호호, 부비적 분위기였다. 바로 뒷건물에서 불이 났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평온함.

헬릭스도 이상하다고 느끼는 눈치였다. 그녀가 속삭였다.

“손님들은 그렇다 치고, 여기 종업원들은 왜 아무도 안 가 보지?”

“일단 밖으로 나가서 상황을 확인해 보자. 다른 종업원들이 더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막 입구에서 빠져나왔을 때였다.

“어? 나왔냐?”

모자에 망토까지 푹 눌러쓰고 서 있던 남자가 아는 체를 했다.

“오빠?”

루얀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불이 나도 너희가 안 나와서.”

불 얘기에 레아가 반응했다.

“그 불 어떻게 됐어? 사람들이 끄고 있어?”

“끄겠냐?”

루얀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 매춘부들 숙소야.”

❀ ❀ ❀

루얀이 설명했다.

비밀클럽에서 일하는, 갈 데 없는 여자들. 어리거나, 나이 들었거나, 지명도가 낮은 매춘부들. 그런 이들이 묵고 손님도 받는 곳이라고.

‘그래서 저렇게 아무도 반응 안 하는 거였어.’

자기 일이 아닌 듯 놀고 있는 손님들과, 숙소 쪽으로 불을 끄러 가기는커녕 고개도 안 돌리는 종업원들.

레아가 주먹을 쥐었다. 뭔가 속이 끓었다.

“오빠 혼자 왔어?”

레아가 잠긴 목소리로 빠르게 물었다.

동생의 목소리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루얀도 재빨리 대꾸했다.

“애들 데리고 왔다.”

기사들과 함께 왔다는 뜻일 터.

“잘했어.”

그녀가 끄덕이고는 나가자는 듯 고갯짓했다.

셋은 서둘러 비밀클럽 밖으로 나왔다. 레아가 루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 나 망토 좀.”

그러잖아도 동생이 노출 많은 옷차림인 게 싫었던 루얀이 냉큼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건넸다. 그녀는 얼른 망토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뒤채 쪽으로 뛰었다.

헬릭스와 루얀이 급히 레아를 쫓았다. 그렇지만 레아의 손끝에선 이미 바람이 일기 시작한 뒤였다.

“……야!”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한 루얀이 속 끓는 으르렁 소리를 내며 외쳤다. 레아가 그를 외면하며 손에서 바람을 더 불러일으켰다.

루얀은 그녀가 왜 이렇게 구는지 모를 것이다. 레아 본인도 잘 몰랐다.

생면부지의 남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데 아무도 안 도와준다고,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것일까.

‘……화가 나는 걸 어떡하라고.’

그녀의 몸에서 마나가 휘돌아 쳤다.

“내가!”

뒤따라온 헬릭스가 말했다.

“내가 하겠다. 물러나라!”

“싫어!”

“넌 들키면 위험하지 않나!”

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가면과 가발을 쓴 헬릭스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걱정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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