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59)화 (59/120)

59화

얀 트로우가 최근 열 올리는 매춘부는 금발이 아름다운 햇병아리 여배우라고 했다.

페이런 왕국은 견고한 신분제 사회라, 남녀를 불문하고 신참 배우가 매춘을 하는 일은 흔했다.

좀 더 인기가 있어지면 정해진 후원자를 두게 되고, 잘나가게 되면 귀족의 정부가 되는 게 정해진 출세코스였다.

덕분에 레아는 찾아야 할 금발미인의 얼굴을 외우고 있었다.

리케일이 구해 온 극장 포스터 구석에 나와 있었으니까.

‘근데 아무리 둘러봐도 없어. 어쩌지.’

트로우 경을 찾아서 비약을 훔쳐 내야 하는데, 온다던 놈도 만난다는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돈을 뿌려서 귀족 특실로 쳐들어가야 하나.’

그녀가 끙끙대며 고민할 때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혼자라니.”

느끼한 대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레아는 설마 하며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상의 단추를 몇 개 푼 남자가 게슴츠레한 눈길을 보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느, 느글거려.’

풀어 헤친 윗옷 안쪽으로 가슴털이 숭숭했다.

‘내 눈! 마이 아이즈!’

요즘 좋은 걸 많이 봤더니 흉한 것에 더 면역이 없었다. 가슴털남이 껄떡댔다.

“밤이슬에 젖은 꽃을 내가 꺾고 싶군.”

그가 윗옷 단추 어딘가에 꽂혀 있던 시들시들한 장미를 뽑아 내밀었다. 레아가 속으로 질색했다.

‘됐으니까 단추 좀 잠가 주세요. 그리고 그 장미는 뭔데. 됐으니까 저리 치우…… 어?’

레아는 상황을 깨달았다.

‘이거 그거 아냐?’

더포드 남작이 페이로즈를 위해 대광장에 장미를 깐 사건 이후, 젊은 남자와 한량들 사이에서는 가슴에 장미를 꽂고 다니는 유행이 번졌다.

그 때문에 밤의 사교계에선 새로운 유행이 나타났다는 얘기도 들었다.

고급 창부들에게 작업을 걸 때 가슴에 꽂은 꽃을 내미는 게 세련된 방식이라나.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내가 고급 창부인 줄 알고 사려는 거구나!’

레아는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창부가 꽃을 받아서 가슴에 꽂으면, 당신에게 오늘 밤을 팔겠다고 대답하는 거라고 들었어. 그런데 거절은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최대한 소란 피우지 말고 거절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멍했다.

그녀가 어째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가슴털남은 장미를 손에 쥐여 주며 손목을 더듬었다.

“너무 빼지 말고, 응?”

장미를 쥔 레아의 손에 힘이 들어갈 때였다.

“놔라!”

위층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헬릭스의 목소리였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헬릭스!’

레아는 그를 찾자마자 기함했다. 벽에 기대어 널브러져 있는 헬릭스를 여럿이 둘러싸고 있었다.

“자기야,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여자 하나가 과감하게 손을 뻗어 지분거리며 속살댔고.

“나 이렇게 잘생긴 남자 처음 봐.”

다른 여자는 헬릭스의 가면을 벗기려 들었고.

“사람 더 불러올까? 이 정도 상급이면 다들 줄을 설걸.”

“멍청한 놈아, 우리부터 즐기고 불러야지.”

남자들도 달라붙어 있었다.

레아의 머릿속은 혼란의 도가니탕이 되었다.

‘누가 네 자기냐? 니가 뭔데 우리 헬릭스 얼굴을 까려고 그러냐? 왜 남자도 달라붙어 있냐? 몰라, 됐고. 모르겠고!’

순식간에 결론에 도달한 레아가 성큼성큼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다 비켜!”

저도 모르게 앙칼진 목소리가 나왔다.

레아가 손에 쥔 장미를 헬릭스 가슴팍에 팍 꽂았다.

“얜 내 거야!”

노리던 이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에게 처음 장미를 건넸던 가슴털남도 쫓아왔다가 입을 떡 벌렸다.

더 어이없는 건 그다음이었다.

지금껏 취한 상태에서도 열심히 반항하던 헬릭스가 레아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댔다.

“왜 이제 왔나.”

헬릭스를 둘러쌌던 이들이 입을 떡 벌렸다. 이제껏 여자 손 한번 못 잡아 본 것처럼 굴더니, 사람 가리는 거였냐.

레아도 레아대로 어이가 없었다.

‘뭐지? 이 답지 않은 과감한 스킨십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내려다보자 헬릭스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눈꼬리를 접었다. 그가 웃으면서 레아의 가슴에 볼을 비비자 그 동작을 따라 술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술 때문에 이러고 있었구나!’

레아가 깨닫는 사이, 헬릭스는 얼굴을 비비며 그녀의 허리도 쓰다듬었다.

‘……누구세요? 내가 알던 그 유교맨 헬릭스 어디 가셨죠?’

술을 마시니 그가 늘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통제력이 훌훌 날아간 듯했다.

이 와중에 그가 비비적대는 가슴뽕이 눌리고 있었다.

‘위험하잖아.’

두근대는 가슴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 ❀ ❀

‘오래 끌었다간 들통나겠어.’

그렇게 판단한 그녀가 달라붙은 헬릭스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그 봐. 자기가 너어무 예쁘니까 먼저 오면 위험하다고 했자나.”

해 놓고도 소름 돋는 필사의 연기!

헬릭스는 술김에 비위도 내다 버렸는지 좋다고 웃었다.

“네가 더 예쁘다.”

“아이참.”

