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날 저녁.
루얀은 자신이 직접 이끄는 1조 기사들을 세워 놓고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레아의 호위조로 파견됐던 2조와 달리 수도 피어트 저택에서 계속 근무하던 이들이었다.
당연히 수면마법에서도 무사했고, 오랫동안 루얀의 직속 부하들로 구르느라 빠릿빠릿했다.
루얀이 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오늘 명심할 일은 세 가지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꼽았다.
“첫째, 레아를 지키는 것. 둘째, 누구에게도 안 들키는 것.”
세 번째를 말하려던 루얀이 잠시 침묵했다.
“……셋째, 내가 너무 날뛰거나 쓰러지면 끌고 오는 거다.”
도열해 있던 기사들의 콧구멍이 순간 커졌다.
“이 기회에 하극상 한번 해 보고 싶어 하는 미친놈이 내 부하는 아닐 거라 믿는다.”
기사들의 콧구멍이 정상 크기로 다시 돌아갔다.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숨기기 위해 다들 눈을 내리깔았다.
“이놈들이…… 니들 평소에 나한테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닙니다!”
“대답이 짧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왕국제일검이신 단장님을 모시는 것은 저희의 자랑입니다!”
“내가 왕국에서 검술로 제일이긴 하지. 후.”
루얀이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왕국제일검이면 뭐 하는가. 수면마법에 걸려서 레아가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도 직접 같이 못 가는데.
‘그래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그는 제 직속 부하들을 데리고 비밀클럽을 둘러싸고 지키고 있을 참이었다.
“레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키고, 이번 작전에선 내 말보다 그 애 말을 우선으로 해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명령을 받고 흩어진 후, 루얀은 레아의 응접실로 향했다. 비밀작전이라 문 앞에 자넷 혼자 지키고 있었다.
어린 하녀의 몸이지만 이 문을 지키겠다는 패기는 제 기사들 못지않았다. 루얀은 흐뭇하게 칭찬했다.
“자넷, 수고가 많다. 안에는 다 준비됐냐? 들어가도 되지?”
“네. 그런데 공자님…… 놀라지 마세요.”
말투가 자못 비장했다. 루얀은 고개를 갸웃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놀랄 게 있나?’
헬릭스가 변장을 마치고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흔한 갈색 머리 가발에, 장식 하나 없는 단순한 검은색 가면인데도 잘생겼다는 게 드러났다. 고고한 얼음왕자 같던 원래 모습은 어디 가고 왠지 처연한 분위기였다.
“……이거 다른 의미로 위험한 거 아니냐?”
루얀이 중얼거릴 때였다.
끼이익.
응접실과 연결된 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두 남자가 튕기듯 일어났다.
❀ ❀ ❀
드러난 레아의 모습에 둘은 할 말을 잃었다.
짙게 바른 분으로 창백해진 피부 위로, 느슨하게 틀어 올린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가 음영을 그렸다. 검은 마스카라로 볼륨감을 준 속눈썹이 눈가를 나른하게 만들고, 붉은 아이라인이 운 것처럼 촉촉하게 눈매를 강조했다.
탐스러운 입술에는 새빨간 립스틱이 도드라졌다. 코 옆과 입술 아래에 애교점이 요염하게 찍혔고, 가슴이 훅 파인 드레스는 가느다란 허리 라인과 쭉 트인 슬릿까지 망설임 없이 미끄러졌다.
루얀도 헬릭스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너, 너, 너 그 꼴이 뭐냐!”
“레아, 그, 그렇게 파인 옷을 입으면 어떡하나!”
둘의 반응에 레아는 오히려 흡족해했다.
“그럴싸하지? 나 제대로 하려고 가슴에 뽕도 넣었다?”
“그게 자랑이냐!”
“굳이 넣어야 하나? 안 넣어도 예쁘다.”
역시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하는 남자 같으니라고. 레아가 헬릭스를 향해 까르르 웃었다.
“확실하게 변장하려고 그랬지.”
“추위도 많이 타면서 무리하지 마라.”
루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추위는 무슨. 다른 게 걱정되는 거겠지.”
저 시선은 아무리 봐도 추위 따위보다 다른 놈들이 볼까 봐 이글대는 눈빛이건만. 레아한테는 흑심 싹 빼고 점잖은 말만 하는 모습이라니.
헬릭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설마 모르냐? 모르면 됐다…….”
어쩐지 한숨만 나왔다.
레아가 짝짝 손뼉을 쳤다.
“아무튼, 이제 출발하자.”
한숨을 쉬던 루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막아섰다.
“아무튼은 무슨. 그 꼴론 못 간다!”
“작은오빠, 수면마법 해제하면 누가 제일 안전해지죠?”
“……우리 가족.”
루얀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따라붙었다.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
레아는 가슴을 쭉 내밀고 등을 펴며 자신했다.
“이 모습으로 가면까지 쓰고 비밀클럽에 가면, 아무도 날 의심 안 할걸?”
❀ ❀ ❀
레아의 장담이 맞았다.
문제는 헬릭스였다.
“말세로다.”
그는 비밀클럽 입구를 지나자마자 창백해졌다.
어둑한 조명. 차려입은 남녀들.
그런데 그 차려입은 모습이 좀 많이 헐벗었다. 저 파우치, 이 소파, 요 커튼 뒤…… 여기저기에서 헐벗은 이들이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헬릭스는 하마터면 혀를 찰 뻔했다.
“아무리 밤이고 어둡게 해 놨다고 해도, 이렇게 다 트인 데서…….”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들어올 걸 그랬나.”
헬릭스는 후회했다.
‘가면을 쓴 남녀가 동시에 들어가면 눈에 띌 거야.’
‘알았다. 각자 들어가자.’
그렇게 호기롭게 말하며 먼저 비밀클럽에 들어왔는데. 정작 들어오니 생각보다 너무 별천지였다.
그는 답답한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음료수를 손에 들었다.
“호호호호.”
높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낯선 손이 은근슬쩍 허리를 더듬었다. 헬릭스는 하마터면 손에 든 음료를 쏟을 뻔했다.
“어머 자기, 처음 왔어?”
모르는 여자가 내 허리는 왜 만진단 말인가.
헬릭스의 눈이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동안, 여자의 손은 스리슬쩍 옆구리를 스치며 앞쪽으로 이동했다.
“어머머, 배 딴딴한 거 봐.”
여자의 손이 그의 배를 꾹 눌렀다.
“크, 크흠!”
헬릭스가 영감 같은 헛기침을 하며 몸을 뺐다.
기침과 달리 몸놀림은 재빨랐다. 여자가 멈칫하다 웃었다.
“자기, 좀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런 거 없다.”
단호하게 말한 헬릭스가 손에 든 음료를 꼭 움켜쥐고 슬금슬금 옆으로 피했다.
그렇지만 여자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가만두기엔 너무도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었던 것이다.
‘가면을 쓴 걸 보니 뭔가 구린 짓을 하려 들거나 한번 들러 본 신분 낮은 초짜인데.’
술잔을 든 폼부터 뻣뻣하기 그지없는 걸 보니 구린 짓을 할 놈은 아니었다. 신분 낮은 초짜인 게 분명했다.
‘하는 짓도 보니까 완전 숙맥이고. 어쩜! 신분 낮은 숙맥 초짜라니, 뒤탈 없이 가지고 놀기 딱 좋잖아.’
여자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게다가 외모가…… 어우.’
가면 아래로도 가려지지 않는 빼어난 턱선이며 이목구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훌쩍 큰 키에 탄탄하게 근육이 붙은 몸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헬릭스의 외모를 다시 한번 훑으면서, 여자는 달아오른 몸을 그에게 부딪쳤다.
“어엇!”
헬릭스가 손에 쥔 잔에서 액체가 출렁였다.
촤악!
그의 옷에 음료가 쏟아졌다.
“어머 어떡해!”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헬릭스의 가슴팍을 마구 쓸었다.
“내가 빨아 줘야겠다.”
“아, 아니 괜찮…….”
여자가 그의 젖은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입으로.”
헬릭스가 사색이 되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그는 옷이고 뭐고 도주했다.
“자기야, 어딜 가?”
깔깔대고 웃으면서 여자가 쫓아왔다. 웃음소리가 초조했다.
저 잘생긴 숙맥을 누가 채갈까 봐 서두르는 사냥꾼의 마음!
헬릭스는 오싹했다.
“마, 말세로다.”
그가 더욱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낯선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도대체 인간들이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건가.’
자신이 봉인된 동안 음식만 잘 발달시킨 줄 알았더니 밤문화도 발달시킨 모양이었다.
수호자로서 엄격, 근엄, 진지한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헬릭스에겐 비밀클럽이며 여자의 행동이며 모든 게 문화충격이었다.
“후우.”
제대로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다 빨린 그였다.
“후우우우.”
목이 탔다.
그는 테이블로 가서 새 잔을 들고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니?’
그가 놀라 잔을 들고 쳐다봤다.
‘이 액체는 뭐지?’
향에 풍미가 있으면서 첫맛은 쌉쌀하고 뒤로 갈수록 은근히 달큼했다.
혀에 촥촥 감기는 황홀한 맛이었다. 헬릭스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맛봤다.
‘이렇게 맛있는 걸 레아가 안 먹었을 리 없는데.’
왜 공작가에 머물면서 마신 적이 없지.
그는 의아해하며 홀짝였다. 마실수록 붕 뜨며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특수한 허브를 넣은 과일음료인가?’
술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하는 헬릭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헬릭스가 살던 시대에 술이란 두 종류뿐이었다.
코를 싸쥐게 만들고 위를 할퀴는 독주, 물이 더러울 때 억지로 마시는 말오줌 같은 맥주. 술이라곤 그런 것뿐이었던 것이다.
헬릭스는 조심스레 다시 음료를 맛봤다.
‘역시 맛있군.’
놀란 마음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섬세한 향과 맛을 내는 게 술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 못 하고, 그는 신기해하며 홀짝홀짝 계속 마셨다.
‘이상하다.’
한참을 마시던 헬릭스는 이상을 깨달았다. 기분이 지나치게 좋았다.
‘이 음료에 환각작용이 있나?’
그렇다면 위험했다.
그는 제정신을 차리려고 몸 안에서 마나를 돌렸다.
“쿨럭!”
헬릭스는 피를 토할 기세로 기침을 했다.
‘마나 통제가 안 된다.’
그야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니까 당연했다.
좀 덜 취했을 때 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와중에도 여전히 알딸딸해서,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휘저었다.
“술 취했어?”
“완전 맛이 간 거 같은데?”
헬릭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흐려진 시야에,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 ❀ ❀
한편 레아는 비밀클럽의 홀 안을 뒤지고 있었다.
‘여기 오면 늘 들른다고 했는데?’
그녀는 리케일이 준 정보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트로우 경이 자주 이용한다는 방과, 요즘 자주 불렀다는 창부.
‘방은 지금 빌린 신분으론 못 들어가는 귀족 특실이니까, 먼저 매춘부 쪽을 찾아서 지켜보자.’