닭 쫓던 개가 된 이들이 한 쌍의 바퀴벌레를 보는 썩은 시선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아는 헬릭스와 한 몸이 된 양 꼭 붙어서 가까이 있는 아무 방문이나 열어젖혔다.

콰앙!

면전에서 두 선남선녀가 엉켜 붙어 자신들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헬릭스와 레아를 쫓던 이들은 입을 딱 벌렸다가 다물었다.

“하, 인생…….”

놀러 와서 염장질 거하게 당한 이 느낌은 뭘까. 어쩐지 기분이 더러워진 문 앞의 이들이었다.

“술이나 마셔야지.”

“후. 나도 끼워 줘요.”

❀ ❀ ❀

“헥헥.”

그렇지만 문 안의 상황은 그들 생각과는 좀 달랐다. 문을 닫자마자 레아는 헬릭스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웬 술을 이렇게 마셨어?”

“레아…….”

“그래, 나다. 정신 좀 차려 봐.”

“예쁜 레아…….”

“나 예쁜 건 나도 안다니까? 으아, 무너지지 마! 아 좀, 네 발로 제대로 걸으면 안 돼?”

그녀가 낑낑대며 헬릭스를 끌고 침대로 향했다.

그야말로 취객 부축 모드였다. 헬릭스처럼 큰 남자를 힘도 없는 그녀가 부축하려니 근육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마법으로 근육 키우는 법도 있으면 좋겠다. 파이어볼 서른 번 쏘면 스쿼트 서른 번처럼 기초체력 붙으면 좋을 텐데…….”

레아는 꽁알대며 침대까지 헬릭스를 데리고 갔다.

겨우 눕히려고 몸을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어? 어어?”

풀썩.

헬릭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레아까지 침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녀는 발라당 뒤집힌 거북이처럼 바동댔다.

“으아…….”

치렁치렁한 벨벳 드레스며 머리장식이 무거워서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바동대는 그녀의 허리 밑으로 큰 손이 들어와 스윽 밀었다. 도움을 받은 레아의 몸이 그제야 굴러서 엎드렸다.

헬릭스의 몸 위로.

“엄마야.”

뭐가 이렇게 뜨겁고 딱딱한 건데.

봉인된 음란마귀가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에 그녀의 귀가 빨개졌다. 화다닥 일어나려 했지만 그의 몸을 짚지 않고서는 무게가 안 실려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레아는 어떻게든 헬릭스 몸에 손을 안 대고 일어나 보려고 옴지락거렸다.

“으…….”

그렇지만 그녀를 몸 위에 얹은 헬릭스에겐 꼼지락대는 동작일 뿐이었다. 그가 낮게 신음했다.

“레아…… 좀…….”

본능적으로 위험신호를 감지한 레아가 그의 몸을 짚으며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그대로 뒤로 물러나려는 그녀의 팔을 헬릭스가 낚아채듯 잡았다.

평소보다 더 뜨거운 큰 손.

긴 손가락 하나하나가 달아오른 인두처럼 레아의 팔을 파고들었다.

“레아.”

헬릭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드럽고 나직한, 어딘가 끓는 듯한 목소리.

“가지 마라.”

화염마나는 제 안에 있는데.

헬릭스가 더 뜨겁게 끓어 넘치는 것 같았다.

“…….”

레아는 반쯤 일으키던 몸을 굳힌 채로 그를 내려다봤다.

팔을 잡은 손도, 그녀의 얼굴에서 떼지 못하는 시선도 너무 뜨거웠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헬릭스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보지 마.”

“레아 네가.”

헬릭스가 눈을 가린 손을 떼어 제 가슴에 올렸다.

쿵. 쿵.

“이렇게 예쁜데.”

시린 회색 눈동자가 불을 품은 얼음처럼 일렁였다. 그가 한탄하듯 속삭였다.

“어떻게 눈을 떼나.”

홀린 것 같은 시선이었다.

레아는 그런 헬릭스의 눈을 마주했다.

열기가 전염되는 것처럼 아랫배가 간질간질하고, 타고 앉은 헬릭스의 허리와 배 온기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뜨거워.’

짚고 있는 가슴도, 그와 맞닿은 자신의 손도 너무 뜨겁다고 느낀 순간.

포포퐁.

마나가 울컥 넘어왔다.

레아는 불에 덴 사람처럼 화다닥 손을 떼려 했다.

그렇지만 헬릭스가 놔주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더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매끄러운 피부 아래로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더 빠르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쿵.

쿵.

레아의 귀가 달아올랐다.

달아오른 귀에 들리는 심장박동이 헬릭스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헬릭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와 있으면…… 이렇게 이상해진다.”

너를 못 보면 가슴이 서늘하고, 네가 눈앞에 있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고.

“무섭다.”

그가 낮게 뇌까렸다.

‘뭐가?’

레아는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마나에 흔들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지럽고.

뜨거웠다.

헬릭스가 속삭였다.

“내가 너를…… 망칠까 봐.”

벌컥.

문이 기세 좋게 열렸다.

❀ ❀ ❀

“어? 선객이 있었네?”

낯선 남자의 목소리.

활짝 열어젖힌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달아오른 공기를 단박에 식혔다.

레아와 헬릭스는 그대로 쨍 얼어붙었다. 둘이 미친 듯이 눈빛을 교환했다.

‘레아, 문 안 잠갔나?’

‘너 부축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는데 문을 어떻게 잠가?’

저벅저벅.

문을 연 남자는 그러는 둘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내가 예약한 방 아닌가?”

하필 골라도 예약자가 있는 방을 열고 들어올 게 뭐람. 여러모로 꼬이는 날이었다.

레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예약자를 확인했다.

‘헉.’

그렇게 찾아다닐 땐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지금 네가 왜 여기 들어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